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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율곡도, 다산도 당한 신입생환영회

 1494년(성종 25년), 금방 도총관(무관·장관급)으로 부임한 변종인이 분을 참지 못한채 임금을 찾았다. 그의 하소연은 기막힐 따름이었다.
 “글쎄 제가 훈련원에 앉아 있는데, 권지(權知) 등이 신에게 ‘허참례를 아직 올리지 않았다’며 예를 올리는커녕 마구 이름을 부르며 욕했습니다. 대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변종인이 누구인가. 참판을 지낸 재상이었다. 게다가 도총관은 정2품인 장관급 무관벼슬이었다. 반면 변종인을 희롱한 ‘권지’는 지금의 시보(試補) 혹은 수습(修習)이었다. 과거급제 후 정식벼슬을 받기 전에 실무를 배우고 있던 수습관원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권지 등이 금방 도총관으로 임명된 변종인을 보고 불러세웠다.
 “이봐! 신래(新來·신참)!”
 이들은 ‘허참례’, 즉 ‘밥 한끼, 술 한 잔’ 사지 않았다며 막 부임한 정2품 도총관의 이름을 부르며 희롱한 것이다. 변종인으로서는 기막힌 일을 당한 것이다.
 변종인의 하소연을 들은 임금도 “재상에게 무슨 버르장머리냐”며 대로했다. 즉각 문제의 수습관원 14명을 불렀다. 

18세기 새내기 정양(鄭暘)의 신고식을 끝내고 선배들이 작성한 면신첩(免新帖). 정양을 ’새로운 귀신(新鬼)이라 부르고, 이름을 거꾸로 해서 ‘양정’이라 했다. /토지박물관 제공

■장관급도 당한 신입생 환영회
 “네 놈들이 과연 그랬느냐.”
 임금의 앞이었지만 권지 등은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며 당당하게 말했다.
 “무과 출신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술과 안주로 회식을 한 뒤에야 선생(先生·정식관원)이라는 명칭을 얻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상관이라도 ‘신래’라 합니다. 이것은 예부터 내려온 관행입니다.”
 그렇지만 임금은 변종인을 욕보인 권지 등 13명을 파직했다.   
 “관행이라도 그렇지. 변종인은 참판을 지낸 지체 높으신 재상이니라. 어디 감히 권지(수습) 따위가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하지만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다. 두고두고 참새들의 입방앗거리가 됐다. “재상한테 너무 했다”는 노장파와, “뭘 그것 갖고 줄줄이 파직시키냐”는 소장파가 쑥덕공론을 일으킨 것이다. 사건 발생 두 달이 지나도 진정되지 않자 사간원 정원(正言·간쟁을 담당한 관원) 이의손이 나선다.
 “변종인을 ‘신래’라 불렀다 하여 13명이 파직되었사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신참과 고참들이 웃음거리가 될만한 일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비록 이들의 행동이 법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훈련원에서 면신례(신고식)를 행한 뒤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은 옛날의 풍속입니다. 그 때문에 파직까지 시키는 것은 심한 처사인줄 아옵니다.”<성종실록>
 임금은 할 수 없이 수습관원 13명을 복직시켜 주었다.

 ■율곡, 다산도 당한 호된 신고식
 훗날 정약용도 자신이 당한 ‘신입생 신고식’의 경험을 혀를 내두르며 생생하게 전한다.
 “절름발이 걸음으로 게를 줍는 시늉을 하고 수리부엉이 울음을 흉내내는 일 따위는 제가 직접 하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해보라고 애를 썼으나 말소리는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고 발걸음은 발에서 떨어지지 않는 걸 어쩌겠습니까.”(판서 권엄에게 보내는 편지)
 율곡 이이는 9번의 과거에서 9번 모두 수석(장원)을 차지함으로써,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란 별명을 얻은 천재였다. 그런 천하의 이이도 괴롭힘의 대상이 됐다. 결국 ’면신례’ 자리에서 선배들에게 공손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재상을 지낸 장관과 다산 장약용, 그리고 9번이나 장원을 차지했던 이율곡까지 욕보인 신고식이었으니….

 ■어느 신입관리의 죽음
 “신래(新來·신입관원)를 침학(侵虐·집단 괴롭힘)하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렸는데…. 그런데도 신래 정윤화(鄭允和)가 침학을 당해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합니다. 처음에 이를 탄핵하려 했으나 풍문공사(風聞工事)일 것 같아 주저했습니다. 이제는 국문해야 합니다.”
 1453년(단종 2년) 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 관직) 유성원이 상소를 올린다. 심상치 않은 사건을 반드시 국문하라는 직소였다. 사연은 이렇다.
 정윤화는 동기생 9명과 함께 과거에 막 급제한 새내기 관원이었다. 그는 정식관원이 되기 전에 일단 승문원에 배속됐다. 문제는 신고식이었다.
 신입생들은 관례에 따라 술과 안주를 잔뜩 준비한 뒤 선배들을 대접해야 했다. 하지만 정윤화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만성적인 종기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선배들의) 희롱과 핍박이 심했다. 본디 종기병이 있던 정윤화는 피곤함이 극에 달해 죽기에 이르렀다.”(<단종실록>)
 선배들은 예외없이 신입생들을 돌렸던 것 같다. 정윤화는 선배들의 강권으로 술을 억지로 마셔야 했고,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지금으로 치면 유야무야 넘어가려던 이 사건은 지금으로 치면 감사원 관원인 유성원의 끈질긴 감찰 때문에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유성원의 탄핵에 따라 이 사건에 연루된 선배관원 3명이 태(笞) 50대를 맞고 파직됐다. 공신의 아들 2명은 파직을 면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1526년(중종 21년) ‘신래’ 조한정이 선배들의 집단구타에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사색이 된 선배들이 급히 그를 떠메고 갔지만 끝내 죽고 말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중종은 “병 때문인지, 선배들의 구타 때문인지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다. 사헌부는 10일 간의 조사결과 “선배들의 괴롭힘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조한정이 만약 병이 있었다면 어떻게 시험을 보고 급제할 수 있었겠습니까. 도가 지나친 집단 구타로 죽은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정윤화나 조한정의 부모심정은 어떠했을까.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급제한 생떼같은 아들을 ‘신입생 환영회’로 허망하게 잃은….  

조선시대 면신례의 모습을 그린 기산 김준근의 풍속도 ‘과거인신례’. 선배들이 막 과거에 급제한 신참(가운데 머리를 숙인 이)에게 ‘삼진삼퇴(三進三退)’를 시키며 괴롭히고 있다. /숭실대박물관 제공

■신입생 환영회, 집단괴롭힘의 역사
 그렇다면 대체 어떤 신고식이었기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지경까지 치달았을까.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는 곧바로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다. 일정기간 수습기간을 거쳐야 했다. 문과급제자는 예문관(역사 담당기관)·성균관(최고교육기관)·교서관(서적간행)·승무원(외교문서 관장)에 배속됐다. 무과급제자는 훈련원(국방 담당) 등에 알단 배속됐다. 배속된 ‘신래’는 ‘허참(許參)·면신례(免新禮)’ 같은 신입생 환영회를 치러야 했다. 허참례는 출사하는 관원이 전입고참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자리를 뜻했다. ‘선·후배 간 인사를 허락하는 예’라 하여 ‘허참례’라 했다. ‘면신례’는 허참례를 끝내고 10여 일이 지난 뒤 치러야 했던 ‘신래(新來·신입생) 신고식‘이었다.
 이 통과의례는 고려 말 우왕 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실력이 아니라, 부모의 권세, 이른바 ‘낙하산’을 타고 벼슬하는 ‘음서(蔭敍)’ 자제들의 기를 꺾고 질서를 잡으려는 선배들의 뜻이 담겨 있었다.
 처음엔 나름 긍정적인 취지가 담겨있던 제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가학’ 혹은 ‘집단괴롭힘‘ 같은 역기능만 남게 됐다. 갈수록 선배 대접을 위한 경제적인 부담도 엄청났다.

 토지박물관이 수집한 이른바 면신첩을 보면 선배들의 집단괴롭힘을 짐작할 수 있다.
 “신귀(新鬼) 양정(暘鄭)은 듣거라! 넌 별 볼일 없는 재주로 외람되게 귀한 벼슬길에 올랐겠다. ~거위, 담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을 즉각 내어와 바쳐라. 선배(先進)들이 쓴다.”
 18세기 면신례를 치르던 선배들이 새내기 관료인 정양(鄭暘)에게 쓴 것이다. 새내기를 ‘신귀’, 즉 ‘새로운 귀신’이라 하고, 이름도 거꾸로 ‘양정’이라 했다. 지금으 기준으로 보면 유치하기 그지없는 장난이지만, 정양 역시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뒤 면신첩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양의 케이스는 약과였다. 

 ■혹독한 신입생 환영회
 1541년(중중 36년) 사헌부는 과거급제자의 이상형을 제시한다.
 “급제하여 출신하는 것은 곧 선비가 벼슬길에 들어가는 처음입니다. 마땅히 예모(禮貌)를 삼가고 기개를 양성하여 임용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중종실록>)
 그러나 곧바로 당대 ‘신입생 환영회의 폐단’을 낱낱이 고한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들을 신래(新來)라 하여 집단으로 괴롭힙니다.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얼굴에 오물을 칠하며, 잔치를 차리도록 독촉하여 먹고 마시기를 거리낌없이 합니다. 조금이라도 뜻이 맞지 않으면 신입의 몸을 학대하는 등 온갖 추태를 벌이고, 아랫사람을 매질하여 그 맷독(楚毒)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뿐이 아니다.
 “겨울철에는 물에 집어넣고, 한더위에 볕을 쐬게 하고….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생명을 잃거나 불치의 병에 걸리는 이도 있으니 폐해가 참혹합니다. ~ 이 모두 ‘신래‘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는 명목아래 자행되는 폐습입니다.”
 급기야 상소는 “오랑캐 풍습에도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탄식한다.
 “당나라와 송나라에서는 신진선비들을 총애했습니다. 좌절시키거나 모욕을 주는 일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오랑캐인 원(元)나라의 미개한 풍속에서도 이같은 행태는 없었습니다.”

 ■“구타 소리가 대궐 안을 진동하고…”
 상소를 읽은 중종은 “백번 옳다”면서 “면신례 등의 폐단을 없애라”고 지시했다. 비단 중종 뿐이던가. 태조 1년(1392년)과 연산군 6년(1500년)도 신고식의 폐단을 누누히 지적했다.
 그러나 임금의 추상 같은 명령에도 악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도리어 하위직까지 신고식이 퍼져갔으며 급기야는 군졸들 사이에서도 만연했다.
 1535년 4월 의정부에서 불이 났는데, 그 원인이 어이없었다.
 “녹사(錄事·서리직)가 신래(신입)을 닥달하여 소를 잡아 삶다가 의정부에 불을 냈습니다.”(<중종실록>) 
 이제는 하급관원까지 신입관원들 괴롭혀 소를 잡게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 때문에 불이 난 것이다.
 고참들이 신입들을 구타하는 소리가 대궐 안에까지 퍼져 임금의 귀에 들린 일도 있었다. <중종실록>을 보면 실소가 절로 나온다.  
 “대궐 내에 들리는 고함 소리를 듣고서 지극히 해괴하여 물었다. 그랬더니 선전관(宣傳官)이 신래(新來)를 묶어서 때린 것이었다.”(<중종실록>) 

1758년 혹독한 신고식을 마친 새내기 관리 정국량(鄭國良)에 게 써 준 면신첩. 정국량을 ‘풀벌레(草蟲)’이라고 부르며 희롱했다. 신참이 면신례를 통과했음을 증명한 인증서이다. /토지박물관 제공

실록에 나온 내막을 보면 실소가 나온다. 즉 선전관 변한정·박지화 등이 신래(신입) 박양준으로부터 술을 얻어먹었다. 한창 주흥이 오를 무렵 부장(部將) 김극달(金克達)이 합류한다. 김극달은 아직 급제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대취한 박지화가 김극달에게 “너도 앞으로 신래가 될 것이니 미리 면신례를 치르라”며 김극달의 발을 거꾸로 매달고 마구 때렸다.
 임금이 전교를 내렸다.
 “서로 술을 마시고 마구 때려 아프다고 외치는 소리가 대궐 안에까지 들리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 우두머리인 변한정 등을 파직하고….”
 신고식에서 나는 비명소리가 임금의 귀에 들렸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런데 더 웃기는 일은…. 술에 흠뻑 취해 급제자도 아닌 김극달에게 “너도 앞으로 신참이 될 것이니 맞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4차원 신입생’ 박이창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이른바 참판 박이창이 ‘자허면신(自許免新)‘한 경험을 전한다. 과거에 급제한 박이창(?~1451년)이 예문관에 배속되면서 혹독한 면신례를 치러야 했다.
 “예문관의 풍속은 신래(신참)가 술과 안주를 내기도 하고, 혹은 여러가지로 괴롭히다가 만 50일만이 되어야 자리에 앉게 허락하였는데, 이것을 면신이라 했다. 그런데 박이창은 행동이 조심스럽지 못해 여러번 선배에게 실수했다. 선배들은 그런 그에게 자리에 앉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허참·면신례와 비슷한 장면이다. 그러나 박이창은 달랐다. 요즘으로 치면 ‘4차원 신입’이었던 것이다. 화가 난 박이창은 선배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선배들이 “뭐 이런 친구가 다 있냐”며 눈총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도리어 옆에 앉은 선배들을 투명인간 대하듯 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박이창을 두고 ‘스스로 허락한 면신례’라 하여 ‘자허면신’이라 했다.
 당대 선배들의 입장에서는 박이창을 ‘개념없는 신인류’라고 취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이창은 선배들의 집단괴롭힘을 ‘배 째고 등 따고 소금 뿌려라’는 식으로 싸워 승리를 쟁취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가학적인 신고식의 행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통과의례일 뿐이며, 옛 풍습이자 관행이라는 이유로….
 <중종실록>의 기사처럼 “폐단을 없애라는 명령만 있을 뿐 신래(신입)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중종실록>)인가. 분명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이같은 미개한 풍속은 없으며, 매우 수치스런 일”(<중종실록>)이라는 것이다.
 경향신문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