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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박정희의 XXX 따러 왔시요.

  “청와대를 까러 왔수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1968년 1월22일 저녁 7시. 방첩대 사령부 식당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북한 유격대원 김신조(당시 27살)의 얼굴은 오기에 가득 찼다.
 그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작전에 실패한 적군의 자존심으로 도끼눈을 뜬 채” 기자들의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했다.
 “비록 투항했지만, 전향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영문도 모르는 기자회견장에 개끌리듯 끌려나와 대답을 강요하는 것은 결국 날 무시하고 깔보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니 격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지요.”
 당시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를 떠올린 김신조의 후일담이다.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그것도 ‘청와대를 습격해서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니….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게다가 김신조 일당이 제지 당한 곳이 청와대와 직선거리로 1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척이었다니….       

파주 적성 답곡리 37번 국도에 묻혀있는 1.21사태 무장공비 무덤. ‘북한군/중국군’ 묘지의 1묘역에 있다. 침투한 31명 중 28구의 시신이 묻혀있다. |이기환 기자

■실제상황에서 벌인 ‘전쟁놀이’의 기억
 잠깐 필자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당시 청운동 산골마을에 살고 있었다.
 “따!따!따!따! 쾅”
 일요일인 21일 밤 9시가 좀 넘었을까. 지독한 추위 속, 만만치 않은 위풍을 피하려 이불 속에 폭 들어가 잘 준비를 하고 있던 어린 필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칠흑의 어둠을 가르는 날카로운 총성과 폭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자하문밖으로 볼일을 보러 간 엄마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일까. 엄마는 왜 오지 않는 것일까.
 이불을 뒤집어 쓰고 훌쩍이고 있을 때 엄마가 돌아왔다.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안심이 됐는지…. 밤새도록 콩 볶는 듯한 총성과 폭음이 들렸다.
 다음 날, 날이 밝자 헬리콥터가 굉음을 내며 하루종일 선무방송을 해댔다.
 “간첩은 자수하라! 간첩은 자수하라!”
 당시 TV에선 빅 머로 주연의 ‘Combat’이라는 외화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연합군과 독일군의 전투를 그린 외화였다. 당시 필자네 집에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큰 형이 사온 TV가 있었다.(얼마 뒤 그 TV는 이모네 집으로 팔려갔다.) 당시만 해도 산골동네에 TV가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권력이었다. 그러나 다소 소심했던 필자는 그 권력을 마음껏 행사하지는 못했다. 친구녀석들을 가리지 않고 함께 TV를 사이좋게 봤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철없던 동네아이들은 헬리콥터의 선무방송과 총소리, 수류탄 소리를 배경삼아 ‘Combat’의 전투장면을 재현하며 하루종일 놀았다.
 지금 생각해도 애들은 애들이다. 실제 상황이 동네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전쟁놀이를 했다니…. 하지만 어느 누구도 실감하지 못했으리라. 청와대가 습격목표가 되고, 실제로 청와대 주변에서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지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1968년 1월 북한의 124군 부대 소속 유격대의 침투로. 남방한계선을 통과한 지 불과 3일만에 청와대 바로 옆까지 침투했다. |박지선 기자

■청와대 비슷한 사리원 인민위원회 건물 습격
 그렇다면 1월21일 밤 어린 필자가 들었던 총성과 폭발음은 과연 무엇이었나.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김신조의 증언을 중심으로 1968년 1월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김신조의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에서)
 1월10일 새벽, 북한 사리원에 있는 황해남도 인민위원회 건물에 정체불명의 괴한 31명이 나타났다. 인민위원회 건물은 청와대와 매우 흡사했다. 이 건물 주변에 무장한 노동적위대(남한의 예비군)와 사회안전원(옛 내무서원)들이 쫙 깔려 있었다. 괴한들은 건물 정면까지 들이닥치자 노동적위대원 7~8명이 AK소총을 바로 코 앞까지 들이댔다. 괴한들의 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괴한들은 1~2층을 오가며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임무를 마친 괴한들은 전속력으로 시내를 빠져 나왔다. 이 총격전으로 인민위원회 건물을 지키고 있던 노동적위대와 사회안전원 등 12명이 사망했고, 40여 명이 부상했다. 반면 괴한들의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 사건은 남한 특공대의 천인공노할 만행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들은 남한 특공대가 아니었다. 1967년 창설된 북한 124군 부대 6기지 소속 특수부대원들이었다. 124군 부대는 남파공작원 부대인 집단군 도보정찰소나 283부대 소속 요원 가운데 최정예로 구성됐다. 6기지 대원들은 124군 부대원 가운데서도 ‘서울 침투’의 임무를 맡은 정예요원들이었다.

 ■원래 목표는 청와대, 미대사관, 육본,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수용소…
 사리원 인민위원회 습격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쯤인 1967년 12월, 김신조를 비롯한 6기지 대원들이 속속 부대본부로 소환됐다. 31명이었다. 부대장인 이재형과 우명환이 명령을 내렸다.
 “동무들은 124군 부대 창설 이후 첫번째 남파공작 임무를 맡게 됐소. 동무들이 수행할 임무는 청와대를 습격하는 일이오.”
 이 때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김정태가 나타나 부대원들에게 소위 계급장을 달아주며 말했다.
 “성공하고 돌아오면 모두 영웅칭호를 받게 될 것이오.”
 그리곤 한달 뒤 31명의 부대원들은 청와대 습격에 앞서 청와대 건물과 비슷한 사리원 인민위 건물을 실제로 습격한 것이다. 원래는 31명이 아닌 76명으로 구성됐다. 5개조로 편성돼 청와대와 미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 수용소 등을 대대적으로 습격할 계획이었지만, 김정태의 지시로 목표가 ‘청와대’로 축소됐다.  

1.21사태의 발생을 알리는 경향신문 1968년 1월22일자 1면.

■유격대의 결정적인 실수
 ‘김일성 수령께 보내는 맹세문’에 혈서를 쓴 31명의 유격대원은 18일 새벽 연천의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을 넘었다.
 침투 코스는 한국군 25사단과 미 2사단의 경계선 지역이었다. 부대와 부대 사이의 경계 지역인 ‘전투지경선’은 서로 책임을 미루는 곳이다. 침투하기 적격인 지점인 것이다.
 특히 한국군 지역을 통과해서는 절대 안됐다. 이 지침에 따라 한국군 관할구역으로부터 약 300m 정도 거리를 두고 미 2사단 지역을 통과했다.
 날이 밝자 유격대원들은 교대로 잠을 자면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18일 밤 꽁꽁 언 임진강을 10분 간격으로 넘었다. 유격대원들은 반구보와 속보, 구보로 달려 파평산(해발 496m)에 올라갔다. 19일 새벽 5시, 파주 법원리 초릿골 뒷산인 삼봉산에 도착한 뒤 2차 숙영지를 차렸다. 이 곳에서 낮을 보낸 뒤 다시 야간행군을 해야 했다. 이 날 ‘청와대 습격작전’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 터진다.
 오전 10시쯤, 나뭇꾼인 우희제(30살)·우경제(22살)·우철제(당시 21살)·우성제(18살) 형제를 맞딱드린 것이다. 이 때 유격대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다.
 “서울로 가면 어떻게 가지?” “쌀밥은 일년에 몇번씩 먹니?” “이 옷은 보다마나 미제겠지?” 

21일 밤 자하문 고개에서 내려오던 버스가 피격된 모습. 청운중학생 김형기 군 등 2명이 사망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나뭇꾼 형제들에게 입당원서와 서약서까지 쓰게 했지만…
 남반부 인민들의 삶이 궁금했는지 수상한 질문을 해대니 우씨 형제들이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우씨 형제들은 “소작을 부치며 어렵게 살고 있다”고 털어놨다. 정말인 것 같았다. 노동에 찌든 손하며, 옷도 남루했고…. 유격대원들은 우씨 형제들에게 엿이며, 오징어며 비상식량을 나눠 줬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우씨형제의 처리를 놓고 즉석에서 당 세포회의가 열렸다.
 살리자는 의견이 나왔다. “혁명을 하는 이유는 이들처럼 불쌍한 형제들을 위한 것인만큼 우리편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들을 죽이면 어떻게 꽁꽁 언 땅을 파서 묻겠느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반면 남파경험이 있는 대원들은 ‘혁명을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 법’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즉석에서 투표가 이뤄졌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살리자’는 쪽이 절대다수였다. 총조장조차 ‘살리자’에 표를 던졌다. 이젠 우씨 형제의 신고를 막아야 했다. 대검으로 연필을 깎은 뒤 서약서와 공산당 입당원서를 쓰게 했다. 가족들의 이름까지 모두 쓰게 한 뒤 손도장까지 찍게 했다.
 “동무들, 우리는 북반부 지하혁명단이다. 너희들이 이북에 가면 무상으로 대학교까지 보내주겠다. 만약 신고하면 가족들까지 처단할 거다.”
   
 ■산악지형을 시속 10㎞로 뛰었지만…
 우씨 형제들을 살려보낸 유격대원들은 자꾸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나뭇꾼 형제들이 신고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19일 밤 9시, 비상회의를 열었다.
 “이제부터는 행군속도를 한시간에 10㎞씩으로 하자. 비봉까지 총역주한다.”
 시속 10㎞? 사실 124군 부대원들은 험준한 산악지형이라도 시속 12㎞ 주파를 목표로 훈련해왔다. 우씨 형제의 신고를 받은 남한 군인들이 북한 유격대의 행방을 쫒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빠른 행진속도를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추위와 배고픔 속에 어두운 눈길을 헤치며 계속 뛰었다. 3일간 엿과 오징어만을 먹고 가히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이다.
 송추골짜기 버스 종점에서 군인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을 쬐고 있었다. 유격대는 코웃음을 치며 통과했다. 서울이 뚫리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숙영지인 북한산 비봉(해발 560m) 북방의 기슭에 다다른 것은 20일 새벽 5시였다. 험준한 산악지형을 8시간만에 달려온 것이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보낸 유격대는 20일 저녁 8시 북악산을 향해 떠났다. 작전대로라면 비봉~북악산을 거쳐 청와대로 돌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났다. 눈이 얼어붙은 바위를 헛디뎌 가며 밤새도록 행군한 뒤 21일 새벽녘에 다다른 곳은 비봉 남쪽이었다. 겨우 산봉우리 하나를 돌아나온 것에 불과했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귀중한 하루를 허비한 셈이다. 

생포된 북한 유격대원인 김신조(원안)가 사살된 무장공비의 시신을 확인하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자하문 고개까지 무사통과 행군
 21일은 일요일이었다. 대통령이 청와대 관저에 반드시 있는 날이었다. 21일 밤 10시 30분을 D-데이로 삼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제 비봉 남쪽에서 낮을 보낸 뒤 밤에 직접 청와대로 돌진하는 길을 찾아야 했다. 아침부터 헬리콥터가 떠 유격대의 머리 위를 분주하게 지나갔다. 나무꾼 형제들이 신고한 게 분명했다.
 “거 보라우! 쏴버려야 했는데….”
 후회막급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유격대원들은 군복을 벗고 배낭 속에 넣어온 사복을 갈아 입었다. 사복을 입어도 되는 CIC(특무대) 요원으로 위장하려는 것이었다. 기관단총과 권총 각 1정씩, 탄환 350발, 수류탄 8개, 반 탱크용 수류탄 2개, 단도 등으로 무장했다. 그 위는 버버리 코트를 덧입었다.
 밤 8시, 세검정 도로에 들어섰다. 세검정 버스정류장에 시동을 건 버스 3대가 서 있었다. 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돌진한 뒤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그 버스로 전속력을 질주, 북으로 귀환하면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총조장인 김종웅이 “원래대로 하자”며 고집을 피웠다. 만약 버스로 돌진했다면 1·21사태의 양상을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대원들은 원래 계획대로 길 양편에 종대로 갈라서서는 청와대를 향해 줄지어 나갔다. 상명대 입구 세검정 사거리에 검문소가 있었지만, 무사통과였다. 자하문 고갯길에서 첫번째 제지를 당한다,.
 종로경찰서 소속 순경 둘이 검문에 나선 것이다. 유격대는 ‘CIC’라고 했지만, 경찰은 믿지 않았다. 유격대는 검문경찰이 겨우 두 명인 줄 알고 무시해버리고, 청와대로 움직였다. 경찰이 뒤를 쫓으며 정치부조장인 김춘식을 공격했다.

 ■권총으로 막아선 최규식 종로경찰서장
 유격대가 경복고 후문까지 다다랐을 때 지프 한 대가 가로막고 있었다.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순경 둘과 함께 내렸다.
 “나 종로경찰서장이다. 내 허락없이는 못간다.”
 옥신각신하던 중 군화 발자국 소리가 청와대 쪽에서 들렸다. 병력이동 소리였다. 다급해진 김종웅 총조장이 총을 쏘았다. 최규식 서장은 그 자리에서 순직했다. 정종수 순경도 쓰러졌다. 그 또한 나중에 숨을 거둔다. 최규식 서장은 앞날이 창창한 경찰간부였다. 박정희 군수기지 사령관 시절 부관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1967년 3월 용산경찰서장 시절 부하경찰이 강도짓을 하다가 적발되자 삭발을 하고 사의를 표명한 이력도 있다. 하지만 7개월 만인 10월 종로경찰서장으로 전보된다. 이후 한 달 만에 부하직원의 피의자 고문 조작 사건으로 또 한 번 사과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운명의 1·21사태를 맞은 것이다,
 김신조는 최규식 서장의 순직을 두고 “전혀 죽을 필요가 없었다”며 “그저 자기 목숨을 그냥 갖다 바친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권총 한 자루 차고 유격대와 맞대결하려 했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솔직히 말해 무모한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규식 서장의 제지가 없었다면 청와대는 더 위험에 빠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최 서장과 정 순경의 죽음은 ‘가치있는 죽음’이라는 평을 들어야 할 것 같다.

 ■노선버스에 총격, 수류탄 투척 
 어떻든 그 때부터 패닉이었다. 당시 청와대 경내와 외곽경비는 전두환 중령이 지휘하는 수경사 예하 30대대가 맡고 있었다. 본격적인 총격전이 벌어졌다. 총조장이 “(청와대로) 돌격앞으로!”를 외쳤지만, 공허한 명령이었다. 유격대원들은 빗발치는 총격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 때 자하문 고개에서 버스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켠채 달려왔다. 유격대원들이 버스를 향해 수류탄을 까서 던지고, 총을 마구 쏘았다. 이 때 청운중학교 학생 김형기 군 등 무고한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고교입시를 앞둔 김형기 군은 당시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한 뒤 귀가하다가 변을 당했다. 당시 여론은 무장공비들이 민간인을 태운 버스를 공격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고 맹비난했다.
 하지만 이 대목은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 전시상황이고, 자하문 고갯길에서 이미 검문검색이 이뤄지고 있었던 때였다. 그렇다면 전시상황에 시내버스가 지나갈 수 있게 방치한 죄는 어떻게 묵과할 수 있을까. 김신조는 “지원병력을 실은 버스가 질주해오고 있는 것으로 오인할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유격대원들은 이제 도망자의 신세가 됐다. 북악산 쪽으로, 다시 자하문 고개쪽으로, 경복고 후문을 통해 인왕산 쪽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생포'된 김신조가 기자회견 하고 있다. 그는 '청와대를 까부수고,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생포(투항?), 자폭, 사살…
 유격대원들은 모든 무장을 풀고, 수류탄 한개 만으로 집었다. 붙잡히면 자폭하려는 것이었다. 실제 맨처음 자하문 고개에서 검문 경찰의 공격을 받은 정치부조장 김춘식은 부상을 입고 체포됐다. 하지만 그는 치안국에서 자폭했다. 김신조와 행동을 함께 한 유격대원 하나도 동료가 사살되자 자폭의 길을 택했다. 24일 파주 법원리 민가에 침입한 유격대원도 자폭했다.
 21일 밤 11시쯤 민가의 지붕에서 떨어진 유격대와 격투를 벌이던 체신공무원 이용선씨가 유격대원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유격대원 가운데 김신조는 상명여대와 문화촌 사이의 세검정 계곡 바위 틈에서 ‘생포’됐다. 훗날 김신조 본인은 ‘생포’가 아니라 ‘투항’이었다고 주장했다.
 “바위 틈에 숨어있는데, 순식간에 어떤 물체가 나타나 내 눈동자와 마주쳤다. 잠시 후 ‘자수하면 살려둔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류탄을 집어 안전핀에 손가락을 걸었다. 자폭하라는 지도원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 저 밑바닥에선 그래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치켜들고 나갔다.”
 나머지 유격대원의 최후는 비참했다. 예컨대 파주 법원리에서 27번째 사살자의 시신을 살펴보면 도피 중 총상으로 손가락 3개가 썩어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발가락도 동상 때문에 썩어 문드러져 있었으며, 뱃가죽은 붙어있었다. 공비들은 주로 자신들의 침투로를 도주로로 삼았다가 사살 당했다.   

 ■124군 부대의 실패이유
 몸 자체가 살인무기였던 124군 특수부대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 역시 사람에 불과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밖에는 할 수 없다. 김신조는 훗날 몇가지로 분석했다.
 “나중에 보니 실탄이며 수류탄까지 버린 대원들도 있었다. 아무리 정예부대원이지만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장비를 하나하나 버린 것이다.”
 김신조는 더 중요한 이유를 언급한다. 각 부대에서 가장 특출난 대원들을 선발했지만, 그것이 중대한 오류였다는 것이다.
 “각기 출신 소속이 달랐다. 총조장도 우리 부대 중대장이 이나었다. 그는 새로 짠 공작조의 임시조장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지휘체계가 서지 않았다. 나무꾼 형제들의 처리를 놓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것이나 세검정에서 버스를 탈취하자는 의견이 묵살된 것이나….”
 하지만 만약 김신조의 말마따나 일개 부대를 통째로 차출했다면, 그래서 일사분란한 지휘체계로 청와대를 습격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모골이 송연한 일이다. 

1968년 1월30일 구정공세 때 한 베트공 간부가 붙잡히자(위 사진) 남베트남의 경찰국장이 권총으로 즉결처분하고 있다.(아래 사진) 이 사진 한 장으로 전세계에서 반전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 사진을 찍은 <AP통신>의 에디 애덤스 기자는 1969년 플리처상을 받았다.

■야만의 1년, 1968년
 돌이켜보면 1968년은 한국전쟁 이후 가장 위험했던 1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1사태가 일어난 지 불과 이틀이 지난 1월23일, 동해에서 또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납치된 것이다. 미국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원산만 근처에 급파하고 핵폭탄 사용까지 불사하겠다는 복안을 세웠다.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빠졌다. 그 뿐이 아니었다.
 1월30일, 구정을 맞아 북베트남 게릴라들이 사이공 등 주요도시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이른바 ‘구정공세(Tet offensive)’였다. 이 ‘구정공세’는 미국의 전쟁수행의지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베트남 경찰간부가 게릴라 혐의자를 권총으로 즉결처분하는 모습은 미국와 유럽의 반전운동에 불을 지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 해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경북 울진군 북면 고포에 124군 부대 특수부대원들이 차례차례 상륙했다. 15명을 한 개 조로 모두 8개조, 즉 120여 명의 무장간첩이 연속침투한 것이다. 이들은 산간농촌 마을에 침입, 위조지폐를 나누어주고 선전 선동 활동을 벌였다. 일종의 빨치산 활동을 벌인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울진·삼척 무장공비사건’이었다. 그 해 한반도에서, 베트남에서 벌어진 일촉즉발의 상황은 톱니바퀴처럼 연결돼있다. 

 1.21사태가 발생한 지 불과 이틀만에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납치됐다. 한반도는 또 한 번 전쟁의 위기에 빠졌다.

■군사모험주의와 보복 응징
 사실 북한의 군사모험주의는 예고된 것이었다.
 1966년 10월, 제2차 조선로동당 대표자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원과 조속한 남조선 혁명 및 조국통일’을 강조했다.
 그러니까 월남(남베트남)에 5만 명의 병력을 파견한 남한을 견제하고, 월맹(북베트남)을 도와주려면 남한에 무력공세를 강화할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여기에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더한다면…. 더구나 1967년 5월 열린 조선로동당 제4기 1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군부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게 된다. 이 전원회의에서 당의 유일사상으로 김일성 주체사상이 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 박금철 등 갑산파와 대남총책 이효순이 숙청당한다. 이들을 대신한 인물이 군부출신 강경파인 허봉학과 김창봉, 김정태 등이다. 대남정책을 주도한 이들이 당시 후계자로 떠오르던 김영주를 견제하고 당원을 장악하려 공명심에서 모험주의적 군사행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이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남한과 미국의 발목을 잡는 한편, 한반도를 제2전선으로 만들어 남조선 혁명을 일으켜 조국통일을 완성하려 했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남한도 북한의 대남 공세에 때때로 보복 응징작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미군 정보자료에 의하면 1966년 10월 전방지역에서 소대규모의 한국군 부대가 북한군을 공격, 3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또 1967년 8월과 9월, 남한의 특수부대원들이 북한에 침투했다고 한다.(홍석률의 <분단의 히스테리>에서) 푸에블로호 사건 때 미대통령 특사로 방문한 사이러스 밴스 특사는 존슨 대통령에게 “1967년 10월26일~12월까지 남한 특수 부대원들의 대북침투와 공격이 11차례 있었다”고 보고했다. ‘1968년’은 국내외적으로 최악의 상황이 버무려진 ‘끔찍한 1년’이었던 것이다.  

적성 답곡리에 있는1.21사태 무장공비 묘역. 28구 가운데 8구의 비문에는 '무명인'이라 새겨놓았다.

■1·21사태 무장공비 무덤에서
 2013년 1월11일, 필자는 37번 국도를 따라 1·21사태 때 사살되거나 자폭한 북한군 유격대원들이 묻여있다는 이른바 ‘적군묘지’를 찾았다.
 흰눈이 쌓인 탓일까.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았지만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현장을 놓쳐 한바퀴 빙 인근 마을을 돈 뒤에야 겨우 찾았다. 바로 서울로 돌아오는 국도 옆에 있었다.   
 ‘제네바 협정과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조성했다는 적군 묘지의 정식명칭은 ‘북한군/중국군 묘지’였다. 푹푹 빠지는 눈길을 따라 1묘역을 찾았을 때 눈덮힌 묘비가 죽 늘어서 있었다. 일일이 묘비마다 눈과 얼음을 치웠다. ‘북한군 중위 나정길, 1·21사태 무장공비’ ‘상위 김시웅’, ‘소위 김수윤’ ‘상위 김춘식’, ‘중위 김길수’, ‘중위 임용택’ ‘소위 조명환’, ‘소위 현수제’, ‘소위 박양조’, ‘소위 방양진’, ‘소위 최준일’, ‘소위 김달신’, ‘소위 김창국’, ‘소위 박기철’, ‘소위 김순국’, ‘소위 권호신’, ‘소위 김일태’, ‘소위 김을식’, ‘소위 한수군’, ‘소위 유형호’….
 모두 28명의 묘비가 서있다. 필자가 일일이 세어본 까닭이 있다. 남파된 유격대원 31명 가운데 28명이 사망했고, 1명은 생존(김신조)했다. 그러니까 2명은 끝내 그 생사를 모른다는 것이다.
 김신조씨는 남파된 31명 중 살아 돌아간 이는 단 1명이라도 했다. 그렇다면 대체 나머지 한 명은 어찌 된 것일까. 1968년2월16일자 신문은 ‘경기 양주에서 무장공비 1명을 사살했는데, 이미 얼어죽은 채 발견된 것이며, 이로써 잔당은 2명으로 줄어 들었다’고 했다. 그 이후에는 1·21사태로 인한 생포·사살·실종·월북 등의 기사가 일절 보이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름 석자라도 비석에 새긴 이들은 낫다. 8명의 비석엔 ‘무명인’이라고 새겼다. 산산이 흩어져 신원확인도 할 수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이다. 사실 이들의 시신은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인도히려 했다. 하지만, 만약 이들 시신을 인도받으면 북한은 남파사실을 시인하는 셈이 된다. 북한은 “그런 사람들을 남파시킨 적이 없다”고 일축하면서 시신인도를 거부했다.
 이들을 두고 “청와대를 습격, 대통령을 죽이러 왔으며, 수많은 인명피해를 낸 잔인무도한 공비일 뿐”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따라서 “무슨 제네바 협정이며, 인도주의 정신에 따른 대접이냐”는 것이다. 일리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야만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모두 분단의 희생양이 아니던가. 엉망이 된 시신이나마 북의 고향을 향해 누워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가.
 그러고 보니 이 ‘야만의 역사’는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코흘리개 시절인 45년 전 필자가 실제 겪었던 이야기다. 

 <참고자료>
 김신조,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 동아출판사, 1994
 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창비, 2012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경향신문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