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발해 온돌이고, 요 밑에는 옥저 온돌이고….”
지난 2007년 7월 22일, 연해주 체르냐치노 마을 유적을 발굴 중이던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깜짝 놀랐다. 같은 주거지에서 1m 깊이를 두고 발해(698~926)와 옥저시대(기원전 3~기원후 3세기)의 온돌(쪽구들)이 차례로 발굴된 것이다. 4일 뒤인 26일 필자는 경향신문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기획팀 일원으로 이곳을 찾았다가 이 흥미진진한 유구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주거지 1기의 바닥에서 옥저 온돌이 발견됐고, 바로 그 1m 위에 발해 온돌이 차례로 확인됐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이 마을은 옥저시대 사람들의 터전이었다는 것. 그러다 옥저가 사라진 지 400년 뒤에 이 마을엔 발해 사람들이 둥지를 틀었다는 것. 발해인들은 옥저 사람들이 썼던 것과 같은 ㄱ자 모양의 온돌(쪽구들)을 얹고 불을 땠던 것이다.
■옥저-발해-고려인 마을
필자는 정 교수로부터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옥저-발해 마을 안에서 70여 년 전까지 살았던 한인들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이 마을에서 1937년 스탈린의 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떠나야 했던 고려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남부여대(南負女戴)하면서 이곳에 정착했던 고려인들의 주거지와 온돌이 보였다는 겁니다. 담뱃대와 비녀 같은 유물들도 보였습니다.”
이곳은 고려인 집단촌이 있었던 시넬리코프 마을과 가깝고, 라즈돌라야 강(솔빈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 터다. 이곳은 화산인 백두산과는 300㎞ 정도 떨어진 곳이다. 지금도 마을 주변에는 백두산 화산폭발의 증거인 현무암이 즐비하고, 이 현무암을 주춧돌로 삼아 지은 발해시대 절터와 성터가 남아있다.
“옥저인, 발해인, 고려인 모두 농업을 주업을 삼은 민족이니까…. 농사에 적합한 땅을 찾는 눈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을 겁니다.”
기원전 3세기부터 불과 70여 년 전까지…. 체르냐치노 마을은 옥저·발해·고려인의 한(恨) 많은 2300년 역사가 ‘고고학적’으로 농축된 지점이다. 끊길듯 끈질기게 이어진 역사의 맥이 엿보이는….
■내몰린 백제 고구려 유민들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와 왕자 및 대신과 장사 88명, 백성 1만2807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삼국사기> ‘백제본기’)
660년, 백제 의자왕이 나·당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그러자 당나라는 의자왕과 태·왕자 및 대신과 백성 등 1만3000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구당서> ‘본기’는 “소정방이 의자왕 등을 낙양성 앞에서 황제(당 고종)에게 바쳤고, 고종은 의자왕의 죄를 꾸짖고 사면시켰다”고 기록했다. 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국왕은 그렇다 치지만 나머지 1만3000명의 죄없는 백성까지 강제이주된 것이다.
백제 뿐인가. 고구려 멸망(668년) 뒤 부흥운동이 거세지자 벌어지자 당나라는 고구려 백성들을 대거 오지로 내쫓는다.
“669년 4월,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인 3만8200호를 강(江·양쯔강), 회(淮·화이허)의 남쪽지방과 산남(山南)·경서(京西) 등의 광할한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자치통감>)
3만8200호의 이주라? 1호가 5명으로 구성됐다면 무려 20만명에 이르는 민족대이동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구려 부흥운동은 갈수록 심해졌다. 당나라는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을 랴오둥(요동·遼東) 도독이라는 직함과 함께 조선왕이라는 작위를 주어 파견한다.(677년 3월) 고구려 유민들을 다독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역효과를 낳았다. 보장왕이 랴오둥에 도착하자 마자 몰래 말갈과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보장왕을 불러들어 공주로 이주시켰다. 고구려 유민 가운데 일부는 하남·농우의 여러 주로 분산시켰다. 유민들 가운데 일부 무리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들어가 살았다.”(<자치통감>)
보장왕이 유배당한 ‘공주’는 요즘의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에서도 서남쪽으로 50여㎞ 떨어진 오지이다. 나머지 백성들은 랴오둥·랴오시(遼西)에서 수 천㎞ 떨어진 서쪽으로, 남쪽으로 강제분산 이주시켰다.고구려 부흥운동을 막기 위한 의도였던 것이다.
■60만 발해인의 민족대이동 ‘발해의 멸망 이후’는 또 어땠는가.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략으로 속절없이 멸망한다. 발해를 멸한 요(거란)의 첫번째 조치는 발해의 고토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운다. 한편으로는 대량의 발해인들을 네이멍구(內蒙古)의 스라무룬허(西喇木倫河)와 라오하허(老哈河) 유역, 즉 거란인들의 본거지와 랴오시(遼西)로 강제이주시켰다. 2년 뒤인 928년 요 태종 아율덕왕은 동단국을 랴오양(요양·遼陽)으로 천도한다. 요나라 역사서인 <요사>는 “발해땅이 오지여서 통치하기 힘들었다”고 이
유를 밝혔다. <요사>는 발해멸망 직후와 동단국의 천도 이후 강제이주 당한 발해인은 9만4000여 호에 이른다고 기록했다. 1호당 가족수가 5명이라면 47만~50만명이 고향땅을 떠나 강제이주를 당했다는 뜻이다. 이밖에도 발해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 등 고려로 망명한 발해 유민들도 10만명으로 집계된다, 결국 발해멸망으로 유민 60만명이 고향을 떠났다는 얘기다.
흥미로운 것은 거란이 발해인을 강제 이주시킨 뒤 많은 마을(현)을 폐쇄했다는 것이다. 이를 ‘폐현(廢縣)’이라 한다. <요사>를 보면 거란이 폐쇄시킨 마을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 유역과 동해안의 읍락 및 연해주 지역이다. 사상 유래 없는 엑소더스이자, 민족대이동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고려인'이라 부른 까닭은
17세기초 여진의 후예인 만주족이 청나라를 건국, 대륙을 석권했다. 만주족은 중원으로 이동하면서 연해주를 선조의 발상지라면서 신성시, 금단의 땅으로 만들었다. 이른바 ‘봉금령(封禁令)’을 내린 것이다. 이 땅의 새로운 지배자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58년 아이훈(愛琿) 조약으로 흑룡강 이북(아무르)을 점령하고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확보했다.
이 무렵, 경지가 좁고 지배층의 수탈로 살기 어려워진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연해주 고려인의 역사기록인 <아령실기(俄嶺實記)>는 1864년 봄 함경도 무산 출신인 최운보와 경흥출신 양응범 등 두사람이 몰래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현재의 비노그라드노예)에 와서 개간한 것을 연해주 이주의 효시라 전한다. 이후 조선인들은 앞다퉈 두만강을 건넜다.
연해주 등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했다. 러시아의 탐험가 N.M 프르제발스키가 1867~1869년 연해주를 방문하고 남긴 여행기(<우수리 지방 여행>)는 “조선인들은 스스로를 가우리(Kauli)로 불렀다”고 기록했다.
“조선사람들이 연해주가 고구려의 땅이라는 점을 과시하려고 스스로 고려인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대단히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김호준씨)
■망국 이후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10년 한일합병으로 국권을 잃자 연해주에도 엄청난 충격파가 전해진다.
고려인들은 ‘망국의 한’을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한다.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는 러시아 영내에 거주하는 조선인도 이제 일본제국의 ‘신민’이라고 주장하면서 러시아를 압박한다.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원하던 러시아 차르 정부는 1910년 가을 이범윤·유인석·이상설 등 42명의 항일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한다. 그 중 항일운동의 수괴로 지목된 이범윤 등 8명은 이르쿠츠크로 유배 보낸다.
‘나라잃은 백성’의 설움을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고려인들을 황인종이자, 일제의 앞잡이로 여겨 배척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1905년 연흑룡지방 총독으로 부임한 운테르베르게르는 황인종이 세계를 위협한다는 이른바 ‘황화론(黃禍論)’의 신봉자였다. 그는 러시아 내 고려인은 일본세력이 침투할 수 있는 근거가 될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러시아와 융화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가 중국이나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치를 경우 고려인의 충성심을 기대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김호준 씨)
■일본의 앞잡이 대우 받은 고려인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연해주를 비롯한 원동지역의 고려인 수는 급증했다. 1932년엔 19만 6000명에 이르렀다. 일제의 토지수탈로 먹고 살 길을 잃은 농민들이 물밀듯 밀려온 것이다. 안내인의 인도에 따라 여권과 비자 없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다가 검거되는 조선인이 매주 300명에 달할 정도였다. ‘탈조선 유민’들의 끊임없는 행렬이었던 것이다.
소련 정부는 그런 유민들을 위험분자로 여겼다. 급기야 1937년 3월3일, 스탈린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소련은 자본주의 적들에게 포위돼 있으며 소련 내에는 외국의 스파이가 가득하다”고 지적한다.
이어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심상찮은 기사를 잇달아 쏟아낸다. ‘일본의 간첩망’(3월16일), ‘소비에트 원동에서의 이국 스파이 행위’(4월23일)’…. 즉 일본이 밀파한 조선·중국 스파이들이 소련의 군대집결, 해군이동, 철도운행 등의 정보를 수집,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보도였다.
이것은 고려인 강제이주의 신호탄이었다. 급기야 8월 21일 소련 인민위원회와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원동지방 국경 부근 구역에서 고려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대하여’라는 결의안(1급 비밀)을 채택했다. 목적은 분명했다. “원동지방에서 일본 첩자의 침투를 차단하려는 것”이라 했다. 고려인 사회를 일본첩자의 온상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격리시키자는 의미였다. 결의안은 ‘작업은 즉시 착수하여, 38년 1월1일까지 완료’한다는 것이었다. 또 ‘고려인들 사이에서 발생 가능한 폭력과 무질서를 제압할 수 있는 조치들을 강구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간첩죄로 처형된 지도급 인사들
우선 고려인 출신 지도급 인사들을 대거 숙청했다. 1935~37년 사이 2500여 명의 고려인이 구속됐다. 이들은 날조된 약식재판을 통해 ‘반역죄’의 낙인이 찍혀 거의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일본 정찰부의 간첩이며 관동군 참모부의 지령을 받아 소련에 반대하는 폭동을 준비했다”는 죄목이었다. 예컨대 ‘조선의 레닌’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김 아파나시의 재판은 1938년5월25일 밤 10시15분에 시작되어 15분만에 끝났다. 그는 그날 밤 처형됐다. 혐의는 ‘일본의 밀정으로 반혁명활동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망명, 고려문학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처음 도입한 작가 조명희도 이듬해 5월 처형됐다. 취조도 재판도 없었다. 이렇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소련정부는 일사천리로 강제 이주를 진행됐다.
고려인들은 강제이주 1주일 전에 이주를 통보받았다. 2~3일전에 급작스럽게 통보받는 일도 있었다. 부동산은 그냥 두고 가야했다. 1개월 여행에 필요한 식량과 옷가지, 이부자리 만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단 1명의 이탈자도 허용하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은 퇴원시켜 열차에 태웠고, 어느 여인은 남편이 출장간 사이 혼자 열차에 타야 했다. 각 기관에 근무하거나 군복무중인 이는 해임되거나 강제제대된 뒤 이주열차에 올랐다. 국경지역 지휘관은 퇴역 후 ‘간첩’의 죄명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비극의 1937년 9월9일 밤
1937년 9월9일 밤, 그렇게 ‘강제수집’된 이주민을 태운 열차가 블라디보스특을 떠났다. 열차는 객차, 화물차, 가축운반차 등을 엮어 50량으로 편성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차를 4칸으로 나눈 화물차에 짐짝처럼 실렸다. 화물차엔 유리창 하나 없었다. 널판지로 막은 문만 있었다. 외부에서는 대체 무슨 열차인지 몰랐다. 고려인의 이주는 그렇게 비밀로 위장됐다.
저녁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면 기차 안은 꽁꽁 얼어붙었다. 수송열차는 한번 달리면 며칠동안 서지 않았다. 그러다 한 곳에 2~3시간이나 2~3일 정차할 때는 가족들이 객차마다 뒤엉켜 이산가족이 다수 생겼다.
출산소동이 벌어지고, 식량약탈과 겁탈이 자행되고…. 심지어는 ‘배신자’를 처단하는 인민재판이 열리고…. 동승한 비밀경찰에 의해 불순분자로 체포된 이들 가운데 10여 명은 행방불명됐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수송 도중 전염병이 발생해 많은 이들이 사망하는 일도 일어났다. 주인없는 시신은 밤에 열차밖으로 던져졌다. 열차가 서면 이름 모를 철길 근처에 시신을 서둘러 묻고는 오열하는 가족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18만명에 달하는 고려인이 1937년 11월까지 추방됐다. 곡(哭)소리가 시베리아 하늘을 뒤덮었다.
■1935~38년생이 사라진 까닭
고려인들이 장장 6000㎞를 달려 짐을 푼 것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반사막지대와 갈대밭 지역이었다.
원주민들이 살다가 버린 흙집 몇 채와 무덤 밖에 없었고, 모기 떼와 벌레 떼만 우굴거리는 황량한 지대…. 갈대숲이 울창한, 그래서 밤에는 진창이 얼어붙어 뼛속까지 바람이 들었고…. 갈대가 울고, 이리떼가 울던 그곳…. 그곳에 토굴을 짓고, 흙벽돌에 구들을 놓거나 갈대로 두툼한 자리를 만들어 바닥으로 삼았다.
모기에 물려 학질에 걸리고, 사막의 독거미와 독사에 시달리고…. 어린이들은 늪의 물을 마시고 피똥을 싸다가 죽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쓰레기통을 뒤져 버려진 감자껍질을 씹어 먹는 일도 있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가운데 1935~1938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 아주 드문 이유가 설명되는 셈입니다. 38년 1월에는 타슈겐트 주의 세 지역에서 300명의 어린이가 홍역에 걸려 80명이 사망한 일도 있었답니다. 그렇게 3년을 지내니 마을엔 어린아이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네요.”(김호준씨)
고려인들의 차별대우는 더욱 극심해졌다. 국경지역으로 이주가 금지됐고, 정착지의 고려인수는 농가 1000가구 이하로 제한됐다. 전쟁에는 나가지도 못했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등 대도시 대학에서는 공부할 권리도 없었다. 공업대와 군사·항공계통 대학에서는 입학원서도 받지 않았다. 고려어(조선어)는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됐다. 그런 가운데 고려인 지식인들을 겨냥한 탄압과 처형은 계속됐다.
단적인 예로 12년간 소련의 해군장교로 근무한 최성학은 1938년 10월 일본스파이로 몰려 총살됐다. 누가 봐도 소련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두번이나 체포되는 등 ‘표적수사’의 희생양이 되어 끝내 처형된 것이다.
■나라를 잃으면
필자는 이쯤해서 옥저와 발해, 그리고 19세기 고려인의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연해주 체르냐치노 마을 유적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 발해 등 멸망한 나라의 불쌍한 백성들이 수만~수십만명씩 강제이주 당했음을 알려주는 역사서를 들춰본다. 그러나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면서 남부여대로 정든 고향땅을 떠나야 했던,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죽어갔을 뭇 백성들의 이야기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다.
“~너를 두고 떠나느냐?~북두는 말없이 지평선을 떨어지며/마음은 너를 찾아 달음박질/아, 아직도 동녘은 껌껌나라/어서 동이 트고 날이 밝아야 우리는….”
1838년 시인 강태수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사범대 벽보신문에 발표한 시 ‘밭갈던 아씨에게’의 내용이다. 강태수는 ‘연해주’를 그리워하며 시를 지었다는 이유로 소련 당국에 의해 체포됐다. 그후 21년동안 북극 원시림에서 감옥살이와 연금생활을 했단다. 하지만 ‘망국의 한’ 많은 백성이 되어 쫓겨가야 했던 이들의 심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을 것이다. 백제인이나 고구려인이나 발해인이나….
그것이 이 순간 누군가 나서 지금의 역사를 기록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렇게 쫓겨간 백성들의 삶은 어땠을까.
“등굽자 아매들은 삭다 고레 아매들이오. 느르 이르 마이 해서 등이 고부러졌소.”
강제이주한 카자흐스탄 농촌의 고려인 할머니들이 일을 많이 해서 모두 허리가 굽었다는 이야기다. 김호준씨가 현지답사에서 들었던 이 말 또한 시공을 관통하는 뼈아픈 한마디로 남는다. 나라를 잃으면 이렇게 백성들만 골병들고. 죽어갈 뿐이라는 것을….
<참고자료>
김호준,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 주류성, 2013
지배선, <고구려·백제 유민이야기>, 혜안, 2006
이효형, <발해유민사 연구>, 혜안. 2007
노중국, <백제부흥운동 이야기>, 주류성, 2005
|경향신문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 경향 편집국장
'흔적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정승 배출한 성균관 1582학번 (1) | 2013.03.19 |
---|---|
김부식의 '막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0) | 2013.02.13 |
박정희의 XXX 따러 왔시요. (0) | 2013.01.16 |
치욕의 병자호란 속 '귀중한 1'승 (2) | 2012.11.14 |
고구려의 청야전술 vs 미군의 교살작전 (0) | 2012.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