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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실명 공개된 ‘신라 최대의 세습재벌’ 김유신의 황금저택

<삼국유사> 기이 진한조에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보입니다. “신라 전성기 서울(경주)에는 17만8936호가 있었고…. 금입택(金入宅)이 35개(실제로는 39곳)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4인 1가구 기준으로 따져볼 때 전성기 경주의 인구가 70만명을 훌쩍 넘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금이 들어간’ 호화저택, 즉 금입택(金入宅)이 35곳(39곳)에 달했다는 것 또한 대단하지 않습니까.

834년 흥덕왕은 백성들이 해외명품만 좋아한다면서 신라사회의 사치향락 풍조를 개탄했다. ①보루네오 등에서 잡히는 거북등껍질인 대모로 만든 신라시대 머리빗(호암미술관 소장) ②경북 칠곡 송림사 전탑 사리기의 페르시아계 유리잔과 병(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③경주 조양동 출토 당나라제 삼채 뼈단지 ④불국사에서 나온 수마트라 산 명품원목 ‘침향’의 조각들(이한상 교수 제공) ⑤황남대총 북분의 유리잔. ⑥황남대총 출토의 페르시아계 유리병과 유리잔.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신라판 호화저택 공개
그런데 <삼국유사>는 이 기사를 쓰면서 ‘금입택’, 즉 호화저택의 명단을 공개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특히 눈에 띄는 ‘금입택’이 포함되어 있는데요. 바로 김유신 가문의 종가인 ‘재매정택(財買井宅)’입니다.
먼저 한번 생각해봅시다. ‘금이 무시로 들어간다’는 뜻인 ‘금입택’은 과연 어떤 집을 가리키는 표현일까요. <삼국유사>의 편찬자는 ‘금입택’이란 표현을 쓰면서 ‘부잣집의 호화저택(부윤대택·富潤大宅)’이라는 주석을 달아놓었습니다. 이 ‘금입택’ 표현을 두고 ‘금당과 탑을 가진 호화저택’이라고 풀이하는 연구자도 있더라구요. ‘금입택’은 ‘금당입택(金堂入宅)’의 약칭으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즉 ‘금입택=금당입택’설은 신라 진골 귀족들의 저택 안에 조성한 ‘개인 원찰’일 가능성을 타진하는 겁니다. 
물론 ‘금입택’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답니다. 그런데 ‘황금이 무시로 드나들었다’는 표현은 당시 신라의 사정을 살펴볼 때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닙니다. 보십시요. 천마총이나 황남대총 등 5~6세기 신라시대 고분에서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황금유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삼국유사> ‘기이 진한조’에 등장하는 금입택(金入宅) 관련 기사. <삼국유사> 편찬자는 ‘황금이 들어가는 집’인 금입택이 신라에 35곳(실제로는 39곳) 있다고 소개한 뒤 ‘금입택은 부윤대택, 즉 부유한 호화저택’이라는 각주를 달아놓았다. 또한 금입택 39곳을 열거했는데 특별히 ‘재매정택’을 소개하면서 ‘김유신의 종가’라고 콕 찍었다.


■실제로 ‘금테 두른 집일 수도’
사실 ‘신라=황금의 나라’라는 인식은 국제적으로도 널리 퍼져있었어요.
중세 아랍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알 이드리시(1099~1166)는 “신라에서는 황금이 너무 흔해서 심지어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까지도 황금으로 만든다”(<천애갈망자의 산책>)고 표현했어요. 
아랍의 사학자인 알 마크디시(946?~1000?) 역시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황금그릇을 사용한다”(<창세와 역사서>)고 했어요.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금입택’ 단어도 허투루 볼 수 없겠네요. 그냥 부잣집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황금이 쏟아져 들어가는 집, 혹은 황금으로 잔뜩 치장한 호화저택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얘기죠.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귀족의 저택을 두고 ‘금테두른 집’이라는 수근거림과 함께, 황금 뇌물이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을 풍자한 단어일 수 있죠.

경주 왕경지역에서 발굴된 추정 금입택. 개인저택 안에 금당과 목탑, 석탑 등을 조성했다. 즉 ‘금입택’은 ‘금당이 들어가 있는 집’이라는 뜻이며, 진골 귀족들의 저택 안에 마련한 개인원찰이라는 주장이 있다.이은석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 제공

<화랑세기> 염장공조를 보면 수상한 기록이 보입니다. 염장공(586~648)은 17대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인데요. “사람들이 공의 집을 수망택이라 했다. 금이 마치 홍수처럼 들어갔다”는 겁니다. ‘수망택’은 바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39개 금입택 가운데 하나이거든요. 풍월주의 저택에 황금이 쏟아져 들어간다면 정상적인 재산축적일 수도 있지만 어떻습니까. 뇌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죠. 
또 중국측 기록인 <신당서> ‘신라조’는 “(신라의) 재상가는 녹이 끊이지 않는다. 노비와 갑병(甲兵), 그리고 소·말·돼지의 숫자도 그 수와 비슷하다”고 했네요.  
그뿐이 아니구요. 이른바 ‘금입택’의 경제력을 암시하는 문헌과 금석문도 적지않습니다. 
경북 문경의 봉암사지증대사탑비(국보 315호)에 나오는 기록을 봅시다. 지증대사(824~882)가 사찰에 기증한 개인소유의 토지가 500결이라고 했습니다. 9살 때 출가한 지증대사가 자력으로 재산을 모았을 리 만무하겠죠. 지증대사가 쾌척한 토지 500결은 대사의 가문이 축적한 재산 중 일부였을 겁니다. 일본 도다이지(東大寺)의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된 신라촌락문서에 따르면 ‘촌락인구 463명이 경작하던 토지가 564결’이라 했는데요. 
이 문서에서 단서를 찾는다면 500결은 400명 가량이 경작하는 토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증대사의 가문이 이 정도였다면 어떻습니까. ‘금입택’의 주인인 진골귀족의 재력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전남 장흥 보림사에 보조선사 탑비(보물 158호)도 의미심장한데요. 
“860년 헌안왕은 (금입택에 속한) 수망택과 이남택에게 ‘보조선사 체징(804~880)의 사찰인 보림사에 황금 160분, 벼 2000곡을 희사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황금 160분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벼 2000곡은 요즘의 3000~4000가마에 이르는 양입니다. 임금(헌안왕)이 자신이 존경하던 스님을 위해 금입택 가문에게 거액의 기부금을 강요했다는 겁니다.

헌안왕이 두 금입택 가문에게 “황금 160분과 벼 2000곡을 사찰에 희사하라”는 교지를 내렸다는 보조선사 전남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내용.


■“해외명품만 좋아한다”고 개탄한 흥덕왕
신라사회가 얼마나 호화로웠는지 알 수 있는 분명한 기록이 있죠.
834년(흥덕왕 9년) 흥덕왕이 “백성들이 해외명품만 찾는다”고 개탄하며 사치금지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잡지’에 보입니다. 흥덕왕은 “백성들이 앞다퉈 사치와 호화를 즐긴다. 해외명품만 숭상하고 국산은 수준이 낮다고 혐오한다”고 한탄합니다.
그럴만도 합니다. 신라인들은 당시 금은실과 인도산 공작꼬리, 캄보디아산 비취모(물총새의 털)로 만든 허리띠와 페르시아산 에메랄드를 알알이 상감한 머리빗, 그리고 보르네오와 필리핀 등에서 잡은 거북등껍질로 만든 관 등을 썼습니다. 요즘의 자가용에 해당되는 마차의 치장에도 열을 올렸는데요. 여기에 인도 및 스리랑카산 목재인 자단과 베트남산 침향으로 마차를 ‘튜닝’하는 자들도 많았답니다.
흥덕왕은 특단의 조치를 내리죠. 골품에 따라 주택의 외양과, 침대를 포함한 가구와 인테리어, 마차와 말안장 등의 치장 규정을 엄격히 규정해 놓습니다. 흥덕왕은 그러면서 “옛 법에 따라 다시 교시를 내리는데 만약 죄를 저지르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답니다. 

봉암사 지증대사 탑비에는 지증대사가 토지 500결을 절에 희사했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지증대사가 9살에 출가했으므로 아마도 대사의 가문에서 희사한 것으로 보인다.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 소장


■김유신 종가의 우물
그렇다면 김유신 가문은 어땠을까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금입택’ 가운데 으뜸은 단연 김유신의 ‘재매정택(財買井宅)’입니다. ‘재매정택’은 집 안에 있는 우물(재매정·사적 246호)을 근거로 붙인 이름인데요.
김유신의 우물과 관련해서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죠. 645년(선덕여왕 14년) 김유신이 매리포성(거창)을 공격한 백제군을 물리치고 개선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백제의 반격을 받았다는 급보를 받습니다. 이에 김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못한채 병기를 손질하고는 다시 출정길에 나섭니다.
그 사실을 몰랐던 집(재매정)안 사람들이 개선한 장군을 문밖에서 영접했는데요. 장군은 ‘쌩’하고 대문을 지나쳐가다가 그냥 가기가 뭣했는지 말을 멈추고는 부하를 시켜 집에서 마실 물을 길어오게 했답니다. 김유신은 그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우리 집 물은 여전히 예전 맛 그대로구나!’하면서 감탄했다네요. 
이에 군사들은 “대장군도 집에 들르지도 않고 출전하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군사들이 가족과 떨어짐을 괴로워 할 건가”(<삼국사기> ‘김유신 열전’)하고 전의를 다졌답니다. 그것이 하필 우물 이름을 ‘재매(財買)’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종가의 택호(宅號)로 삼은 이유가 돼겠죠.

김유신의 종가인 재매정택 안에 있는 유물. 재매정택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 우물 때문에 붙은 것이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신라 최대의 세습재벌
삼한통일의 으뜸공신인 김유신 가문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쌓았죠. 우선 김유신의 증조부인 김구해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구형왕·재위 521~532)입니다. 신라 법흥왕(514~540)은 532년 항복한 김구해에게 상등(上等)의 벼슬을 내리고 본국(금관가야)의 땅을 식읍으로 내렸죠. 자신이 다스리던 금관가야 영토에서 세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셈이죠. 
게다가 김유신은 백제·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여러차례 포상을 받았습니다. 단적인 예로 662년(문무왕 2년) 고구려와의 임진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공로로 본피궁(신라의 관청) 소속의 토지(경주 시내의 노른자 땅으로 추정)와 갖가지 재화, 그리고 노복까지 하사받았습니다. 

35(실제로는 39) 금입택 중 하나로 명시된 김유신의 재매정택터. 재매정택의 안에 있는 우물이 사적(246호)로 지정됐다.문화재청 제공

1년 뒤인 663년(문무왕 3년) 백제부흥운동을 제압한 공로로 밭 500결(230만평)을 받았고요.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인 669년(문무왕 9년)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상급을 받았죠. 즉 문무왕이 전국의 말 목장 174곳을 왕실(22곳)과 국가기관(10곳), 개인 등으로 골고루 나눠주었는데요, 김유신은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629~694·5곳)보다 더 많은 6곳의 말목장을 하사받았죠. 
김유신가를 향한 신라왕실의 대접은 대를 이어가며 계속됐는데요. 예컨대 성덕왕(재위 702~737)은 당시 김유신의 손자들(김윤중·윤문 형제)를 총애했는데요. 임금의 친족까지 “아니 왜 김유신 후손들만 싸고 도냐”고 시기질투했지만 성덕왕은 “지금 여러분이 무사태평 술자리를 즐기는 것은 다 김윤중 형제의 할아버지(김유신) 덕분이 아니냐”고 일축했다네요.
이렇게 김유신의 재매정은 왕족까지도 시기질투한 신라 최대의 세습재벌이 됐는데요. 
하지만 사실 김유신 가문은 그렇게 대접받을만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즉 삼국통일 후 당나라와의 피할 수 없는 전쟁(황해도 석문전투)이 벌어지자(672년·문무왕 12년) 둘째아들인 원술이 싸움터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원술은 살아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김유신은 “내 아들은 왕명을 욕되게 했으며, 가훈도 저버린 비겁쟁이”라면서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장했답니다. 그러나 문무왕은 “원술에게만 혹형을 내릴 수 없다”면서 사면령을 내렸답니다.

2017년 김유신의 종가로 알려진 재매정택의 구덩이에서 갑옷 조각들이 출토됐다. 오른쪽 사진은 그 조각들을 복원한 모습이다. 물론 김유신의 갑옷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유신 가문의 누군가가 입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원술
이에 원술은 부끄럽고도 두려워 감히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시골로 달아나 숨었습니다.
원술은 아버지가 죽은 뒤(673년) 비로소 어머니(지소부인)을 찾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문무왕의 누이이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끝내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원술은 이미 돌아가신 남편에게서 아들 취급을 받지 못했다.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될 수 있겠는가.”
원술은 가슴을 치고 통곡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태백산에 은거한 원술은 675년(문무왕 15년) 매소성(경기 연천 전곡의 대전리 산성으로 추정) 전투에 참전해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신라는 매소성 대첩으로 당나라를 완전히 몰아냈습니다. 원술은 아버지의 공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당나라의 한반도 침략 야욕을 꺾는데 일조했습니다. 그러나 원술은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답니다.
부모에게 받아들이지 못한 한 때문에 초야에 묻혀 평생을 살았는데요. 
만약 김유신 가문의 금입택인 ‘재매정’이 문자 그대로 ‘재물을 부르는 우물’로 끝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김유신 가문은 그저 돈만 좇은 신라판 재벌가로 끝났을 겁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재매정’에는 공동체의 가치를 오롯이 지키는 진정한 명문가의 정신이 녹아있습니다. 2017년 재매정터에서 갑옷이 한 점 발견되었는데요. 비록 김유신 장군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네요. 그러나 돈만 추구하지 않았던 ‘신라판 노블레스 오블레주’ 가문의 상징유물이라면 그 또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문화유산이겠죠.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