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나라 군사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성 주위에 해자(垓子·도랑)를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판의 곡식을 비워 대비하면(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그들은 반드시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굶주려서 돌아갈 것입니다. 그 틈에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서기 172년 11월, 고구려 신대왕이 비상대책위원회를 연다. 막강한 한나라가 많은 군사를 이끌고 처들어온 것이다. 그 때 국상 명림답부가 주장한 전법이 바로 ‘청야(淸野)전술’이었다. 과연 그 말이 맞았다.
맞대응을 피하고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자 한나라 군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려 철수하기 시작했다.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마병을 이끌고 철수하는 적군을 좌원(坐原)에서 맹공했다. 전의를 상실한 한나라군은 대패했다. <삼국사기>는 “한나라는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漢軍大敗 匹馬不反)”고 기록했다.
고구려 양원왕 3년에 개축한 백암성. 고조선과 고구려의 석성들은 모두 높은 지대에 의지하여 지었기 때문에 철옹성을 방불케 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좌원대첩과 청야전술의 원조
사가들은 이 전쟁을 일컬어 ‘좌원대첩’이라 했다. 그런데 사실 ‘청야전술’의 개념을 처음 쓴 것은 고조선이었다. 기원전 323년, 천자국인 주나라가 쇠퇴한 틈을 타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진다. 중원의 제후국인 제·조·위·중산국이 저마다 왕을 칭한 것이다. 주나라를 더이상 천자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조선도 ‘왕’의 대열에 합류한다.
“주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연나라가 왕을 칭하고 동쪽 땅을 다스리려 하자 조선후(朝鮮侯)도 왕을 칭했다. 그런 뒤 병사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왕실을 지키려 했다.”(<삼국지> ‘위서·동이전’)
무슨 말이냐. 연나라가 왕을 칭한 뒤 조선의 땅을 넘보자 조선 역시 왕을 칭한 뒤 “주나라 왕실을 지킨다”는 구실로 연나라 타도를 외쳤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이 얼마나 강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은 우거왕(?~기원전 108) 대에 절정의 국세를 과시한다. 한나라 백성들이 대거 조선으로 귀화했다. 우거왕은 한나라 조정에 입조도 하지 않았다. 요즘의 속된 말로 한나라 황제와 맞장을 뜨겠다는 것이었다. 우거왕은 진번의 많은 나라들이 한나라와 직접 교섭하는 것까지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이는 한반도 남부의 여러나라가 한나라와 직접 교역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했다는 뜻이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는 조선정벌의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우거왕은 왕검성의 험난한 지세에 의지하는 수성전으로 한나라군과 대항했다.
“한나라의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이 성을 포위했으나 우거왕이 성을 굳게 지켜 몇 달이 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한나라는 해를 넘기도록(기원전 108)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다 조선 조정의 내분 덕분에 겨우 멸망시켰다. 기원전 108년 여름이었다. 승리한 한나라의 후유증도 컸다. 섭하와 누선, 순체, 공손수 등 한나라의 내로라하는 장수들이 죄를 얻어 줄줄이 극형을 당했거나 평민이 됐다.
“특히 순체와 공손수는 공을 다투다가 죽임을 당했다. 두 장군의 군대는 모두 곤욕을 당했으며, 장수 가운데 후(侯)에 봉해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사기> ‘조선열전’)
조선이 한나라 군을 1년 가까이 괴롭힌 작전이 바로 들판을 비어두고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채 장기전을 벌인 바로 ‘청야의 전술’이었다. 이 전술의 전통이 고구려로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청야전술의 요체는 바로 보급로 차단이다. 고조선이나 고구려가 중원의 강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선전을 펼친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대군을 맞받아쳐서는 승리할 수 없는 것. 길 수밖에 없는 보급로를 끊고 전쟁을 질질 끈다면 상대는 굶주림과 추위, 혹은 홍수 등에 녹아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중원을 떠나 랴오허(遼河)와 요택을 지나야 하는 원정길이었으므로 보급로는 길 수밖에 없었다.
■수나라 113만 대군의 오산
598년 6월, 수나라 문제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 영양왕이 요서를 참략하자 대대적인 보복작전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수문제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퇴했다. 출정 도중에 홍수를 만나 보급로가 끊어졌던 것이다. 군사들은 식량이 떨어져 굶주렸으며, 전염병에 시달렸다. 또 수군마저 평양성으로 쳐들어 오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가라앉거나 표류했다. 수나라군은 3개월동안 전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채 9월 퇴각했다. 30만 대군 중 열에 여덟, 아홉이 죽었다.
수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도 고구려 정복의 야욕을 불태웠다. 양제는 무려 113만3800명의 정벌군을 동원했다. 612년 양제가 출정 했을 때 유질(庾質)과 단문진(段文振)이 잇달아 신신당부한다.
“간악한 저들의 항복작전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또한 정예군으로 저들(고구려)을 신속하게 공격하면 분명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원정의 핵심은 신속한 행동입니다. 지체하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양제는 이들의 충고를 무시했다. 113만 대군은 하루에 1군씩 40리 간격으로 떠났다. 113만 대군이 완전히 출병하는 데만 무려 40일이 걸렸다. 선두에서 후미까지의 거리가 960리나 됐고, 황제의 어영만 해도 80리였다. 하지만 유질과 단문진의 충고가 옳았다. 고구려는 역시 청야의 전술을 썼다. 민·관·군이 성문을 굳게 닫고 버티는 작전이었다.
4월부터 시작된 요동성 전투는 6월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다른 여러 성들도 성문을 굳게 잠그고 버텼다. 그러는 사이 내호아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군의 계책에 말려 참패했다.
위기감을 느낀 수나라군은 압록강 서쪽 지역에 집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 병사와 군마가 각자 100일동안 먹을 식량과 무기, 갑옷, 전투장비, 천막 등을 한꺼번에 지급받았다. 1인당 3섬(石) 이상의 무게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수나라 장수들은 “식량을 버리면 참수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하지만 무게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군사들은 막사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렸다. 수나라 군은 행군 도중에 식량이 바닥나고 말았다.
고구려는 을지문덕 장군을 수군진영에 보냈다. 거짓항복을 통보하면서 수군의 사기를 점검한 것이다. 을지문덕 장군은 굶주린 수나라 군인들의 모습을 목도했다. 그러면서 7번 싸움에서 모두 패주하는 척 하며 수나라군을 끌어들였다. 수나라 군이 살수(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30리 떨어진 곳까지 진출했다. 을지문덕 장군은 “만약 수나라가 군대를 철수시키면 고구려왕을 모시고 황제(양제)의 행재소(머무는 곳)에 가서 알현할 것”이라고 권했다. 수나라군에게 철수할 명분을 준 것이다. 수나라군이 철군을 개시했다. 하지만 고구려군은 사기가 떨어진 수나라군을 뒤쫒아 살수에서 궤멸시켰다. 그것이 440년전 명림답부가 말했던, 굶주려 철수하는 적을 뒤쫓아 치명타를 가하는 청야전술의 백미였다. 살수를 건넌 30만5000명의 대군 가운데 돌아간 병력은 불과 2700여 명이었다.
■“요동의 길은 멀고 험합니다”
그로부터 꼭 33년이 지난 645년 당 태종도 ‘타도! 고구려’를 외친다.
“온 천하가 평정됐는데, 오직 이 지역만이 아직 평정되지 못했구나. 짐이 늙지 않았을 때에~ 취하려는 것이다.”
물론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저수량(저遂良)과 수나라 시절 양제를 따라 고구려를 원정한 경험이 있는 정원숙(鄭元璹)이 극구 만류했다.
“만일 단 시일 내에 승리를 거둔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차질이 생기면 위엄과 덕망이 떨어집니다. 그러면 국가의 안위를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요동은 길이 멀고 식량을 수송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또 고구려는 성을 잘 수비하니 공격하더라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태종은 “지금은 수나라 때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과연 당 태종은 수 양제와 달랐다. 요동성과 백암성, 개모성 등을 잇달아 함락시켰다. 그러나 안시성은 호락호락한 성이 아니었다.
“내가 듣기로 안시성은 지형이 험하고 군사들도 정예군이다. 그 성주도 지혜와 용기를 갖춘 인물이라서….”(당태종)
안시성 사람들이 호위한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교묘한 심리전을 폈다. 당태종의 깃발과 일산(日傘·햇빛을 가리는 큰 양산)이 보일 때마다 큰 북을 치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그 소리를 들은 태종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내, 내, 저 놈의 성을 차지하면 저 성안의 남자 놈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릴 것이야!”
그 소식을 들은 안시성 사람들은 더욱 더 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견고하게 지켰다. 심리전의 개가했다. 당나라군은 군·관·민이 합심해서 지킨 안시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전쟁이 장기전의 양상으로 흐르자 당나라군은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요동의 겨울이 빨리 찾아온 것이다.
“황제는 요동이 일찍 추워져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양식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 태종은 결국 철군을 결정했다. ~안시성의 성주는 성 위에 올라서서 태종에게 절을 하고 송별의 뜻을 전했다. 태종도 성을 잘 지킨 성주를 치하하고 비단 100필을 하사했다.”(<삼국사기> ‘보장왕조’)
이처럼 한과 수, 그리고 당나라가 고조선·고구려에 고전했거나 대패한 원인은 한가지였다. 청야작전에 번번이 말려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홍수나 혹한을 맞은 게 치명타였던 것이다.
이렇듯 ‘보급’은 전쟁의 승패를 가른 핵심요소였다.
■군복도 못입고 치른 전투
다시 1306년이 지난 1951년 6월.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의 수는 77만명에 이르렀다.
1950년 10월 첫 참전했을 때 30만명이 투입됐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급증한 것이었다. 이 숫자는 1300여 년 전 고구려를 침공한 수·당나라군과 필적할만한 대대적인 원정이었다. 이렇게 대군을 파병한 중국의 고민은 예전의 한·수·당나라와 어쩌면 그렇게 똑같았는지 모른다. 보급물자의 원활한 공급이었다. 특히 제공권을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에게 장악당했으니 더욱 골머리를 앓았다.
“물자 소모량은 엄청난데 운송수단은 기차나 자동차 뿐이었다. 제공권이 없으므로 수송과정에서 미군기 폭격으로 손실규모는 30~40%에 이르렀다. 탄약은 주요 거점에만 공급됐고, 특히 4~5차 전역(중국군의 1951년 춘계공세) 때는 수요량의 50% 정도만 만족시켰다.”
중국 군사과학원이 펴낸 <중국군의 한국전쟁사(3)>는 당시의 어려웠던 보급상황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한반도는 폭이 좁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북으로 길고 좁은 지형이라 중국 내 전장에서처럼 광범위한 기동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
한반도의 지형상 후방에 게릴라를 투입하기도 어렵고, 측방에서 해상작전을 펼치기도 힘든 상황임을 복기한 것이다. 이것이 휴전회담과 제한적인 (고지)전투를 병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고 중국은 실토하고 있다. 1951년 4월, 군복을 가득 실은 80여량의 화물열차가 폭격당하는 바람에 5차 전역에 참전한 1개군 병력이 군복도 입지 못한채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
■목조르기, 즉 교살작전의 위력
1951년 8월, 유엔군은 또 하나의 새로운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교살작전(Strangle)’이었다. 말 그대로 ‘목졸라 죽이기’. 즉 공산측 보급로의 목을 ‘졸라’ 숨통을 끊는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연합군 공군이 한반도와 지형이 비슷한 이탈리아 아펜니노 반도에서 사용해서 큰 효과를 보았던 대규모 공중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한반도에 적용한 것이다.
북한의 동서·남북 철도와 도로가 모이는 청천강 이남과 평양이북 지역이 주 공격타깃이었다. 이 지역은 마치 삼각형처럼 보인다 해서 ‘삼각지대’라 했다. 8월18일부터 90일 예정으로 시작된 ‘교살작전’은 가뜩이나 보급로 확보에 애로를 느꼈던 공산측을 곤혹스럽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무렵 한반도는 40년 만의 홍수로 큰 난리를 겪고 있었다. 상당수의 철도와 도로가 이미 파괴된 상태에 놓여있었다.
미공군의 전사는 이것을 두고 “하늘이 폭격기 사령부를 도왔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9월에는 연 3027대의 전·폭격기가 출격, 철도 648곳, 교량 57개를 파괴시켰고, 10월에는 4128대가 출격, 철도 1336곳과 교량 53개를 무력화시켰다. 51년 8월18일부터 12월까지 신안주·개천·서포 등의 삼각지구에 투하된 폭탄수는 6만3515개(무게 3만1755t)에 이르렀다.
이는 도로길이 1㎞ 당 평균 532개, 170t의 폭탄이 투하된 꼴이다. 그 기간동안 약 80%의 시간동안 차량이 통과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공산측의 보급난은 심각한 수준이 됐다. 8월말·9월초 공산측 전방부대는 식량두절현상이 발생했다. 일부 부대는 들판의 야체로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솜옷은 도착할 기미가 없었다. 당시 인민지원군(중국군) 총사령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가 녜룽전(섭榮臻) 인민해방군 참모총장대리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아침저녁으로 가을바람이 차갑습니다. 병사들은 홑겹의 옷만 입고 있습니다. 환자가 늘고 있습니다. 적군 항공기의 폭격으로 교량이 끊겨 도로가 붕괴됐고, 물자도, 식량도 바닥났습니다. 겨울옷의 보급이 제대로 될까 병사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보급로를 복구하라”
1400~1500년 전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못하던 수·당나라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때문에 공산측은 ‘보급선의 복구’에 전쟁의 명운을 걸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을 중심으로 저우언라이(周恩來)부주석이 위기에 빠진 공산측의 보급전쟁을 통괄하는 등 총력을 기울였다. 중국군 전사는 그들의 ‘영웅적인 복구작업’을 기술하는데 상당부분을 할당하고 있다.
“특히 유엔 공군기가 투하한 시한폭탄과, 포탄 속에 수백개의 소형폭탄을 장착, 나비처러 날아다니다가 지면에 닿으면 폭발하는 이른바 ‘나비폭탄’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폭 60~100m의 대형그물로 나비사냥에 나섰다. 시한폭탄은 물에 빠뜨려 시계톱니바퀴를 꺼버렸다.”
“미군은 500파운드에서 1톤에 이르는 중형폭탄을 요소요소에 터뜨려 깊이 8미터, 지름 1미터의 구덩이를 만들었다. 흙이나 돌로 메우기는 무척 힘들었다. 마치 부교를 설치하듯 포탄구덩이에 통나무를 박아 두 줄로 세운 뒤 통나무 말뚝 위에 아치형 다리를 건설했다. 공습이 끝나 구덩이가 생기면 복구반이 미리 준비해놓은 통나무와 다리판으로 잽싸게 복구했다.”
“‘22시 작전’이라는 게 있었다. 미군의 전·폭격기 공격이 22시~24시 사이에 집중된다는 사실을 알고 22시 이전에 최대한 공습지역을 벗어나자는 작전이었다. 예컨대 1952년 6월 하순엔 4일간 야음을 틈타 화물기관차 36대 506량을 이동시키는 등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유격역’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공습을 피해 수시로 옮기면서 물자를 내리는 이동식 간이역의 이름을 ‘유격역’이라 했다. 열차역(驛)까지 유격전의 일환으로 활용한 것이다.
악천후도 이용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52년 1월, 하얀 눈이 들판을 뒤덮을 때 트럭에 하얀 천을 덮었다. 완벽한 위장술이었다. 그런데 미군전투기가 득달같이 달려와 한바탕 폭탄세례를 퍼붓고 돌아갔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나중에 보니 차량의 위장에만 신경을 쓰고, 트럭의 바퀴자국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 후부터 공산군 트럭운전병들은 행렬의 맨 뒤 트럭 꽁무니에 큰 나뭇가지를 달아 트럭들이 남긴 바퀴자국을 쓸어 없앴다.
중국이 가장 자랑스러운 전쟁영웅으로 기록한 이는 중국 공군 4사단 12연대 3대대장인 장지후이(張積惠)였다. 그는 1952년 2월10일 호위기 조종사 단즈위(單子玉)의 호위를 받으면서 미군 전투기 2대를 격추시켰다. 그런데 그 중 한 대가 미공군이 자랑하던 조지 A 데이비스 소령의 전투기였다. 데이비스는 260여 차례를 출격해(3000시간), 무려 21대의 적기를 격추시킨 미공군의 영웅이었다. 그런 그를 격추시켰으니 중국 대륙이 격동했던 것이다. 미국의 웨이랜드 미극동공군의 웨이랜드 장군은 “극동공군에게 큰 탸격이며 아주 비통한 손실”이라 토로했다.
미국은 ‘교살작전’에 이어 1952년 3월3일부터 24시간 내내 특정 철로를 집중공격하는 이른바 ‘십자포화(Saturate)작전’을 펼쳤다. 미군은 하루평균 300회 출격에 6000개의 폭탄을 신안주와 순천의 철교와 철도중심지에 집중 투하했다. 1951년 8월18일부터 52년 6월30일까지 지속된 철도차단전, 즉 ‘교살작전’과 ‘십자포화 작전’에 총 8만7552회 출격에 1만 9000곳의 철도를 파괴시켰고, 3만4211대의 차량과 276량의 기관차, 3820량의 화차를 폭격했다.
■살수, 즉 청천강은 한반도의 인후, 즉 목구멍
하지만 공산군의 보급선을 끊어 정전협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는 미군의 ‘목조르기’와 ‘십자포화’ 작전은 절반의 실패, 절반의 성공으로 마무리됐다. 중국측의 자료를 보자.
“1951년 9월~1952년 6월까지 철도는 19886곳(길이 700㎞)과 교량 연 1929곳(길이 51,7㎞)이 파괴됐다. 하지만 지원군(중국군) 철도병단과 인민군(북한군) 철도부대의 응급복구로 선로 연 2만24곳(길이 878㎞)아 교량 2086곳(길이 79.7㎞)가 복구됐다. 지원군 643명이 복구작업중 사망했다.”(중국군의 한국전쟁사)
이같은 중국 측의 자랑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미공군은 “중국의 복구부대가 포탄구멍을 복구하는 속도는 F86전투기가 폭격하는 속도와 필적할만 했다”고 혀를 내둘렀다. 예컨대 1952년 3월25~26일 사이 470여 대의 전투ㆍ전폭기와 B-26 8대가 동원되어 파괴시킨 정주~신안주간 철로는 단 6일 만에 복구됐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폭파된 철도가 24시간 만에 복구된 모습이 항공촬영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우리측 전사인 <한국전쟁(하)>를 보자.
“폭파철도는 불과 24시간도 못돼 복구됐다. 공산측은 7700여명의 기술자를 보유한 3개 철도조직을 주야로 동원했고, 북한은 정규병력 3개여단을 포함, 50만명을 상시로 철도에 배치했다. 이에 따라 전방부대는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필수적인 보급품은 수령했다. 동계피복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은 “적의 보급량을 제한하고 보급속도를 지연함으로써 적 공격의 빈도와 규모를 줄이는데는 성공했지만 전쟁 그 자체를 종결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수단은 될 수 없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미 공군도 이렇게 총괄평가를 내렸다.
“매일 평균 300회씩, 연 8만7000여 번이나 출격했지만 공산군은 여전히 보급을 진행했다. 전방부대에 여전히 보급품 집하장을 건설했다.~ 공산군의 화력은 전에 비해 아주 강해졌다.”
그렇다면 미군의 보급선 차단작전은 완전실패로 끝난 것인가. 물론 중국측은 “타격해도 파괴할 수 없고 폭격해도 끊을 수 없는 강철 운송선(보급선)을 구축했다”고 자화자찬했다.
마오쩌둥 주석은 1952년 8월 “이제 저방의 각 사단은 모두 3월분의 식량을 비축하게 됐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정한 성과도 있었다고 유엔군측은 평가한다.
“보급선 차단작전을 펼치지 않았다면 적은 많은 철도역을 시변리나 평강 북쪽에 건설하여 몇 배에 달하는 포탄을 우리(유엔측) 머리 위로 퍼부었을 지 모른다. 차단작전은 적의 보급을 멈출 수는 없어도 전투능력을 약화시킨 주요인이 된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보급전쟁에서의 무승부 탓일까. 1127일간이나 접전을 벌인 한국전쟁은 승패없이 마무리 되었으니 말이다. 또 하나, 1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살수, 즉 청천강은 피아간 인후(咽喉), 즉 목구멍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그곳에서 생사를 건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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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연구(3)>, 1999
해방군화보사, <그들이 본 한국전쟁1>, 눈빛출판사, 2005
이기환, <분단의 섬 민통선>, 책문, 2009
|경향신문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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