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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야합과 사랑 사이

 ‘야합(野合)’이란 말이 있다.
 ‘정치적 야합’처럼 좋지 않은 목적으로 어울리는 관계라는 의미로 흔히 쓴다. 하지만 본디 야합의 뜻은 글자 그대로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들판에서 사랑을 나눈다는 뜻이다.
 저 유명한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월하정인(月下情人)>)에는 야합의 생생한 현장이 포착돼있다.
 작가는 교교한 초생달이 비치는 자정(삼경)에 남녀가 만나는 모습을 그렸다. 분명 부부는 아니다. 쓰개치마를 쓴 여염의 여인과 중치막을 입은 젊은 유생이 은밀히 만나는 장면이 분명하다. 유교적인 사회질서에 사로잡힌 조선 후기의 사회…. 하지만 아무리 억누른다 해도 남녀간 피어나는 사랑을 어찌할 것인가. 그림에는 두 사람의 ‘애절하고도, 위험한 사랑’을 알리는 시(詩)가 써있다. 
 “달빛이 침침한 야삼경에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 교교한 초승달빛 아래 밀회를 즐기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야합…. 그리고 공자와 김유신, 강수….
 그런데 이 야합이 없었다면 역사는 불세출의 인물들을 낳지 못했을 것이다.
 “흘은 안씨와 야합해서 공자를 낳았다.(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사기> ‘공자세가’)
 누군가 하면 공자 이야기다. 환갑을 넘긴 공자의 아버지 ‘공흘’과 스무살도 안된 처녀 ‘안징재’가 야합해서 공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멀리 중국에서 찾을 것도 없다. 김유신의 부모를 보자.
 “김유신의 아버지(서현)가 길에서 숙흘종(진흥왕의 동생)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는 만명을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거치지 않고 사통했다. 이윽고 서현이 만노군(충북 진천)의 태수(太守)가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했다. 만명의 아버지는 그때서야 딸의 야합 사실을 알고(肅訖宗始知女子與玄野合) 분노했다.”(<삼국사기> ‘김유신전‘)
 아버지는 외간남자와 정을 통한 딸을 별채에 가뒀다. 그런데 갑자기 벼락이 내리쳐 문간을 때렸다. 문지기가 혼절한 사이 남녀는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20개월 만에 김유신을 낳았다.
 7세기대 신라의 문장가 강수는 또 어떤가. 강수는 일찍이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야합하였다.(與釜谷冶家之女野合) 둘은 깨가 쏟아지도록 사랑했다.
 그런데 강수가 20살이 됐을 때 부모는 중매를 통해 고을에서 가장 용모와 덕행이 빼어난 당대의 재원(才媛)과 혼인시키려 했다. 강수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가 버럭 화를 냈다.
 “신라에 너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 너처럼 앞길이 창창한 아이가 천한 여자와 무슨 짓이냐. 절대 안된다. 가문의 수치이니 절대 허락할 수 없다.”
 강수는 두 번 끝내 버텼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 실행하지 않는 것이 진짜 부끄러운 것입니다. 옛말에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뜰 아래로 내려오지 않게 하며, 가난하고 천할 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천한 아내‘를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강수는 10대 중후반에 찾아온 풋사랑을 그대로 지킨 예라 할 수 있다. 그 나이에 얻은 아내를 위해 ‘조강지처 운운’하며 지켰다니 참으로 책임감 넘치는 젊은이가 아닌가 싶다. 

덕흥리 벽화분의 부인을 태운 우차의 행렬이다. 시녀들을 대동하고 어디론가 행차하고 있다. 무덤에는 묘주인 남편의 행차모습도 그려져 있다.

■야합의 냄새 물씬나는 역사
 그러고 보면 역사는 그 자체가 ‘야합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야합’이라는 말로 표현되지 않을 뿐이다. 중국의 역사를 열었던 상·주의 시조신화가 모두 야합과 연결돼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보자. 동이족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은(상)나라 창업주 설(契)의 탄생설화이다.
 “설의 어머니 간적은 제곡의 둘째부인이다. 세 사람이 목욕하려 갔다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린 것을 보았다.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했다. 설을 낳았다.”
 은(상)의 뒤를 이은 주나라 시조인 후직의 사례도 보자,
 “후직의 이름은 기(棄)이다. 어머니 강원이 들에 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이 눈에 띄었다. 강원이 기쁜 나머지 그것을 밟으니 마치 아기를 가진 사람처럼 몸이 꿈틀거렸다. 일 년이 지나자 아들이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가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골목에, 숲속에 버렸지만, 그 때마다 살아 남았다. 처음에 ‘버린 아이’라 하여 ’버릴 기(棄)‘라는 이름을 얻었다. 갑골문에서 ‘기’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태아를 삼태기로 버리는 형상이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화라 할 수 있다. 
 물론 상·주의 시조설화는 ‘야합‘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맥락을 살피면 모두 여인들이 놀러갔다가 남자를 만났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주나라 시조의 어머니 강원은 들판에서 기골이 장대한 남성을 만나 사랑을 나눈 것이 아닐까. 은(상) 시조의 어머니도 놀러갔다가 제비를 삼켰다는 것인데, 이 또한 야합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것은 모계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상징해주는 대목이다. 

 ■해모수는 ‘나쁜 남자’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탄생신화 역시 야합과 연결돼있다. 중국 상·주 시대와 다른 것은 매우 솔직하다는 점이다.
 “나는 하백의 딸 유화라 합니다. 동생들 하고 놀고 있는데, 한 남자가 ‘내가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나를 유인하더니 정을 통하고 갔습니다. 그런 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모는 중매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고 날 이곳(태백산)으로 내쫓았습니다.”(<삼국유사> ‘고구려조‘)  

버릴 기(棄)자의 갑골문. 삼태기에 아직 피가 뚝뚝 떨어지는 영아를 넣어 버리는 상형문자이다.

그러니까 해모수는 ‘하느님의 아들 운운’하면서 온갖 감언이설로 여인(유화)를 꾀어 사랑을 나눴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해모수가 그렇게 압록강가에서 하백의 딸인 유화와 사랑을 나눈 뒤에는 “‘나 몰라라’하고 외면한 뒤 도망가버렸다”고 직설화법으로 지적했다. 중국 상·주시대의 시조설화처럼 ‘제비를 삼켰다’(상나라 시조 설)든가, ‘거인의 발자국을 밟았다’(주나라 시조 기)든가 하는 우회적인 표현이 아니라 ‘야합해버리고 도망가버렸다’고 설명한 것이다. 유화는 이 때의 야합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이가 바로 주몽이다.
 기록대로라면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한순간의 욕망을 참지못하고 강가의 여인을 취한 뒤 그 여인과 뱃속의 아이를 외면해버린 ‘나쁜 남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가. 삼국 가운데 유독 고구려에서 ’연애결혼‘이 성행했던 것 같다. <남사> <삼국지> <북사> <후한서> <진서> <주서> 등 중국사서를 종합해보자.
 “풍속에 음란하며,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 유녀(游女)가 많다. 아무나 지아비로 삼는다.(風俗尙淫 不以爲愧 俗多游女 夫無常人)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논다. 귀천의 절도가 없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구려에는 몸을 파는 유녀가 많았다. 또한 풍속이 음란했으며, 남녀가 불야성을 이루며 놀았다.   
 “결혼을 할 때는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인정한다.(有婚嫁 取男女相悅卽爲之)”
 이른바 자유연애, 자유결혼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신라시대 짝짓기 행사
 그런데 주몽이나 김유신, 강수 등의 예에서 보듯 ‘연애결혼’ 보다는 ‘중매결혼’이 정상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매를 통하지 않은 야합을 비난하는 대목으로 보면…. 물론 고구려 뿐 아니라 신라에서도 ‘연애결혼’은 허용됐다. 그 무엇으로도 어쩔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삼국유사> ‘김현감호(金現感虎)‘편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해마다 2월이 되면 흥륜사(興輪寺)의 전탑(殿塔)을 도는 복회(福會)를 펼쳤다. 행사에는 서라벌의 남녀가 죄다 나왔다. 원성왕 때였다. 김현이라는 이가 밤이 깊도록 혼자서 탑을 돌았다. 그 때 한 처녀가 염불을 하면서 따라 돌다가 서로 눈이 맞았다. 둘은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으슥한 곳으로 숨어 정을 통했다.
 짧은 춘정을 마치고 처녀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은 한사코 따라갔다. 이윽고 서산(西山) 기슭의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늙은 할머니가 처녀에게 물었다.
 “함께 온 사람이 누구냐?”
 처녀가 사실을 말하자 늙은 할머니는 말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질렀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어서 나무랄 수도 없구나. 은밀한 곳에 숨겨 두거라. 네 형제들이 나쁜 짓을 할까 두렵구나.”
 실은 처녀는 호랑이였던 것이다. 이야기의 결말은 호랑이 처녀가 자신을 희생하고 김현을 벼슬길로 올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 설화를 가만 보면 젊은 남녀들이 이 탑돌이 행사를 자유연애의 장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장천 1호분의 <백희기악도(百戱伎樂圖 )>. 고구려풍습에는 남녀가 무리를 지어 밤새도록 놀았고, 자유연애를 통한 혼인도 폭넓게 허용됐다고 한다.

■사랑의 도피행각
 그런데 이런 행사는 신라 뿐이 아니었다. 동이계 나라인 은(상) 말기에 “발가벗은 남녀들을 주지육림 속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한 다음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등을 보면 “부여사람들은 (상나라 정월에) 하늘에 제사지내고 음식과 가무를 즐겼다”고 했다. 또 “마한에서는 5월에 씨를 뿌린 뒤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춘다”고 했다. <남사>에서는 “고구려인들은 읍락에서 남녀가 매일밤 무리를 지어 노래하고 즐긴다”고 했다.
 이런 것들은 한마디로 고대의 축제이다. 제사를 지낸 뒤 올리는…. 특히나 하늘신·조상신 모시기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동이족의 대규모 축제….
 은(상)의 뒤를 이은 주나라의 관제를 기록한 <주례(周禮)>에도 이런 대목이 있다.
 “중춘(仲春)의 달에 남녀가 모이게 한다. 이 달에는 달아나는 자도 막지 않는다.(仲春之月 令會男女 于是月也 奔者不禁)”
 중춘은 음력 2월이다. 봄기운이 돋아나는 계절에는 청춘남녀의 ‘야합‘과‘도피행각’을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사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이뤄졌다. 이른바 디오니소스(Dionysus) 축제나 바쿠스(Bacchus) 축제 같은…. 이런 행사들도 나중에는 격렬한 춤과 음악, 자유로운 성행위가 난무하는 광란의 축제로 변질됐다고 한다. 또한 이는 종족번식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태초의 상황을 재현한 일종의 종교의식일 수도 있었다. 이렇듯 자유연애와 연애결혼의 뿌리는 신화가 창조되고, 나라가 열리는 그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지금 보아도 일면식도 없는 남녀가 평생을 함께 사는 것은 끔찍할 수 있다.
 중국의 사상가이자 대문호인 루쉰(魯迅)의 말이 귓전을 때린다.
 “(중매결혼은) 두 마리 가축을 우리에 넣고 ‘자 이제부터 너희들은 함께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백거이의 한마디…
 그럼에도 한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기록이 있다.
 고구려에 몸파는 여자가 있었고, 남녀간 자유연애가 통용됐지만, 결혼의 법도만큼은 지엄했다는 기록이다.
 “결혼은 남자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는 것으로 끝낸다. 재물이 없이 가는 것이 (결혼의) 예법이다. 혹 재물을 받으면 딸을 계집종으로 파는 것으로 여겨 부끄럽게 여겼다.(男家送猪酒而已 無財聘之禮 或有受財者 人共恥之 以爲賣婢)”(<주서>·동이열전 등)
 자유연애, 자유결혼을 허용했다지만, 호화혼수품을 받고 딸을 파는 혼인은 염치없는 행위라고 여긴 것이다. 혼인의 법도도 까다로웠다. 혼인을 구두로 합의하면 여자의 큰 집 뒤에 작은 집(서옥·壻屋)을 지었다. 그런 뒤 신랑이 저녁에 찾아와 2~3번 엎드려 절한다. “첫날 밤을 치르게 해달라”고…. 그런 과정을 거쳐 남자가 장성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부인을 데리고 집에 돌아온다. 이것이 고구려의‘데릴사위제’이다.
 요즘의 여성들이 들으며 무슨 켸켸묵은 얘기냐 비아냥 댈 수도 있겠지만 백거이(白居易)의 한마디만큼은 한번쯤 되새겨보기를….
 “어리석은 여염집 여인들아. 삼가 가볍게 몸을 허락하지 말아라.(奇言癡小人家女 愼勿將身輕許人)”

   경향신문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