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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지하만리장성과 유엔데이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해오면(若是那豺狼來了),엽총으로 맞이할 것이네(迎接的有獵槍).’

지난 1월19일 백악관. 미국을 방문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 주석을 위한 국빈 만찬이 열렸다. 중국의 천재 피아니스트 랑랑(郞朗·28)의 손끝에서 웅장한 서사시가 연주됐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하지만 이 곡의 정체를 알았다면…. 만찬장 분위기는 싸늘했을 것이다. 1956년 중국에서 개봉된 영화 <상감령(上甘嶺)>의 주제가(‘나의 조국·我的祖國’)였으니 말이다. 

상감령은 강원 철원의 오성산(해발 1062m) 동북방에 이어진 고지군(群)을 일컫는 지명이다. 영화 <상감령>은 59년 전 이맘때인 1952년 10월14일부터 42일간의 싸움에서 중국군이 거둔 승리를 그린 영화이다. ‘나의 조국’ 가사의 ‘승냥이와 이리(豺狼)’는 ‘미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랑랑이 ‘미제’의 심장부인 백악관에서 이 곡을 연주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표정관리’에 나섰다. “랑랑이 ‘피아노 외교’로 미국을 한방 먹였대’ ”라고 속삭이면서…. 중국은 ‘상감령 전투’를 “지원군이 조선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라고 선전한다. 항일투쟁과 국공내전을 막 끝낸 신생국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승전보였다. 

그런데 이 ‘상감령’ 전투의 승패는 ‘지하만리장성’이 갈랐다. 중국군은 1951년 8월부터 기막힌 전법을 펼친다. 임진강 하구부터 강원도 동쪽 끝 간성까지…. 전체길이 250~287㎞(폭 20~30㎞)에 이르는 갱도를 지하에 건설한 것이다. 갱도(9519개)와 엄·채·교통호(3683㎞) 등을 합하면 총연장 4000㎞에 이르는 거대한 단일요새였다.

중국은 ‘지하만리장성’이라 했다. 2층 구조인 지하장성은 식당과 강당, 병원까지 갖추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급할 지하공간을 갖췄다”고 자랑했다. 특히 상감령 일대에는 총연장 8.8㎞에 이르는 갱도를 구축했다. 미국 군사전문가들도 “원자폭탄을 터뜨렸다 해도 점령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유엔군은 이 지하장성 때문에 모든 전선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경기 연천 미산면 동이리에는 유엔군의 시신을 처리한 화장장 터가 남아 있다(사진). 1952년엔 하루가 멀다하고 시신이 밀려들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유엔데이(10월24일)’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 지 오래됐다. 공휴일에서 제외된 탓일까. 유엔군만이 아니다. 이 가을에 아군이든 적군이든 이역만리에서 낙엽처럼 진 젊은 넋을 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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