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조)이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를 행했다.”
1637년 1월30일은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치욕적인 날이다. 말이 ‘조아린다’는 것이지 사실은 머리를 찧어 피가 밸 정도로 용서를 비는 절차였다. 이나마 다행이었을까. 청나라는 사실 항복의 예를 갖출 때, 삼배구고두보다 더 지독한 의식을 요구했던 것 같다. 즉 인조가 두 손을 묶고, 구슬을 입에 문채 빈 관을 싣고 나가 항복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옛날 진나라 3세황제가 된 자영(子영)이 노끈을 목에 걸고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타고 유방(한 고조)에게 항복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죽여든 살리든 알아서 해달라는 무조건 항복의 의미였다. 하지만 청 태종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은 것 같다. 항복일을 이틀 남긴 28일 청 장군 용골대가 청황제의 친서를 전한다.
“몸을 결박하고 관(棺)을 끌고 나오는 등의 허다한 절목(節目)은 지금 모두 없애겠소.”
■개에게 고기를 던져준 까닭은
인조는 입고 있던 용포(龍袍)를 벗고 청의(靑衣)로 갈아 입었다. 그런 뒤 백마를 타고 남한산성의 정문이 아닌 서문으로 나와 무릎을 끓었다.
다 뜻이 있었다. ‘청의’는 신분이 낮은 사람을 뜻한다. 5호16국의 하나인 한나라 황제에 오른 유총(劉聰·?~318)이 진(晋) 회제(287~313)에게 청의를 입히고 술잔을 돌리게 했다는 ‘청의행주(靑衣行酒)’의 고사에서 유래됐다.
그러니까 신하인 주제에 임금을 상징하는 용포를 입을 수 없었고, 죄를 지은 주제에 정문으로 나올 수 없다는 청나라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백마는 진나라 자영이 그랬듯 항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항복의식을 벌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어졌다. 인조가 술잔을 돌린 뒤 술상을 물리려 했는데, 청나라 종호(從胡) 두 사람이 두 마리의 개를 끌고 들어왔다. 그러자 청태종은 상에 차려진 고기를 베어 개에게 던져 주었다. 마치 항복한 조선(개)에게 은전(고기)을 베푸는, 그런 꼴 같았다.
의식이 끝나고 소파진을 통해 한강을 건널 때, 진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거의 죽고 배 두 척만 남았다. 인조 임금이 배를 타려 하자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인조 임금의 어의를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위기에 빠지자 임금이고 뭐고 그저 저만 살겠다고 나선 한심한 신하들이었던 것이다. 사로잡힌 백성들은 임금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보고는 울부짖었다.
“우리 임금님, 우리 임금님, 어찌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吾君 吾君 捨我以去乎)”
그야말로 목불인견이다. 병자호란은 이토록 기억하기 싫은 오욕의 역사로 남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랑캐의 나라로 폄훼했던 청나라에게 두 번이나 참패하고 ‘아우의 예’(정묘호란)에서 ‘신하의 예’(병자호란)로 항복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백전대첩을 아는가 모르는가?
최근 철원에서 흥미로운 학술대회가 열렸다. 제1회 병자호란 김화 백전대첩 학술대회였다. 그런데 주제가 ‘철원 김화 백전전투를 아는가’ 였다. ‘고상한’ 학술대회의 주제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사뭇 도전적인 제목이었다. 왠지 반드시 알아야 할 주제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으니 답답하다는 뜻이 담긴 제목이었다. 학술대회를 개최한 이재 국방문화재연구원장에게 그 연유를 물어봤다.
“별로 자랑할 게 없는 수모의 역사로 알려졌지만, 그 가운데 그나마 자랑할만한 승리의 역사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우리 역사에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대첩, 행주대첩 등 자랑스런 승첩의 역사가 있다. 그러나 일패도지(一敗塗地)한, 그래서 자랑할게 전혀 없을 것 같은 병자호란의 와중에서도 그나마 기억할만한 승첩의 예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재 원장이 말한 김화 백전대첩이다. 자세한 내막을 보자.
정묘호란(1627년)의 참화가 가시기도 전인 1636년(병자년) 12월8일 청나라 13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넌다.
당시 조선의 방어전략은 고조선·고구려의 전통을 잇는 청야술이었다. 군사력이 부족했던 조선으로서는 병력과 주민들을 보호하면서 적군의 보급로를 도모하는 산성 위주의 전술이 효과적이라고 본 것이다. 이 산성전술은 정묘호란 때 약간의 효과를 보았다. 당시 후금이 평안도의 산성을 공략하느라 어느 정도 애를 먹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청나라의 팔기군(八旗軍)은 러시아와의 국경분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정도로 최강의 기마군이었다. 청군은 속전속결 전략을 폈다. 6000명의 선봉부대는 곧바로 한양을 직공했다. 대신 일부 병력들은 조선병력을 산성에 묶어두는 전략을 폈다. 대로변에서 30~40리 떨어진 산성은 청군의 한양직공 전략에 속수무책이었다.
청의 선봉은 압록강 도하 불과 6일 만에 한양 도성에 근접했다. 서울~신의주 간 거리가 500㎞ 쯤 되니까 하루 80㎞ 이상씩 말을 달려온 것이다. 이윽고 12월29일 청나라 본진이 남한산성에 도착,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인조는 할 수 없이 전국 8도에 근왕병을 요청했다. 즉 화급한 지경에 빠진 임금을 지키는 병력을 급히 모집한 것이다.
■문신과 무신의 알력
평안감사인 홍명구(1596~1637)와 평안병사인 유림(1581~1643)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홍명구와 유림은 조정의 방침에 따라 자모산성(홍명구)과 안주성(유림)에서 청나라 병사들을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청군이 산성을 피해 한양직공을 선택했기 때문에 싸울 기회도 없었다, 홍명구군 2000명과 유림군 3000명 등 5000명의 근왕군이 평양에 집결했다. 평안감사, 그러니까 지금의 평안도지사격인 홍명구는 42살의 문신 출신이었다. 반면 57살의 유림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무신이었다.
그러니 둘 사이의 의견이 맞을 리 없었다.
“남한산성이 포위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유림을 재촉해 떠났는데, 유림이 머뭇거리고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홍명구가 대의를 들어 꾸짖고는 스스로 부대를 거느리고 강동에 이르렀다. 유림이 그제서야 뒤따라와서는 홍명구에게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이때 홍명구가 검을 뽑아 땅을 치면서 ‘임금이 위급한데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하는가?’ 했다.”(김상헌의 <청음집>)
“유림이 또 외진 길을 좇아갈 것을 청하며 적의 예봉을 맞닥뜨리지 않으려 하므로 공은 그 머뭇거림을 꾸짖고 목을 베려다 우선 용서해 주었는데….”(남구만의 <약천집>)
두 사람의 성향은 이처럼 판이했다. 문신인 홍명구는 국왕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에 ‘남한산성으로 무조건 전진!’을 외쳤다. 반면 유림은 군을 경거망동 이동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신중하라!”고 외쳤다. 그런데 홍명구 감사가 15살이나 위인 유림 병사의 목을 군령으로 베려다 용서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둘의 반목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홍명구의 대의명분과 유림의 군사적 전술이 부딪쳤음을 알 수 있다.
■고지는 유림, 평지는 홍명구
우여곡절 끝에 홍명구군과 유림군은 평양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는 직로를 피해, 삼등-수안-평강을 거쳐 김화 읍내로 집결한다. 김화 역시 요충지였다. 함경도와 평안도, 강원도 쪽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의 인후(목구멍·咽喉)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청군의 우익군 6000여 명도 철원-연천-포천 일대에 진출, 강원도 방면과 수도권의 통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결전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두 지휘관은 끊없는 설전을 벌였다.
“청군에 비해 중과부적이니 성재산(해발 463)에 있는 산성(성산성)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유림)
“무슨 말씀을…. 임금이 난리 중에 있는데…. 마땅히 죽음으로써 싸워야 합니다. 또 우리 군사가 여기에 있으니 청나라군의 전력이 흩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적이 남한산성으로 내려가지 못하니 이 또한 계책입니다.”(홍명구)
홍명구는 그러면서 군사들에게 항전의 의지를 다졌다.
“죽을 각오로 싸우면 살 것이고, 죽더라도 또한 죽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예.”
하지만 유림은 찬성할 수 없었다.
“적군이 많고 우리 병력이 적으니 반드시 두 군대를 합쳐야 합니다.”
그러나 홍명구는 유림의 마지막 제안을 듣지않고 결국 남쪽 개활지인 탑곡에 주둔했다. 유림이 “그곳은 지형이 평탄하고 낮아 적의 공격을 받기 쉬우니 높은 곳에 가야 한다”고 했지만 홍명구는 고개를 저었다. 유림은 홍명구 군과 달리 백전(栢田)의 언덕에 진을 쳤다. 이 언덕은 삼면이 두절되어 한 면만 산과 연결됐고, 또한 가운데가 끊겨 ‘벌의 허리’ 같았다,
■홍명구를 위한 변명
사실 홍명구의 고집에는 일리가 있었다.
먼저 홍명구가 한 이야기 중 “우리 군사가 평지에 있어야 청군이 흩어진다”는 대목….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앞서 밝혔듯이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에 산성를 중심으로 한 방어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청태종은 산성을 거들떠 보지 않고 한양도성을 향해 물밀듯이 내려왔다. 홍명구는 만약 김화에서도 조선군 병력이 산성에 올라간다면 청군이 산성공격을 하지 않고 남한산성으로 돌진하거나 다른 작전을 펼칠까 두려워 했을 것이다.
또한 홍명구에게는 뼈아픈 기억이 있었다. 즉 그는 1627년 정묘호란 때 평안감사였던 윤훤의 종사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금군이 쏟아져 들어와 의주-안주를 휩쓸자 윤훤이 평양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윤훤은 참수된 뒤 본보기용으로 효수됐으며, 이것을 막지못한 홍명구 역시 파직됐다. 이런 과거가 있는 홍명구이기에 이번(병자호란)에 다시 평양성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다.
■장렬한 산화
전투는 1637년 1월28일 해가 막 돋을 때 시작됐다. 관노 유계홍은 당시의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송시열은 훗날 김화에 들러 옛 전장을 답사한 뒤 유계홍의 목격담을 듣고는 <송자대전> ‘기김화전장사실’에 실었다.
“적의 한 부대는 양진(홍명구군과 유림군의 사이) 사이를 횡단하고 한 부대는 홍명구군의 앞을 돌진했습니다. 흰 칼날이 번쩍거리며 잠깐 동안 접전을 벌어진 끝에 아군은 크게 패했습니다. 적은 아군을 뒤쫓아가면서 창·칼로 마구 찍어댔습니다. 한참만에 싸움은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청군은 우선 홍명구군과 유림군의 벌어진 틈을 갈랐다, 그런 뒤 평지의 홍명구군을 맹공략, 조선군을 창과 칼로 마구 도륙했다. 그렇다면 홍명구는?
“적이 달려들어 공(홍명구)의 휘하 김철동 등 6명이 싸우다 죽었다. 공이 소리(小吏)에게 평안감사의 부인(符印)을 주면서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이다. 부인을 잃어버리지 마라. 네가 잘 간직해라.’고 명령했다. 그리곤 노모에게 이별을 고하는 글 한 줄을 썼다, 몸에 화살 3대를 맞자 스스로 뽑아 활을 당겨 적에게 쏘니 적이 곧장 달려들었다, 홍명구 공이 맞싸우다가 결국 적의 칼에 맞았다. 따라서 죽는 자들이 많았다.”(박태보의 <정재집> ‘기김화백전지전(記金化栢田之戰)’)
그야말로 장렬한 전사였다.
■유림, 청태종 매부 사살하다
유림은 홍명구 군이 참패하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홍명구군을 대파한 청나라군이 부대를 4곳으로 나누어 유림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군사들이 동요하자 유림은 높은 곳에 말을 세우고는 큰 소리로 호령했다,
“나 여기 있노라. 동요하지 마라.”
장군의 독려에 장병들이 사력을 다해 막았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잣나무 숲이 빽빽한 고지였다. 적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유리한 자리였다. 반면 조선군을 우러러 봐야 하는 청군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을 쏘아도 번번이 잣나무 숲에 걸렸고, 기병대 또한 힘을 쓰지 못했다. 이 틈을 타 유림군이 포를 쏘니 한 발에 두 세 명이 쓰러졌다. 그러자 적이 조금 후퇴했다.
한숨 돌린 유림은 부대를 정돈하면서 추상같은 명령을 내린다.
“화살과 탄환이 별로 없다. 낭비해서는 안된다. 적이 우리 진영을 향해 수십보 이내로 접근하면 내가 깃발을 휘두를 것이다. 그때 일제히 발사하라. 이를 어기면 반드시 참형에 처할 것이다.”
유림군은 적이 10보 이내에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군의 깃발에 따라 탄환과 화살을 발사하니 적의 시체가 성책에 가득 쌓였다.
해가 저물 무렵, 청나라군이 전 병력을 동원, 총공세를 벌였다. 이 때 백마를 탄 적의 장수가 아래 위로 달리며 청군을 지휘했다. 유림 장군은 10명의 병졸을 뽑아 은밀하게 지령을 내렸다.
“저 백마 탄 장수를 쏘아라.”
목책 밖으로 몰래 나간 병졸들이 일제히 포문을 열자 적의 지휘관이 쓰러졌다. 이 때 전사한 적장은 청태종의 매부인 야빈대였다. 그랬어도 워낙 중과부적의 싸움이어서 전황은 일진일퇴였다. 지친 병졸들 가운데는 도망가는 자들도 있었다. 장군은 풍악을 울려 승전을 알리는 소리로 병졸들을 격려했다. 마침내 날이 어두워지자 적이 후퇴했다.
■신묘한 계책
유림 장군은 정탐병을 보내 적의 상황을 점검했다.
“적 진영에서 곡(哭)소리가 진동합니다. 한데 구원병들이 계속 밀려와 끝을 알 수 없습니다.”
정탐병의 보고를 들은 유림 장군은 결단을 내린다.
“오늘 전투는 요행히 승리했지만 화살과 탄환이 이미 떨어져 더는 싸울 수 없다. 이 승세를 타고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상(인조임금)을 구하는 편이 낫겠다.”
그러면서 한 가지 계책을 냈다. 즉 부서진 총을 거두어 탄약을 장전하고 화승줄에 매달되 그 길이를 들쭉날쭉 하게 했다. 그 다음 잣나무 숲 속에 여기저기 걸어놓고 맨 마지막 후퇴하는 병사들이 불을 질렀다. 그러니 귓전을 흔드는 총소리가 밤새도록 울려퍼졌다. 병력의 90%를 잃은 청나라군은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음날 새벽 적들이 도착했으나 유림 군은 이미 멀리 진군한 뒤였다.
전투에서 크게 패한 청나라군은 유림의 계책에 또 한 번 농락당한 것이다.
“이 전투로 죽은 적병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적들이 시체를 수습해서 화장한 뒤 돌아가는데 3일이나 걸렸다. 아군의 시체 역시 벌판을 덮고 언덕에 가득 찼다. 홍명구 감사의 시신은 쌓인 시신 더미에서 발견했다. 칼의 상처가 얼굴과 왼쪽 눈썹으로 그어진 채로 사망했다.”(박태보의 <정재집>)
재빨리 전장을 빠져나온 유림군은 암정리-마현리-말고개-산양리-화천 방면으로 이동한다. 2월3일 가평에 이른 유림군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홀랑 항복해버린 임금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임금이 1월30일 삼전도에서 항복했다는 것이었다. 유림으로서는 참으로 힘빠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김화현령 이휘조는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전쟁터 주변에 가매장 시켰다. 이휘조의 뒤를 이은 안응창은 가매장된 시신들을 김화현 북쪽 계곡에 이장했는데, 바로 전골총이다. 접전이 벌어진 전투지역 하천은 피로 믈들여졌으며, 지금도 이 개울가를 ‘피냇개울’이라 한다. 전쟁 후 홍명구와 유림을 평가하는 시선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홍명구의 졸기(부음기사)를 보자.
“홍명구의 죽음이 알려지자 상(인조)이 울면서 이르기를, ‘내 평소 그의 사람됨을 알았다. 이렇게 나라가 결딴난 때에 단지 이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고 했다.”
전쟁이 끝난지 21년 후인 1658년(효종 9년) 조정은 순절한 홍명구의 공을 살펴 충렬공의 시호가 내린다.
반면 유림은 탄핵을 당하는 신세가 된다.
“사헌부가 아룄다. 유림은 안주에 있을 때도 틀어박혀 있으면서 적의 선봉을 편안하게 보내고, 성문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고~ 김화 싸움에서도 형세가 좋은 곳을 먼저 점거한 채 홍명구 감사와 합세하지 않아 그의 죽음을 좌시하고 구원하지 않았으니 잡아다가 국문하여 정죄하소서.”(<인조실록> 1637년 윤4월 11일)
이 때문인지 유림이 죽은 지 50년이 지나도록 묘도문(墓道文·공적을 알리는 비문)조차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남구만(1629~1711)이 안주와 김화를 답사하고 현장기록과 주민들의 구전을 살핀 뒤 신도문을 완성했다. 그러고도 100여 년이 지난 1796년(정조 20년) 조정은 유림에게 충장공의 시호를 내린다.
■치욕의 역사 체면 치레한 승리
이것이 치욕의 역사라는 병자호란에서 그나마 조선의 체면을 세워준 김화 <백전대첩>의 전말이다.
서술했다시피 승첩의 과정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당대 최강의 철기병으로 무장한 청나라군과 맞선 어려웠던 전투…. 게다가 문신인 평안감사 홍명구와와 무신인 평안병사 유림 간의 끊임없는 의견차이…. 이 때문에 진을 평지(홍명구)와 고지(유림)로 나눠 싸울 수밖에 없었던…. 하지만 그것이 어디 개인의 영달을 위한 다툼이었던가.
싸움의 방법만 달랐지 둘 다 나라를 위한 싸움이었기에 버텨냈으며, 결국 승리로 귀결된 것이다. 평지를 고집한 홍명구의 전법은 자칫 ‘개죽음’이라는 혹평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홍명구군의 희생으로 청나라군은 일정한 전력의 손실을 입었다. 백전대첩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유림도 홍명구군의 전멸을 수수방관한 죄목으로 탄핵받았다. 하지만 승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유림은 막강한 청나라군의 총공세를 적절한 방어와 반격전술로 전멸시킨 뒤 기묘한 철수작전으로 상대를 기망하는 빼어난 전략을 보여줬다. 그러니까 <백전대첩>은 홍명구의 희생을 토대로 한 유림의 승전보라 결론지을 수 있다는 얘기다.
어쨌든 누란의 위기에서 목숨을 바치고(홍명구), 대첩을 이끌어낸(유림) 장수와 백성들이 있는데…. 임금은 청군이 압록강을 도하한 지 불과 53일 만에 ‘삼배구고두’라는 치욕을 당했다. 갑갑한 일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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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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