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치(한나라 여태후)와 무조(무측천·측천무후) 같은 이에 이르러 어리고 나약한 임금을 만나 조정에 임하여 천자처럼 행하였다.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운 게 하늘의 이치다.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 어찌 늙은 할멈이 안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선덕여왕조>를 쓴 뒤 맨 끝에 이런 평론을 달았다. 전형적인 남존여비 사상을 풀어놓은 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한 것이다. 김부식은 한 술 더 뜬다.
선덕여왕을 두고 “<서경>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빈계지신·牝鷄之晨)’고 했다.”고 표현하면서…. 요즘 같으면 큰일 날 ‘막말’을 역사서에 버젓이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암탉’ 이야기는 정말 지긋지긋하다. 기원전 1046년, 주나라 무왕이 은(상) 주왕을 치러 갈 때도 “옛말에 암탉이 새벽에 울었기 때문에 은나라를 정벌하러 나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여기서 말하는 ‘암탉’은 은나라 주왕의 애첩 달기(달己)를 일컫는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이 훌쩍 지난 이야기인데, 그 때도 ‘옛말’이라고 했으니…. 대체 언제 적부터 나온 이야기였을까.
또 있다. <구당서>의 저자 윤후(劉구) 역시 690년 무측천이 여황제에 오른 것을 두고 “암탉이 새벽을 알린 것”이라 비유했다. ‘빈계지신’의 고사는 이처럼 뿌리깊다.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다음은?”
기원 전 195년이었다. 항우와의 천하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한나라 제국을 세운 고조(유방)이 병석에 눕는다. 부인인 여후(여태후)가 죽음을 앞둔 남편과 대화를 나눈다.
“폐하께서 돌아가시고 100년 후에는 누구에게 상국(相國·국무총리)의 직분을 맡기면 좋겠나이까.”(여후)
“조참이면 좋을 것이요.”(한고조)
“그렇다면 그 다음엔요?”(여후)
“글쎄요. 왕릉? 진평? 단독으로는 안되오. 고지식한 왕릉을 진평이 돕도록 하면 좋을 것이요.”(한고조)
“그러면 그 다음은요?”(여후)
“….”
한 고조(유방)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뜸을 들인 뒤 대꾸했다.
“그 다음까지? 그 다음은 당신이 알 바가 아니요.”
이 역사기록은 여후(呂后)의 끊없는 안방정치의 욕심을 드러낸 대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얼마나 오래 정치를 농단하려고 100년 뒤, 아니 그것도 모자라 그 다음, 그 다음을 논하는 것인가. 그것도 죽음을 앞둔 남편이자 황제 곁에서….
■만고의 영웅 한신을 옭아맨 여인
사실 여후는 ‘새벽에 울기만 하는 암탉’이 아니었다. 한나라 창업의 일등공신인 한신을 유인하는 계책을 써 그의 목을 베고 삼족을 멸한 여걸이었다.
고조보다 더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던 한신은 죽어가면서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내 아녀자(여후)에게 속았구나.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랴.(乃爲兒女子所詐 豈非天哉)”
한신은 “‘토사구팽(兎死狗烹)’, 즉 토끼를 잡은 뒤에는 사냥개가 삶아먹히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라는 유명한 고사를 남겼다. 물론 한고조는 한신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었다.
하지만 창업 이후, 한신처럼 빼어난 인물은 걸림돌일 뿐이었다. 이 때 여후가 덫을 놓아 한나라를 위협할 수 있는 한신을 도모한 것이다. 이밖에도 여후는 역시 창업공신인 경포와 팽월의 제거에도 간여했다. 사마천은 여후를 이렇게 중간평가했다.
“여후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굳세어 일찍이 고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했다. 대신들을 주살할 때도 여후의 힘이 컸다.”(<사기>‘여태후 본기’)
■연적(戀敵)을 사람돼지로 만들다
남편 고조가 죽자 여후의 아들인 효혜제(재위 기원전 195~188년)가 등극했다. 아들 대신 정권을 틀어쥔 여후의 야심은 노골화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편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척부인과 그의 아들 여의(如意)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여후에게 척부인은 눈엣가시였다. 고조는 천하를 통일한 뒤 조강지처를 팽개치고 척부인만을 끼고 돌았다. 척부인은 밤낮으로 고조 앞에서 소리내어 울면서 “제 아들 여의를 태자로 세워달라”고 애원했다. 만약 대신들의 목숨을 건 간쟁이 없었던들 태자는 교체됐을 것이다. 남편의 사랑을 잃은 여후는 조마조마한 과정을 겪으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마침내 정권을 잡은 여후는 척부인과 그의 아들 여의를 무참하게 죽였다. 여의에게는 독주를 먹였다. 다음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돼지우리에서 살도록 했다. 그러면서 ‘사람돼지(人체)’로 불렀다. 여후는 마음씨 착한 황제 효혜제를 불러 ‘사람돼지’를 보도록 했다. 효혜제는 그 목불인견의 참상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전 태후(여후)의 아들로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사기> ‘여태후 본기’)
그 후 1년 간이나 병석에 누운 효혜제는 주색에 빠져 다시는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효혜제는 시름시름 앓다가 재위 7년만에 죽었다. 여후는 이후 여씨 일족을 제후로 봉하고, 황제를 수시로 갈아치웠다.
한나라는 기원전 180년, 여후가 죽을 때까지 15년동안 ‘여후의 나라’였다. 여후가 죽자 여씨 일족은 모두 주살됐다. 고조의 넷째아들인 대왕 유항(劉恒)이 황제에 오른다. ‘여후의 나라’는 다시 ‘유씨의 나라’로 바뀐다.
■그러나 만백성은 편안했다
여후는 극악무도한 악녀라는 평을 들을만 하다.
질투심에 불탄 나머지 남편의 사랑을 앗아간 척부인을 ‘사람돼지’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르고, 황제를 멋대로 세웠으며, 외척을 끌어들여 전횡을 일삼았으니까…. 하지만 당대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의 평가는 흥미롭기만 하다. 우선 여후의 이야기를 ‘여태후 본기’로 처리하는 ‘파격’을 보여준다. ‘본기’는 황제의 사적을 기록한 역사서이다. 사마천은 정식으로 등극하지 않고 태후에 머문 여태후에게 ‘황제의 예’를 갖춘 것이다. 또 하나 ‘여후의 악행’을 아주 드라이하게 팩트만 전달해놓고는 맨 뒤 사론(史論)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효혜황제와 고후(여태후)이 시절, 백성들은 전국시대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혜제는 팔짱을 끼고 아무 일도 안했으며, 고후는 여성으로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하여 모든 정치가 안방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천하는 태평하고 안락했다.”(‘여태후본기’)
사마천의 호평은 계속된다.
“형벌을 가하는 일도, 죄인도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삿일에 힘쓰니 의식은 나날이 풍족해졌다.”
■“두 계집의 뼈가 취(醉)할 때까지 담가놓아라”
그로부터 800여 년이 지난 서기 637년, 14살의 어린 소녀가 당나라 궁중에 들어간다. 무씨 소녀였다.
소녀는 빼어난 외모 덕분에 태종의 부름을 받아 ‘재인(才人)’으로 책봉됐다. 얼마나 예뻤는지 직접 표현은 없지만 그녀의 딸인 태평공주가 ‘네모 반듯한 이마와 넓은 턱은 꼭 어머니를 빼닮았다’는 기록이 있다. 요즘 기준으로는 그리 미인 소리를 듣지는 못했을 외모였겠지만, 당대 미인의 기준이 어땠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소녀는 태종의 여인으로 불려 들어갔지만, 태자인 이치(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급기야 남편(고종)이 등극하자 정상을 향한 그녀의 집념은 무시무시했다. 우선 자신이 낳은 핏덩이 딸의 목을 졸라 죽이고, 그 죄를 황후 왕씨에게 뒤집어 씌었다.(654년) 황후가 되기 위해 딸마저 희생시킨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씨는 황후가 됐다. 고종의 사랑을 얻으려 다툼을 벌였던 전(前) 왕후 왕씨와 소 숙비는 여태후 시절의 척부인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고종이 폐서인이 되어 유폐된 왕황후와 소숙비를 동정한 게 화근이었다.
“무씨는 별원에 구금된 왕씨와 소씨에게 곤장 100대씩 때렸다. 또 손발을 자르고 묶어 술독에 넣고는 ‘두 계집의 뼈까지 취(醉)하도록 내버려 두어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이 죽자 시신을 참하도록 했다.”(<자치통감>)
마치 800여 년 전 척부인을 ‘사람돼지’로 만들어 처참하게 죽인 여태후를 보는 것 같다. 무측천은 이어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는다.(656년)
“황제가 집무를 볼 때마다 황후는 드리워진 발 뒤에서 크고 작은 모든 정사를 들었다. 천하의 대권이 모두 중궁전(무측천)에 귀속되면서 관직의 승진과 강등, 생사여탈이 그녀의 말 한마디로 결정됐다. 천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외에서 그들을 이성(二聖)이라 했다.”(<자치통감>)
■딸의 목을 조르고, 아들까지 독살했다?
급기야 660년 남편 고종이 병이 들자 무측천이 전면에 나서 정사를 돌보기 시작한다. 이것은 아내를 국정의 동반자로 여긴 남편의 뜻이기도 했다.
“현기증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눈이 보이지 않아 고통스럽구나. 앞으로 관리들은 모든 결제를 황제 대신 황후에게 올려라.”(<당회요>)
무측천은 소름끼치도록 비정했다. 먼저 675년 태자 이홍이 죽었는데, 일부 역사서(<신당서>)는 “천후(무측천)가 태자를 독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딸에 이어 아들까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병약한 고종이 죽자(683년) 역시 무측천의 자식이자 고종의 7번째 아들인 중종이 즉위한다.
하지만 중종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황제였다. 황위에 오르자 마자 처음 한 일이 자신의 장인인 위현정에게 시중자리를, 유모의 아들에게 5품의 고위 관직을 각각 제수하는 것이었다. 대신들이 반대하자 중종은 “난 장인에게 천하도 내줄 수 있는데 시중 자리가 대수냐”고 소리친다. 황제의 자격이 없는 발언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무측천은 중종을 강제 폐위시키다.(684년) 몰려간 대신들은 무측천의 폐위조서를 낭독한 뒤 중종을 강제로 끌어내린다. 중종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무측천은 단칼에 잘라버린다.
“네가 그랬지않느냐. ‘천하를 위현정에게 내준다’고….”
■천하가 벌벌 떨었다
또 있다. 그 해 서경업의 난을 진압한 뒤 재상 배염과 대장 정무정 등을 주살한 뒤 대신들을 질타한다.
“(죽은) 서경업이나 배염, 정대정 등 세 사람은 군신들 가운데 가장 명망이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이롭지 않았기에 모두 죽였다. 너희 가운데 이 세사람을 능가할 자 있는가. 있으면 반란을 일으켜라. 그것도 아니면 마음을 고쳐먹고 짐을 받들던가!”
두려움에 벌벌 떤 대신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채 한 목소리로 충성을 맹세했다.
“폐하만이 신하들을 부릴 수 있사옵니다.”
무측천은 내준신, 주홍 등 혹리(酷吏)를 기용, 형용할 수 없는 갖가지 고문으로 고관대작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거꾸로 매달거나 목에 무거운 돌을 달거나, 콧구멍에 식초를 붓거나 철띠를 목에 둘러 옥죄는 등 고문방법도 다양했다. “비밀감옥에서 칼·몽둥이가 난무하고 모진 고문을 자행, 없는 죄도 자백”(<자치통감>)했으며, “고관대작들이 목이 잘린채 도륙당해 길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렸다.(<문원영화>)
종실 및 원로대신들은 조정에 출근하면서 가족들에게 “다시 만날까 모르겠다”고 두려워했다.
■“제 성기가 큽니다. 폐하”
모든 걸림돌을 하나하나 제거한 무측천은 690년, 67살의 나이로 스스로 황위에 오른다. 그러면서 국호를 주나라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대주(大周)라 칭한다. 중국대륙을 통치한 240여 명의 황제 가운데 유일한 여황제가 된 것이다. 여태후는 ‘황제대우’를 받았지만 황제는 아니었으니까….
무측천은 일흔살이 넘어서도 늙지 않았다고 한다. 기묘한 화장술 덕분이었다. ‘남총(男寵)’, 즉 신체건강한 미남자들을 성의 노리개로 삼았다. 설회의, 장창종, 장역지 등이 공식적인 무측천의 ‘남총’이었다. ‘일과 남자’ 없이는 단 한순간도 견딜 수 없다고 한다. 많은 미소년들을 선발해서 봉신부(奉宸府)에 두었다는데, 봉신부는 무측천의 환락을 위한 일종의 고급클럽이었다.
우보궐 주경측의 간언을 보면 무측천의 남성편력을 짐작할 수 있다.
“폐하께서는 장역지와 장창종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최근엔 우감문위장사 후상 등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신의 성기가 크다고 자랑하며 폐하를 받들고자 했답니다. 간언을 올리는 것이 신하의 직분이겠기에….”
신하가 여황제의 사랑을 받으려 ‘큰 성기’를 자랑한 것이니 얼마나 망측스러운 일인가.
■극과 극의 평가
무측천은 28년을 황후로, 6년을 태후로, 15년간을 여황제로 살았다. 이렇게 49년간 중국 대륙을 통치한 무측천은 8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705년)
여황제가 세운 나라, 대주(大周)도 다시 당나라로 회귀한다. 폐위됐던 중종이 다시 이씨의 나라로 복원시킨 것이다. 후대의 역사가들, 특히 성리학 시대의 학자들은 “혹리를 임용하여 종실과 고관대작을 주살한 화가 끔찍했다”고 악평했다.(<통감강목(通鑑綱目)>)
심지어는 무측천의 9가지 죄상을 열거하면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가장 흉악한 사람”이라는 평도 나왔다.(<강감합편(綱鑒合編)>, <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筆叢)>)
하지만 과연 그럴까. 긍정적인 평론도 만만치 않다. 그녀가 납간(納諫·간언을 받아들임)을 잘했고 사람의 됨됨이를 잘 본 것은 칭찬하는 이들이 많았다. 명나라 사상가 이지(李贄)는 “무측천이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은 모두 현인군자였다”고 호평했다.
“무측천에게 적의를 품은 사람도 ‘황후는 총명했으며 조정 안에서 시정을 보필했는데, 그 공이 대단했다’고 인정했다”(<당회요>)
그랬다. 무측천이 혹리를 동원해서 무자비한 숙청을 가했다지만 그 대상은 종실과 고관대작들이었다. 백성들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무측천은 “짐이 선제를 30년 넘게 보좌하면서 천하를 근심하며 애썼다”고 말했다. 그 말 그대로였다. 무측천의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천하를 근심하면서 애쓴’ 여황제
우선 무측천은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참신한 인재를 발굴했다. 선발과목을 조절한 뒤 해마다 과거시험을 치렀다. 685~688년 사이에는 해마다 5만 여 명이 지원하는 등 성황을 이뤘다. 688년 낙양과 장안 두 곳에서 실시된 과거에서 30명을 뽑았다. 과거를 통해 적인걸·요숭·송경·소량사 등 당나라 전성기를 이끈 재상들이 줄줄이 배출됐다.
이것도 모자라 모든 백성들이 스스로를 천거할 수 있다는 조서를 발표했다. 언로를 넓히려고 조당에 설치한 동문고와 폐석(肺石·형조의 섬돌 아래 설치한 붉은 돌)을 지키는 파수꾼을 없앴다. 동문고의 북을 치거나, 폐석 옆에 서서 억울한 사연을 아뢰어야 하는데, 백성들이 파수꾼 때문에 불편함을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모자라 동궤(청동궤짝) 4개를 만들어 만백성의 상소를 받았다.
또한 무측천 시기에 당나라의 경제는 괄목상대했고, 국고가 가득찼다. 652년 380만 가구였던 인구가 무측천 말기인 705년에는 615만 가구(3713만명)로 급증했다. 국력 또한 강성해졌다. 무측천 시기에 당나라 영토는 태평상대였다는 태종의 ‘정관지치(貞觀之治·627~649)’ 시대보다 더 넓었다. 이 뿐이 아니었다. 695년, 무측천은 “3000여 가지의 죄목을 없애라”는 조서를 내린다.
“함부로 나라의 형벌을 사용하지 마라. 마음을 다해 신중하게 벌을 내리라. 형에 처하지 않는 무위의 교화가 이뤄지도록 하라.”
■남황제는 수천명의 궁녀를 두었는데…
무측천은 여태후가 끝내 실패했던 ‘외척등용’을 삼갔다. 무측천 시대에 재상을 지낸 외척은 무승사·무유녕·무삼사 등 3명에 불과했는데, 이들 역시 무측천의 견제로 힘을 쓰지 못했다.
그랬으니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은 “태후는 상벌을 평행하면서 천하를 다스렸기 때문에 유능한 인재가 잘 쓰였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무측천을 위한 변명 한가지만…. 무측천의 남자들인 장영지·장창종 형제는 연지 바른 화장한 얼굴에 화려한 옷차림으로 여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그렇다면 이 여황제는 음탕한 군주인가.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중국의 황제는 원래 3궁6원7비를 둘 수 있었다. 그리고 궁 안에는 1000~2000명의 후궁을 거느렸다. 그런만큼 천하를 호령하게 된 여황제가 ‘남총’ 몇 명을 두었다고 욕을 먹을 수 있을까.
무측천 시대에 여성들의 지위도 높아졌다. 아버지 생전에 어머니가 상을 당해도 똑같이 3년상을 치르도록 했다. 또한 부녀자 외출 때 멱리(冪罹·여인들이 외출 때 썼던 쓰개) 대신 휘장 달린 모자를 써도 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부녀자들에게 승마와 활쏘기, 남장 공차기 등을 허용했다. 그야말로 대단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사상자
무측천이 죽은 지 꼭 1269년 지난 1974년, 중국의 여러 매체들이 흥미로운 기사를 쏟아낸다. ‘황제 대우’인 여태후와 명실상부한 ‘여황제’ 무측천을 다룬 기사들이었다.
여태후는 ‘뚜렷한 목적으로 남편의 유지를 계승한 인물’로 칭송됐다. 측천무후는 <자치통감>의 평론대로 ‘삶과 죽음, 상과 벌, 이 모든 것을 결정한, 남편 고조와 함께 이성(二聖)으로 일컬어진 인물’로 평가됐다. 이 즈음에 <자치통감>의 기록대로 ‘이성(二聖)’으로 표현될만큼 성인 대접을 받은 여인이 있었다. 무측천처럼…. 바로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 장칭(江靑)이었다.
<인민일보>는 경극개혁 10주년을 기념하는 기사에서 장칭을 ‘마오쩌둥 사상의 해석자’로 표현했다. 이것은 류사오치(유소기)와 린뱌오(임표) 등 마오 주석의 후계자들에게 붙이는 어마어마한 호칭이었다.
요양차 중국 남부의 산중에 머물던 마오 주석이 “경거망동 하지 마라”는 경고를 수없이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이는 무측천의 국정운영을 공식허가한 당나라 고종과는 사뭇 달랐다.
장칭은 황제의 조서와 같은 ‘지시(指示)’를 내려보냈고, 국가지도자 신분으로 키프로스 대통령, 토고 대통령, 모리타니아 대통령 등을 접견했다.
이 일련의 상황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현대 중국의 황제지만 병석에 누운 마오쩌둥의 후계자는 바로 ‘황후’인 장칭이라는 것이었다. 한고조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와 당 고종의 부인인 무측천처럼….
장칭은 때때로 아랫사람에게 말했다고 한다.
“여자도 황제가 될 수 있어. 영국이 중국처럼 봉건적이지 않은 이유는 여왕의 통치를 받기 때문이야.”
■“30년간 정치판엔 얼씬도 마라”
장칭…. 그녀는 현대판 여태후, 아니 무측천을 꿈꿨던 여걸이었다.
상하이에서 유명한 배우로 활약했던 장칭은 1937년 공산당 지도부가 있던 옌안(延安)에 도착한다.
이미 2번의 결혼경력이 있던 24살 여인은 그곳에서 45살의 지도자 마오쩌둥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마오에게는 4번째 부인인 허쯔전(賀子珍)이 있었다. 당시 공산당 지도부의 아내들은 그 힘겨운 장정(長征)의 과정을 뚫고 옌안까지 온 혁명여전사들이었다. 그랬으니 멋을 부릴 줄 몰랐다. 허쯔전도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은 상하이에서 금방 도착한 젊고, 매혹적인 장칭에게 빠졌다. 본부인인 허쯔전은 마오가 어린 여배우와 사귄다는 소문을 듣고 칼을 들고 달려와 난리를 피웠다. 결국 정신병 증세에 시달린 허쯔전은 옌안을 떠났다. 그러자 옌안에서는 마오쩌둥을 두고 “혁명가 아내를 버리고 형편없는 여배우와 잠자리를 가진 섹스중독자”라는 비난이 터져나왔다.
류사오치(劉少奇),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당 지도자들도 둘의 결혼을 반대했다. 산시(陝西省)의 공립학교 학생들은 집단수업거부에 돌입했다.
마침내 마오쩌둥·장칭의 결혼문제를 다루는 당대회가 열렸다. 마오는 “결혼을 승인해주지 않으면 장칭과 고향으로 돌아가 농부가 되겠다”고 버텼다. 장칭도 “이미 난 마오주석과 살고 있다”고 호소했다.
결국 당대회는 숙고 끝에 타협안을 내놨다.
“장칭은 앞으로 모든 힘을 마오쩌둥을 내조하는데 힘써야 한다. 향후 30년간 어떤 정치활동도 해서는 안된다.”
참으로 무서운 조건이었다. 장칭이 혁명전사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인 역할’을 불허한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주역이 된 ‘황후’
이 조건 때문인지, 장칭은 오랫동안 마오쩌둥의 아내로 살았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로 일선에서 물러난 뒤 아내 장칭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류사오치·덩샤오핑 등과 권력을 분점한 마오쩌둥은 장칭을 최측근 그룹으로 삼아 세력을 규합한다. 장칭은 경극(京劇)을 이념투쟁과 권력상승의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같은 산둥(山東) 출신인 장춘차오(張春橋)와 야오원위안(姚文元) 같은 신흥 지식인들을 등용한다.
1965년 11월10일, 상하이의 <문회보>에 희한한 연극비평이 실렸다. 1961년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이 쓴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비판한 것이다. 줄거리는 명나라 시대 관헌인 해서가 황제를 비판하다가 파면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1959년 마오쩌둥은 황제를 비판한 해서를 칭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6년 뒤에는 정치적 문제로 비화됐다. 1959년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가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운동 실패를 비판했다가 실각한 사건을 비유했다고 몰아붙인 것이다.
훗날 중국공산당은 <해서파관> 비평글이 <문회보>에 실린 경위를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즉 마오쩌둥이 <해서파관>을 비판하라고 요청했고, 아내인 장칭이 ‘직접 지도’ 했으며, 장칭의 심복인 장춘차오가 협조한 속에 야오원위안이 글을 썼다는 것이다. 장칭은 남편과 손잡고 이렇게 중국대륙을 10년간 암흑기로 몰아넣은 문화대혁명의 주역이 됐다.
장칭은 어린 홍위병들을 향해 <마오쩌둥 어록>을 흔들며 광란의 폭동을 부추겼다. 홍위병들은 그런 장칭을 보고는 “장여사님 우린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외쳤다.
■“왕광메이를 타도하라!”
“왕광메이(王光美)를 끌고와 자신의 죄를 자백하도록 해야 합니다.”
1966년 말, 장칭은 군중집회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왕광메이는 덩샤오핑과 함께 ‘주자파(走資派)의 수괴’이며 ‘중국의 흐루시초프’로 낙인 찍힌 류사오치의 부인이었다.
장칭의 외침에 따라 여성홍위병 3명이 왕광메이를 붙잡았다. 그녀에게 강제로 비단드레스를 입히고 하이힐을 신긴 뒤 챙 넓은 밀짚모자를 씌었다.
비단드레스는 너무 작았다. 홍위병들은 옆구리 양쪽을 뜯어내 왕광메이의 허릿살이 삐져나오도록 했다. 하이라이트가 남아있었다. 탁구공으로 만든 진주목걸이를 왕광메이의 목에 걸었다. 그런 뒤 칭화대(淸華大) 야외집회무대로 끌고와 하루종일 모욕을 주었다. 왕광메이는 또 한차례 장칭의 딸 리나(李納)가 주도한 집회에 끌려갔다.
그녀는 2시간동안 악명높은 ‘제트비행기’ 형벌을 당했다. 두 팔을 뒤로 잡아 젖히고 머리를 아래로 처박는…. 홍위병들은 그 처참한 광경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왕광메이는 왜 이런 험한 꼴을 당했을까.
1963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국가주석인 남편 류사오치와 서남아시아를 방문할 예정이었던 왕광메이가 장칭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문기간 중 어떤 옷과 장신구를 걸칠지 코디 좀 해달라는 전화였다. 이 때 장칭은 ‘검은색의 단순한 벨벳 드레스’를 권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장신구는 하지 않는게 좋겠어요.”
하지만 왕광메이는 장칭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여러 벌의 의상을 준비했다. 또 버마 방문길에 네윈 버마 대통령이 진주목걸이를 선물하자 이것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주최한 연회에 걸고 나타났다. 장칭은 그 모습을 텔레비젼을 통해 지켜보았다. 이후 멀어진 마오쩌둥과 류사오치 관계만큼이나 장칭과 왕광메이의 관계 역시 차갑게 식어갔다.
그런 가운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장칭이 통쾌한 복수극을 연출한 것이다. 장칭은 양광메이에게 ‘미국 스파이, 일본스파이. 국민당 스파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씌었다. 이 죄목이라면 처형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형량선고문건의 비망기에 사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도하유인(刀下留人)’. 이것은 칼 아래 사람을 살려두라는 뜻이었다. 참수형의 주관자나 집행자에게 이 말을 긴급하게 전해 형집행을 급히 면하게 한 것을 뜻한다. 이로써 목숨을 간신히 건진 왕광메이는 12년형을 받았다. 여태후에 의해 ‘사람돼지’가 된 척부인이나, 측천무후에 의해 ‘팔다리가 잘려 뼈 속까지 취하며 죽은’ 왕황후와 소숙비의 비참한 운명은 피한 것이다.
■여태후, 무측천이 되지 못한 까닭
하지만 장칭은 결코 여태후나 무측천이 될 수 없었다.
우선 죽어가는 황제(마오쩌둥)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황제는 황후(장칭)의 전횡을 우려하면서 ‘4인방을 결성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황제는 또한 정치국 전원회의 석상에서 ‘음모적 방법과 극좌적 견해’를 거론하면서 아내를 직접 비판했다. 근본적인 한계는 중국은 더 이상 왕조시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저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인 마오쩌둥의 부인이었을 뿐이다.
마오 주석의 뒤를 이을 사람들은 마오씨나 장씨가 아니라 덩샤오핑 같은 혁명지도자였다. 아무리 장칭이 “중국에는 덩샤오핑이라는 국제자본주의 첩자가 있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없었다. 어찌보면 공산혁명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던 그녀에게는 어차피 설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더 핵심이 있다. 여태후나 측천무후가 가졌던 미덕을 그녀는 갖지 못했다. 바로 ‘민심’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랬으니 4인방 재판을 받으며 백성의 마음을 얻지못한 스스로를 탓하지 않고 마오쩌둥에게만 탓을 돌렸다.
“내가 한 모든 일은 마오쩌둥이 시킨 것이다. 난 마오쩌둥의 개였다. 그가 물라면 물었다.”
<참고자료>
러스 테릴, <장칭 정치적 마녀의 초상>, 양현수 옮김, 교양인, 2013
조문윤·왕쌍희, <무측천평전>, 책과함께, 2004
에드가 스노우, <중국의 붉은 별>, 신홍범 역, 두레신서, 1995
우지앙 외 , <측천무후(중화제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 권용호 역, 학고방, 2011
사마천, <사기본기>, 정범진 외 옮김, 까치, 1994
경향신문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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