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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이토 히로부미 괴롭히고, 항일의병 사진 남긴 '영국신사'들

“이 이토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기사)이 한국인을 감통(느낌이나 생각이 통함)시키는 힘이 크다. 그중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 계속되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의 언급입니다. 대한제국을 집어삼킬 야욕을 거리낌없이 펼쳐가던 이토를 괴롭힌 ‘일개 외국인’이 누구일까요. 바로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인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872~1909)이었습니다.
최근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한·영 수교 140주년을 맞아 영국 브리스톨시에 ‘베델(한국명 배설) 동상’의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저는 “일제 강점기 영국 출신의 독립운동가가 베델을 비롯해 6명에 이른다”는 보훈처장의 언급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요. 그 분들이 베델(대통령장)과, 프레데릭 매킨지(1869~1931)·조지 루이스 쇼(1880~1943)·프레데릭 브라운 해리스(1883~1970·이상 독립장), 더글라스 스토리(1872~1921)·어거스트 스위니(1909~1980·이상 애족장) 등입니다.

■진정한 영국신사
‘영국신사’라는 말이 있잖아요. ‘영국인들이 예의를 중시하고 여성과 약자를 배려하는 신사도를 중시한다’는 표현이죠. 
진짜 그런지는 제가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구요. 적어도 이 여섯분이야말로 진정한 ‘영국신사’라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활약한 19세기말~20세기초 영국은 우리에게 절대 ‘신사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1883년 11월 조·영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것까지는 좋았죠. 그러나 불과 1년3개월 뒤인 1885년(고종 22)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나라가 영국이었죠. 영국과 일본은 1·2차 동맹(1902·1905)을 맺어 ‘영국=청과 인도’, ‘일본=대한제국’과 관련된 특수한 이익과 지배권을 서로 보장해줬죠. 뭐 영국 뿐이 아니었습니다.

이 무렵 서구 사회의 여론도 일본 편이었습니다. 동병상련으로 러시아의 무리한 동진·남진정책에 위기감을 공유했던 상황에서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대승을 거뒀잖습니까. 그런 탓에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호감이 강했답니다. 
그 와중에 대한제국에 머물던 외국인이라면 더했겠죠. 당시 ‘데일리메일’ 기자로 서울에 파견된 매킨지는 “러·일 전쟁 중 한국에 거주했던 외국인들 가운데 소수의 친러파를 제외하면 절대 다수가 일본에 동정적이었다”고 전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조선과 대한제국을 위해 몸을 바친 외국인이 다름아닌 영국인이라면 그 분들이 ‘영국신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조선의 황무지를 꿀꺽 하려고?’
그중 대표적인 영국신사는 바로 베델이라 할 수 있죠.
베델은 32살 때인 1904년 3월10일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으로 조선에 부임합니다. 2월8일 발발한 러·일전쟁을 취재할 종군기자 자격이었습니다. 그런데 4월16일자로 ‘경운궁 화재사건’을 특종보도하지만 곧 해임됩니다. ‘데일리 크로니클’이 친일성향의 신문이었기 때문에 베델의 체질과 맞지 않았던 겁니다. 
베델은 아예 대한제국에서 터를 잡습니다. 한글과 영문을 섞은 ‘대한매일신보’(The Korea Daily News)를 창간했습니다. 
물론 베델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발행인 겸 편집인이 베델이었고, 양기탁(총무)과 박은식(주필), 신채호·최익·장달선·황희성(필진) 등이 참여했습니다. 1904년 7월18일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곧 항일의 필봉을 휘둘렀습니다. 

영문판(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당시 외부협판 윤치호(1865~1945)의 ‘황무지 개간 계획’이라는 글을 실어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비판하는 여론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은 1904년 6월 한국 주권 침탈의 일환으로 한반도의 전국에 흩어져있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일제는 대장성(재무성) 관리를 지낸 나가모리 도키치로(長森藤吉郎)를 앞세워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50년간 위임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전 국토의 30%나 되는 황무지를 빼앗는다는 야욕을 드러낸 겁니다. 대한매일신보를 비롯, 황성신문 등이 시중의 여론을 주도하자 일제는 ‘황무지 개간 계획’을 철회했습니다.

■영문판 ‘시일야방송대곡’ 보도
대한매일신보의 반일행보는 계속됩니다. 1905년 11월 27일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장지연(1864~1921)의 유명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영문 번역기사를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호외로 발행했습니다.
이런 사건도 있었습니다. 1906년 1월 29일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조목조목 기록한 밀서를 영국 ‘트리뷴’지의 기자인 더글라스 스토리에게 건네주었는데요. 스토리는 이 밀서를 2월8일자로 ‘트리뷴지’에 보도했습니다. 
이 사건인 이후 1년 이상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스토리는 그해(1906년) 12월1일 ‘동양의 미래’라는 기획기사를 쓰면서 다시 이 문제를 다뤘고, ‘밀서’ 사진까지 실었답니다. 대한매일신보도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1907년 1월15~16일자에 ‘스토리 밀서’ 기사를 밀서 사진과 함께 대문짝만 하게 실었습니다. 대한제국 국새가 찍힌 밀서의 골자는 “을사늑약은 한국 황제가 동의하지도, 서명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1월23~24일자에는 논설을 통해 이 밀서를 부정하는 일본과 친일내각의 주장을 비판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인들의 협박으로 이 밀서가 가짜로 규정될 경우 고종의 진심이 허사가 될 것을 우려해서 ‘스토리 밀서’의 진상을 낱낱이 밝힌 겁니다. 이어 1907년 2월부터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관련 논설과 미담은 물론 의연금을 낸 인원의 명단을 대대적으로 실었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영문판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을 영어로 번역하여 게재했다.

■경천사탑 강탈사건을 끝까지 추적보도
뭐니뭐니해도 베델과 대한매일신보의 혁혁한 공은 일본의 장관이 강탈해간 경천사탑을 환수하도록 필봉을 휘둘렀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1907년 2월초 경천사탑이 서있던 경기 풍덕군 부소산 절터에서 벌어졌는데요.
이 탑은 1348년(고려 충목왕 4) 제작된 10층(3단 기단 제외)짜리 대형(13m) 대리석탑이었는데요. 그런데 이때(1907년 2월) 황태자(순종·재위 1907~1910)의 혼례식에 참석한 일본 궁내부 장관인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1843~1939)가 무뢰배들을 동원해서 이 탑을 무단 해체한 뒤 일본으로 반출한 것입니다.
다나카는 “고종이 탑을 기증했다”고 강변했지만 새빨간 거짓이었습니다. 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하며 탑을 140조각으로 뜯어 실어 날랐습니다. 경천사탑 약탈 사건은 바람 앞 등불 같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상징해주는 사건이었죠. 

그러나 베델은 이 꼴을 그냥 보지 않았습니다. 미국 선교사이자 한국어학자, 언론인인 호머 헐버트(1863~1949)와 함께 이 사건을 끝까지 파헤쳤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3월7일 이 천인공노할 뉴스를 특종 보도합니다. 
“일본의 특사 다나카 궁내대신의 흉계로 무기를 가진 일본인들이 경천사탑을 급습하여 탑을 해체한 뒤 실어갔다고 한다.” 
항일운동의 선봉에 서있던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당시 무려 1만3000부를 발행했는데, 이것은 당시 모든 신문 총발행 부수보다 많았답니다. 그런 대한매일신보가 나섰으니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집요했습니다. 6월까지 3개월 동안 추적보도가 이어졌습니다. “고종 황제의 허락을 얻었다는 것은 꾸며낸 말이다”(4월13일) “석탑을 빨리 되돌려보내 잘못을 사죄하라…일본으로선 역사의 무한한 수치가 될 것…”(6월5일)이라는 등 끈질기에 파고 들었습니다. 이 뉴스를 대한매일신보에 제보한 헐버트도 이 문제를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까지 끌고 갔습니다. 
고종의 밀사로 파견된 헐버트는 1907년 7월 헤이그 평화클럽에서 열린 연설에서 일본의 야만성을 거론하며 경천사탑 약탈사건을 거론했습니다. 결국 이 두 분의 끈질긴 문제제기로 이 경천사탑은 1918년 11월15일 약탈한 상태 그대로, 포장도 뜯지 않은채 반환되었답니다. 국내외의 거센 비판여론에 서슬퍼런 일제도 두 손을 들었던 겁니다. 

대한매일신보는 또 친일외교관 더럼 스티븐스(1851~1908)를 처단한 장인환(1876~1930)·전명운(1884~1947) 의거의 상세한 소식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양씨(장인환·전명운)의 피가 아니면 우리의 원통한 것을 세계만국에 공표했을까. 오호라. 한국독립은 곧 오늘이요. 한국 자유는 곧 오늘이니 우리의 큰 뜻을 이룰 날이오….”(1908년 4월17일) 

■일제의 핍박에 37살의 나이에 서거 
이 정도였으니 일제가 얼마나 눈엣가시처럼 생각했겠습니까. 
“일제는 끊임없이 베델을 위협했다. 그의 우편물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검열했고, 그가 거느리는 하인들을 갖가지 구실로 위협하거나 체포했다. 그의 집 주변에는 첩자가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매킨지 기자)  
결국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대한매일신보’ 탄압에 나섭니다. 일본에 우호적인 영국 정부에 “대한매일신보에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외교문제로 부각시킨 겁니다.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에 제개된 몇가지 논설을 번역하여 영국정부에 보냈습니다.
결국 일본과 밀월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은 베델을 법정(영사재판)에 두번(1907·1908)이나 세웠습니다.
이 재판을 지켜본 매킨지 기자는 “이 재판은 영국의 언론자유에 관한 금세대 최악의 타격이었다”고 개탄했습니다. 
결국 베델은 ‘의병 및 스티븐스 처단 기사 등으로 소요를 일으키거나 조장시켜 공안을 해쳤다’는 죄목으로 3개월 금고 등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베델은 중국 상하이(上海)의 영국영사관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는데요. 

출소한 베델은 1908년 7월 17일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강건했던 베델도 급격하게 쇠약해졌습니다.
영국 정부에 의해 자행된 옥살이와 일제의 끊임없는 박해가 그의 심신을 갉아먹었던 겁니다. 결국 1909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했습니다. 베델은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해서 대한의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베델의 관에 태극기와 영국기를 함께 덮었습니다.  

■‘미스터 션샤인’의 의병사진을 남긴 영국인
저는 일제가 대한매일신문의 논조를 문제삼아 영국정부에 제시한 논설·기사 중 ‘의병 관련’ 기사가 눈에 밟혔습니다. 
“한국의 내륙을 목격하고 귀국한 사람의 목격담인데…‘어느 날 저녁 의병 10명을 만났다…의병들은 민족을 구하지 않으면 중도에 죽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일본인들은 약탈하고 능욕하고 살인하고 있었다. 이 강도만도 못한 무리를…. 그들은 왜 그렇게 악하고 미친듯한 정책을 실시하는가….”(대한매일신보 영문판 ‘코리아데일리뉴스’ 1907년 9월24일)  
이 기사에 등장하는 ‘한국의 내륙 상황을 전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1904년 영국 ‘데일리메일’ 극동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프레데릭 아서 매킨지입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의병을 취재하고 사진을 찍은 외국기자의 모델이 바로 매킨지 기자입니다. 그 분의 사진 두장이 유일하게 남은 ‘항일의병의 생생한 진짜 모습’입니다.

■‘의병 봉기 직접 보고싶었다’  
당시 서울에 머물던 매킨지에게 들려오는 지방소식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고종의 폐위와 군대 해산 후 곳곳에서 항일의병이 궐기했다는 소문이 속속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이 대량학살을 자행한다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러·일전쟁 때의 일본군은 군기가 엄정했는데…’
매킨지는 현장취재를 통해 확인하려 길을 떠납니다. 경기 이천~충북 제천·충주~강원 원주을 거쳐 의병이 자주 출몰한다는 경기 양평으로 발길을 돌렸는데요. 취재길에 잿더미가 된 고을과, 주민들의 일관된 ‘일본군 만행’ 증언을 접하며 충격에 빠집니다.
“일본군은 집을 불태우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노인을 쏘아 죽였다. 한 임산부는 해산이 가까워 집에 누워있다가 참변을 당했고…어떤 청년은 불타는 가문의 족보를 구하려다가 일본군이 쏜 총에….”
일본군이 여인들을 능욕했고, 심지어 10살짜리 여자아이에게 총을 쏴 죽였답니다. 특히 일본군은 의병과 격전을 벌인 제천 시내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이 와중에 미처 피하지 못한 남녀와 아이들이 불에 타 죽었답니다.

■의병의 눈초리에서 애국심을 보았다 
매킨지 일행이 양평에서 숙소를 잡았을 때 드디어 의병 5~6명이 나타났습니다.
“준수하고 훤칠한 청년은 구식 군대 제복 입고 있었다. 다른 두사람은 군복 바지, 두사람은 초라한 누더기 한복 차림이었다…여섯 명의 총이 제각기 달랐는데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매킨지는 “희망없는 전쟁에서 이미 죽음이 확실해진 이 사람들이 매우 측은하게만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매킨지는 “의병의 영롱한 눈초리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고 그들의 애국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의병들은 매킨지에게 확고한 의지를 밝혔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매킨지 기자는 의병들과 하룻밤을 지내면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누더기가 된 그들의 옷을 빨아주었습니다. 음식도 먹였습니다.
다음날 의병들은 만날 때의 그 ‘보잘것 없는 장비와 열악한 차림으로’ 열지어 떠났습니다. 
“나는 그들이 떠나기 앞서 우리가 갖고 있던 무기 중에 없어진 것이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내가 데리고 다녔던 사동은 ‘저들에게 우리가 갖고 있는 좋은 총을 주면 어떠냐’고 간청했다.”
의병들이 아무리 처지가 궁하다 해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등의 무례한 짓은 자행하지 않았다는 뜻이죠.   
숙소를 떠난 매킨지 일행은 자갈과 모래가 깔린 강변에서 20여 명의 의병들과 마주쳤는데요.
신식 군대의 제복을 입은 청년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몇 명은 14~16세가 채 안되는 소년들이었답니다.
매킨지는 이 의병들의 사진을 찍었는데요. 이 사진이 역사에 길이 남을, ‘미스터 션샤인’이 모델로 삼은 유일한 의병 사진입니다. 매킨지는 이 의병들의 활동상과 일제의 잔학상을 담은 책(<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을 발간하는 등 한국의 독립을 지원했죠. 

■“대영의 열혈남아가 조선의 어둠을 밝혔네”
어떻습니까. 매킨지와 베델이 없었다면 우리는 1907년 고종 폐위와 군대해산 후 들불처럼 일어났던 항일의병의 생생한 장면을 증거하지 못했을 겁니다. 영국 출신 독립투사 가운데 조지 루이스 쇼(애족장)는 1919년 5월경부터 중국 평톈성(奉天省) 안둥현(安東)에서 자신이 경영하던 이륭양행을 운영하며,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신변 안전과 활동을 지원한 분이구요.
프레데릭 브라운 해리스는 1942년 임시정부가 미국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했을 때 미국 국무장관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의 상황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한 분입니다. 진정한 영국신사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델 선생이 서거한 뒤 박은식·양기탁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답니다.
“구주(유럽)의 열혈남아가 조선의 어둠을 씻어냈네.”(박은식) “대영(영국) 남자가 대한에 와서 캄캄한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양기탁)(이 기사의 사진은 ‘빅카인즈 고신문 아카이브’와 독립기념관, 국립중앙도서관, 국립고궁박물관, 국가보훈처 소장자료에서 다운로드 받았고, 정진석 외국어대 명예교수의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서울갤러리·1987)에서 캡처했습니다. 이문영 국가보훈처 사무관도 사진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프레데릭 매킨지, <대한제국의 비극>, 신복룡 역주, 정문당, 1999 
프레데릭 매킨지, <한국의 독립운동>, 신복룡 역주, 집문당, 1999 
정진석,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하여 한국동포를 구하라>, 기파랑, 2013
정진석,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서울갤러리,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