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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허수아비' 대통령과 '참새' 시민

32년 고구려 대무신왕은 부여군의 반격에 고전하다가 수렁에 빠졌다.

 

그러자 대무신왕은 허수아비 부대를 진열해놓고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

 

364년 신라 내물왕은 왜병의 공격에 맞서 허수아비 수천개를 토함산에 세워놓고 용맹한 군사 1000명을 매복시켰다. 깜빡 속은 왜병은 신라 매복병에 말려 전멸당하고 말았다.

 

또 있다. 당나라의 작은 마을 현령 장순은 난을 일으킨 안록산 부대와 60일이나 맞서 싸웠으나 화살이 바닥났다. 장순은 꾀를 냈다.

 

 

홍성담 작가의 박대통령 풍자그림 ‘세월오월’.  대통령을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허수아비로 그렸다.|연합뉴스

야음을 틈타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1000개를 내려보냈다. 적의 공격인줄 착각한 안록산 부대는 화살 수십만개를 쏘았다. 장순은 고슴도치가 된 볏짚에서 화살을 얻었다.

 

얼마후 장순은 진짜 병사 1000명을 내려보냈다. 반란군은 이번에도 허수아비 부대인줄 알고 코웃음 쳤다가 대패당했다. 허수아비는 적이나 반란군을 속이는 위장 인형이었던 것이다.

 

1532년(중종 27년) 경빈 박씨가 자신의 아들인 복성군을 위해 세자(인종)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나무패에 걸고 저주문을 썼다가 죽임을 당했다.

 

오죽하면 “허수아비 저주 때문에 처형받는 자들이 많은데도 줄어들지 않는다”(<계곡만필>)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허수아비는 저주물로 쓰인 것이다.

 

공자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무덤에 넣는 자는 후손이 끊어질 것”이라 으름장을 놨다. 이후 공자의 말은 좋지못한 일을 시작할 때 즐겨 인용됐다.

 

허수아비의 일반적인 쓰임새는 농작물을 쪼는 새들을 쫓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한가지 움직일 수 없는 허수아비의 아킬레스건이 있다. 자기 힘으로는 절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쓰는 사람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진다.

 

쓰는 이를 잘 만나면 적군을 무찌르거나, 최소한 새를 쫓는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종자를 잘못 만나면 악인의 지시대로 춤추는 ‘꼭두각시’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2014년 9월 광주 비엔날레에서 홍성담 작가의 그림 ‘세월오월’의 전시가 무산됐다.

 

박근혜 대통령을 김기춘 저 비서실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종을 받는 허수아비로 그렸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윤장현 광주시장은 뒤늦게 “김종 전 문화부 2차관의 ‘작품을 떼라’는 압력전화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이 무렵에 김기춘 전 실장이 홍성담 작가를 ‘사이비 예술가’로 표현하고, 문화예술계의 좌파책동에 대응할 것을 지시한 비망록이 최근 공개됐다. 블랙리스트도 이 즈음 작성됐다. 퍼즐이 착착 맞아간다.

 

그러고보니 홍성담 작가의 풍자 그림은 반 가량은 맞고 반은 틀렸다.

 

대통령이 ‘허수아비였다’는 것은 맞지만, 조종자(최순실)의 이름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 내리라’고 한 것일까. 웃자고 하는 얘기다.

 

한가지 더…. 이제 더이상 ‘허수아비’는 통하지 않는다. 요즘 허수아비에 위장술에 속아 도망가는 참새가 어디 있는가. 시민을 속이려들 수 없는 시대가 됐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