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해외에 흩어진 한국문화재의 환수를 추진하고, 또한 제대로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문화재청 산하기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재단의 홈페이지 화면을 보면 ‘193136’이라는 숫자가 떠있습니다. 이것은 22개국에 흩어져있는 한국 문화재의 숫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숱한 문화유산을 빼앗긴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이자, 언젠가는 되찾아야 할 문화유산이라는 다짐과 각오를 담았을 것입니다.
■약탈문화재를 소장한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대한민국 땅에도 ‘남에게서 빼앗은 약탈문화재’가 있답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대표 박물관인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360여건 1500여점의 중앙아시아 문화재입니다.
우리가 어디 남의 물건 넘볼 형편이나 되었습니까. 이 ‘약탈문화재’는 ‘오타니 컬렉션’으로 통하는데요. 일본의 백작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1876~1948)가 결성한 중앙아시아 탐험대가 3차례에 걸쳐 차지한 유물입니다. 이중에는 구입품도 있지만 현지인을 꼬드겨 헐값에 넘겨받았고, 또 절대다수는 발굴이라는 미명 아래 무단 반출한, 이른바 약탈품이죠. 그래서 ‘컬렉션’이라기 보다는 ‘약탈품’이 더 적당한 표현일 수 있겠네요. 이상하죠.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저런 유물이 이 땅에 남게 됐을까요. 여기엔 기막힌 사연이 담겨있습니다.
■모래바람 속 석굴사원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에는 고대부터 동서문명의 흔적들이 거센 모래바람 속에 묻혀있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서구 열강이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되는 다량의 고문서와 직물·목재류 등 유기질 유물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각국 탐험대는 마치 먹잇감에 달려드는 상어떼처럼 중앙아시아 유물을 싹쓸이해갑니다.
그 중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곳이 둔황(敦煌·돈황)인데요. 특히 첸포둥(천불동·千佛洞)의 막고굴 제16~17굴을 둘러싼 경쟁적인 유물 반출은 기가 막힙니다. 돈황에서 20㎞ 정도 떨어진 첸포둥은 동서양을 오가는 순례자·상인 등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었는데요.
위구르어로 ‘죽음(타클라·Takla)’과 ‘끝없는 지역(마칸·Makan)’을 의미하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이들이나,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여행자들이나 모두 기도를 올린 곳이었습니다. “위험을 벗어나게 해달라”거나 혹은 “무사히 도착하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기도였습니다.
오아시스 지역인 첸포둥의 밍사산(명사산·鳴沙山) 산록 일대에는 길이 1.6㎞ 정도의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는데요. 이곳 주민들은 “절벽에 불상과 벽화를 꾸민 석굴을 조성하여 부처님에게 봉헌하라”고 여행객과 순례자들을 꼬드겼습니다. 그렇게 4세기 중엽부터 13세기까지 1000개 이상의 석굴사원이 조성됐고, 그중 남아있는 것은 500곳 남짓 됩니다.
■“아직 둔황에는 많은 유물이…”
그런데 19세기말 이 석굴사원에 정착한 제대군인 출신 왕위안루(왕원록·王圓록·1851~1931)이 1900년 이른바 16·17굴에서 빼곡히 쌓인 경전과 문서, 그림을 발견합니다. 이 소식을 접한 영국 탐험가 마크 오렐 스타인(1862~1943)이 달려와 왕위안루를 꼬드겨 3차례에 걸쳐 한문문서 8102점이 포함된 1만점의 유물을 챙겨갑니다. 두번째로 털어간 이가 프랑스인인 폴 펠리오(1878~1945)였습니다. 펠리오는 이듬해인 1908년 2월 막고굴에 도착해서 앞서 스타인이 빼먹은 고문서·고고품 등 5000여점을 쓸어갑니다.
펠리오는 가져간 유물 일부를 난징(南京)과 톈진(天津), 베이징(北京) 등에서 공개했는데요. 육조시대(229~589년)~당나라 시대(618~907)에 걸친 고색창연한 사경과 경전을 본 청나라 고증학자들은 경악합니다. 금석·서화 소장가인 단방(端方·1861~1911)은 “일부분이라도 좋으니 도로 팔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지만 펠리오는 단칼에 잘렸답니다. “아직 둔황에 좋은 유물이 잔뜩 남아있습니다”라고요.
청나라 조정이 뒤늦게 “둔황의 막고굴 유물들을 북경으로 모두 실어오라”는 명을 내려서 1만점에 육박하는 유물을 북경으로 옮겨오는데요.
■일본인 오타니의 마구잡이 약탈
그러나 왕위안루라는 인물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틈에 유물 일부를 은닉해놓은 거죠. 그 왕위안루가 ‘꿀꺽’한 유물을 노린 자가 있었는데요.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가 파견한 탐험대였습니다. 그럼 오타니는 누구일까요. 교토(京都)에 본부를 둔 일본 불교 종파 중 하나인 정토진종 혼간지파(本願寺派)의 본산인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22대 세습 문주(門主·지도자)였다.
1903년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니시혼간지의 문주직을 세습했고, 백작 작위도 계승했습니다. 그러나 오타니는 정통 성직자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영국에서 유학했으며,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이 됐구요. 이후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는데요. 그 덕분에 중앙아시아 탐험의 개척자라는 스웨덴의 스벤 헤딘(1885~1923) 및 오렐 스타인 등과 교분을 쌓았죠.
그런 오타니가 중앙아시아에 뛰어든 명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의 동진경로를 명확하게 밝힌다”(<서역고고도보> 1915년)는 것이었습니다. 오타니는 이런 명분으로 1902년부터 14년까지 3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 전역에 ‘탐사대’를 보내 벽화 등 수많은 유물을 수집·반출·약탈했습니다.
1차(1902~04)와 2차(1908~09) 탐험대는 키질(克孜爾)의 첸포둥, 투르판(吐魯番)의 쿠차(庫車)와 베제클리크(伯孜克里克) 석굴, 허텐(호탄·和田), 누란(樓蘭) 등을 돌며 수많은 불경과 조각상, 고문서 등을 챙겨갑니다. 특히 오타니의 3차 탐험대(1910~14)는 왕위안루가 둔황에서 ‘꿀꺽’한 마지막 유물(당나라 경전 등)을 낱알까지 훑어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오타니 유물 포함 1000점)은 영국(1만점), 프랑스(5000~6000점), 중국(1만점)에 이어 4번째로 많은 둔황문서를 획득한 나라가 됐답니다.
그런데 ‘오타니 탐험대’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요. 상세 보고서는커녕 발굴품들의 출처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왠지 기시감을 느끼게 됩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도 일부 아마추어 일본인들이 도굴과 다름없는 무단발굴을 자행했고, 발굴보고서도 내지 못한 사례가 많았죠. 그러니 학술적인 깊이가 부족했던 오타니의 중앙아시아 탐사는 ‘마구잡이 약탈’이라고 폄하해도 할말이 없을 것 같아요.
■경복궁 수정전에 온 오타니 유물
그렇게 수집·약탈한 오타나 유물은 오타니의 별장인 효고(兵庫)현 니라쿠소(二樂莊)에 보관됐습니다. 그러나 이 유물들은 현재 일본, 중국, 한국 등의 여러 기관(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과 개인 컬렉션으로 흩어져 있답니다. 무슨 곡절이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3차 탐험이 끝나던 해인 1914년 2월 터진 일련의 횡령·위조 사건이 결정적이었데요. 당시 오타니가 문주로 있던 니시혼간지 승려 5명이 교단 부속의 재단 자금을 유용한 혐의로 수감됐는데요. 이때 오타니는 책임을 지고 문주직에서 물러납니다. 오타니는 물론이고 교단은 자금난에 빠졌데요. 오타니가 10여년간 쓴 탐험비용만 교토(京都)시의 1년 예산에 해당될만큼 엄청났다는 겁니다.
오타니는 그해 12월 중국 뤼순(旅順)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때 1714건에 이르는 유물(문서는 110건 2만6433점)을 중국으로 가져갔답니다. 지금 중국국가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답니다. 또 남은 유물 9000여점은 류코쿠대(龍谷大) 도서관에 기증됐고요. 국립도쿄(東京)박물관도 600여점의 오타니 유물을 갖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국립중앙박물관은 어떻게 오타니 약탈품을 소장하게 됐을까요.
오타니 유물이 뿔뿔이 흩어질 때 맨 마지막까지 오타니의 별장인 니라쿠소에 남아있던 것들인데요. 이니라쿠소는 1916년 1월 상공대신을 지낸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1869~1965)에게 넘어갔는데요. 이때 별장 지하실에 소장된 중앙아시아 유물까지 덤으로 묻어간거죠.
그런데 광산재벌이기도 한 구하라는 당시 조선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와 동향(山口縣·야마구치현)이었는데요. 덤으로 얻은 오타니 수집품을 데라우치에게 기증 형식으로 인계했답니다.
이상하죠. 총독 데라우치가 아무리 고향선배라지만 장사꾼인 구하라가 어떤 대가도 없이 문화재를 넘겼을까요. 그래서 학계에서는 아마도 조선 내에서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 등 조선총독부의 이권사업을 노리기 위해 이 유물을 데라우치에게 뇌물로 넘겼을 것으로 추정한답니다.
공교롭게도 오타니 유물이 소장됐던 니라쿠소는 1932년 화재로 소실됐는데요. 만약 한국으로 넘어오지 않았다면 이 유물들은 한 줌의 재로 변했을 겁니다. 아무튼 니라쿠소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유물 360여건 1500여점은 1916년 4월 30일 고베(神戶)를 떠나 5월 서울의 경복궁 수정전에 보관 전시됐습니다.
■“대한민국은 선의취득국가”
그렇다면 또 하나의 논쟁거리가 있겠네요. 대한민국이 과연 ‘약탈문화재가 분명한 오타니 유물’을 소장해도 되는 거냐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거든요. 현재 중앙아시아 유물들은 최소 13개국의 30개 박물관과 연구기관에 흩어져있는데요. 패권주의를 과시하면서 경쟁적으로 중앙아시아 유물을 톤(t) 단위로 빼간 이들은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어요.
그런데 영국·프랑스·스웨덴·독일·러시아·미국·인도·일본·대만·핀란드·중국 등 중앙아시아 유물들을 소장한 나라 중 ‘대한민국’이 끼어있으니까 왠지 부담스럽기는 합니다.
그러나 꼭 반환해야 할까요. 하지만 이 또한 정답을 내기란 쉽지는 않습니다.
따지고보면 대한민국은 가해국이 아니라 선의취득국이 아닌가요. 또 언젠가는 돌려줘야 겠지만 누구한테 돌려준단 말입니까. 중앙 아시아인들에게 돌려줘야 하는것 아닌가요.
얼마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연수온 투르판 박물관 관계자는 “중앙아시아 유물의 홍보차원에서 봐도 그렇고, 좋은 환경에서 제대로 관리를 해줄 한국의 국립박물관이 소장하는 편도 나쁘지는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네요. 그렇습니다. 언젠가 반환할 때는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소장하고 보관하는 문화유산인만큼 탁월하고도 보편적인 가치에 걸맞은 대접을 아낌없이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은 최근 상설전시관 3층을 ‘세계문화관’으로 개편하면서 ‘창조신 복희와 여와’ 등 81건 154점의 오타니 유물을 전시중입니다. 시간이 나면 한번 관람해보시기 바랍니다.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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