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뇽하세요. (드)자이너에요. (레)이름은요. (김)봉남이에요.’
한때 유행했던 ‘앙드레김’ 소재의 4행시다.
이 4행시의 유래를 알면 좀 씁쓸하다.
1999년 8월 24일 옷로비 사건을 다룬 국회청문회장에 색조 화장에 하얀 재킷을 입고 출석한 이가 있었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씨였다.
김씨는 증인선서에서 ‘주민번호 350824…이름 앙드레김’이라 했다.
목요상 국회 법사위원장이 ‘예명 말고 본명을 대라’고 닥달했다.
그러자 앙드레 김씨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김봉남’이라 답했다.
세련미의 극치를 자랑한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나이가 벌써 64살이고, 본명 또한 그렇게 토속적이라니….
방청석은 웃음바다로 변했고, ‘앙드레 김’은 아무 잘못도 없이 ‘김봉남’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놀림감의 대상이 되었다.
그제 구속된 ‘문화계의 황태자’ 차은택씨가 검찰조사를 위해 호송차에서 내리는 장면이 온종일 화제를 뿌렸다.
이마부터 정수리, 뒤통수까지 훤한 민머리였음이 드러났다.
얼굴을 감싼 차은택씨의 모습에 갖가지 설과 유머가 난무했다.
‘최순실이 대질심문에서 가발 벗은 차은택을 몰라봤다’ ‘차은택이 다까발기겠다는 의지를 대통령에게 보여주려고 민머리를 공개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차씨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는 따위의 이야기가 떠돌았다.
‘대역이 아니냐’는 의심과 함께 ‘동정표를 얻으려는 쇼’라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차은택씨는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가발을 벗은 것이다.
미결수의 경우 책·옷·이불·면도기 등 26종류의 물건만 소지할 수 있다. 가발은 영치(보관·처분) 대상이라 착용할 수 없다.
인권침해의 요소가 다분하다.
자발적이든 아니든 유죄가 확정되지도 않은 피의자의 가발까지 벗게 만드는 것은 옳은 처사가 아닌 것 같다.
모자라도 씌였다면 어땠을까. 탈모 인구 1000만명 시대에 차은택의 민머리 공개가 결코 남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다만 ‘차은택 가발’이 사건의 본질을 흐릴 수 없다. 17년 전 옷로비 사건을 두고 이런 비아냥이 나온다.
당시 사건의 청문회와 특검이 알아낸 것이 딱 한가지, 즉 ‘앙드레김의 본명이 김봉남이었다’는 것이다. 실체규명은 흐지부지됐다.
지금은 어떤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도 ‘차은택=민머리’만 밝혀내고 종결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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