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말곡 논 7결(?), 둑 위 1결, 구미곡 3결, 둑 아래 40부, 하지시곡 논 2결, 구리곡 ○부, 곡문미진 상급의 밭(上田)….’ 지난해 12월 초 경산 소월리 유적의 구덩이에서 수수께끼와 같은 유물들이 나왔다.
3면을 사람 얼굴 모양으로 뚫은 토기 항아리와 함께 의도적으로 바닥을 제거한 시루가 보였다. 시루와 사람 모양 항아리를 맞춰보니 꼭 들어 맞았다. 관심의 초점이 된 유물들이 더 나왔다. 바로 5~6면에 알쏭달쏭한 글씨를 잔뜩 새겨놓은 목간과 싸리나무 다발과 자귀로 추정되는 목제유물이었다. 목간은 다발 및 자귀 아래에서 나란히 늘어선 형태로 발견됐다.
1차 판독과 달리 2차판독에서 E면 판독이 많이 바뀌었다. ‘답중삼결(畓中三結·논 중 3결)’이 ‘답십삼결(畓十三結·논 13결)’로, 판독불가였던 글자 중 두 자는 ‘삼결(三結)’로, ‘심심 사사(心心四四)’는 ‘사사 사사(四四四四)’로 새롭게 읽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사람 모양 토기항아리와 시루, 명문 목간과 싸릿대 등이 출토된 구덩이는 과연 무엇일까. 명문 목간에는 무슨 내용이 들어있을까. 지름 1.6m의 구덩이가 관심의 초점이 됐다. 연구자들은 대체로 제사행위를 펼치고 토기와 목간, 싸릿대 등을 매납한 구덩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목은 길이 74.2㎝, 직경 4.3~2.8㎝인 막대형 명문 목간으로 쏠렸다. 목간 위쪽은 자연 파손됐고, 아래쪽은 끈을 묶기 위한 용도로 판 홈이 둘러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끈을 묶기 위한 홈’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물품 꼬리표의 역할을 하는 흔적으로 알려져있다. 그래서 애초에는 물품꼬리표로 사용된 목간에 싸릿대가 묶여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그런데 막상 판독된 글자는 심상치 않았다. 답(畓), 전(田), 삼(三), 제(堤)와 같은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단순한 물품꼬리표가 아니라 둑(堤)과 논밭(田畓) 등 토지와 관련된 글자들이었다.
연구자들이 모인 1차 판독에서 읽은 글자는 약 94자였다. 특히 판독에서 확인된 결(結)과 부(負)자는 목간의 성격을 분명하게 해주었다. 결과 부, 즉 결부는 신라 고유의 토지 면적 단위이기 때문이다. 1차 판독자들은 이 목간을 6세기 경산 인근 지역의 토지현황을 기록한 ‘토지 관리 문서’로 추정됐다.
‘결(結)’과 ‘부(負)’는 토지의 넓이가 아니라 수확량을 기준으로 계산하는 신라 특유의 토지 면적 단위이다. 따라서 토지의 수확량에 따라 면적이 달라지기 때문에 1결의 면적은 일정하지 않다. 굳이 추정한다면 1결은 대략 15,447.5㎡(4700평) 정도였던 것으로 계산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결’의 100분의 1인 ‘부(負)’는 글자 그대로 사람이 등에 지는 1짐을 의미하는 단위이다.
1차 판독회에 참여한 연구자 중에는 경산 인근에 둑(堤)을 쌓아 조성한 저수지의 혜택을 입은 고을 단위로 이익분담금을 낸 결과를 ‘결’과 ‘부’라는 토지단위로 계산한 문서로 해석한 이가 있었다. 어떤 경우든 결부제의 가장 확실한 1차 자료인 신라촌락문서(695년설)보다 최소한 150년 앞서서 ‘결’과 ‘부’라는 면적단위를 썼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라는 평가도 나왔다.
한국목간학회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함께 18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2019년 새롭게 출토된 동아시아 목간’을 주제로 33회 정기발표회를 열고 이 자리에서 출토된 지 한 달 보름 쯤 지난 경산 소월리 출토 목간을 검토했다. 전경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은 발표문(‘경산 소월리 목간의 기초적 검토’)에서 2차 판독회(1월2일)을 통해 연구자들이 새롭게 읽어낸 몇 자를 소개하고 유물과 유구의 성격을 정리했다.
전경효 주무관은 “1차 판독에서 ‘답중삼결(沓中三結·논 중 3결)’로 읽었던 것을 ‘답십삼결(畓十三結·논 13결)’로, 판독불가였던 글자 중 두 자를 ‘삼결(三結)’로, 연습글자로 추정된 ‘심심사사(心心四四)’는 ‘사사사사(四四四四)’로 고쳤거나 새롭게 읽었다”고 밝혔다. 또 당초 6면으로 알려진 목간 면은 5면으로 정리됐다. 그리고 각 면의 위 아래 쪽에 글자의 흔적이 더 보였다.
2차 판독회에도 참여한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출토 당시의 목간 적외선 사진을 보니 1차 판독에서는 보이지 않던 글자들이 더 보였다”면서 “목간의 내용과 관련해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1·2차 판독에서 밝혀진 명문의 얼개는 고을 단위로 부과할 세금을 할당하기 위한 기초자료라는 것이다.
실제 명문을 보면 ‘감말곡 마을 논 7결(?)’, ‘둑 위(堤上)의 땅 1결’, ‘구미곡 마을 3결’, ‘둑 아래(堤下) 땅 40부’, ‘하지시곡 마을 논 2결’, ‘구리곡 마을 ○부’, ‘곡문미진 마을 상급의 밭(上田)’ 등으로 되어 있다.
‘지명+토지종류+토지면적’ 등 나름의 규칙으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명은 ‘감말곡’과 ‘구미곡’, ‘구리곡’, ‘하지시곡’, ‘곡문미진’ 등이다. 토지종류로는 답(畓)과 전(田)이 보이고, 그 면적으로는 결(結)과 부(負)를 썼다. 이밖에 제방(堤)의 아래 위쪽 토지를 일컫는 ‘제하(堤下)’와 ‘제상(堤上)’, 비옥도에 따라 수확량이 좋고 나쁜 토지를 구분한 ‘상전(上田)’과 ‘하전(下田)’이 보인다.
이중 마을 단위를 가리키는 ‘곡(谷)’ 자는 삼국시대 문헌기록과 금석문 기록에서 국명과 지명, 인명으로 사용된 바 있다. 예컨대 실직곡국(강원 삼척시에 존재한 소국)은 나라명으로, 우곡(전남 곡성 인근), 오대곡, 동해곡, 해곡, 우명곡, 양곡 등은 지명으로, 득오곡 등은 인명으로 각각 쓰였다.
2차로 읽은 경산 소월리 출토 목간의 적외선 사진. 1차 판독에서 ‘답중삼결(畓中三結·논 중 3결)’로 읽었던 것을 ‘답십삼결(畓十三結·논 13결)’로, 판독불가였던 글자 중 두 자를 ‘삼결(三結)’로, 연습글자로 추정된 ‘심심사사(心心四四)’는 ‘사사사사(四四四四)’로 고쳤거나 새롭게 읽었다. 또 당초 6면으로 알려진 목간 면은 5면으로 정리됐고, 각 면의 위 아래 쪽에 글자의 흔적이 더 보였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번에 확인된 명문 목간에 등장하는 ‘감말곡’ 등은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곡’이라는 행정단위는 단순한 자연지명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경우 동해곡 또는 해곡에 태수가 파견됐고, 양곡에는 광개토대왕의 능을 지키는 수묘인이 차출된 바 있다. 신라의 경우 551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비를 보면 지방관이 파견된 ‘오대곡’을 중심으로 노동력을 동원한 사실이 나와있다.
전경효 주무관은 “이번에 출토된 명문목간도 곡 단위로 토지면적이 집계되고 있다”면서 “신라가 세금 할당을 위해 작성한 기초자료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저수지 축조에 따라 이 정도의 세금을 마을 단위로 할당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또 조세를 거둘 때 파악한 것은 전(田·밭)과 답(畓·논)의 면적이었다.
경산 소월리에서 목간을 수습중인 발굴단원. 목간은 사람얼굴 모양 토기와 시루, 싸릿대와 함께 출토됐다.|화랑문화재연구소 제공
답(畓)은 논을 뜻하는 수전(水田)을 요즘의 인터넷 축약어처럼 합친 신라 고유의 단어다. 이런 ‘답(畓)’자는 561년 세워진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에서 등장한다. 따라서 이 명문목간의 연대 역시 최소한 561년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목간에 등장하는 둑(堤)는 언제 세웠을까. 신라에서 둑을 세운 시점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은 “429년(눌지왕 13년) 시제(矢堤)를 새롭게 쌓았다”고 기록했다. 이로 미루어 신라의 경우 이미 5세기 전반이면 둑을 쌓아 저수지를 확보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청제(菁堤)라는 제방을 쌓은 기록인 영천<청제비>(536년)와 영동리촌의 저수지 축조기록인 대구 <무술오작비>(578년) 등이 있다. 목간이 확인된 소월리 유적은 금호강의 지류인 청통천 주변에 형성된 넓은 평야를 조망할 수 있는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경산 소월리에서 목간을 수습중인 발굴단원. 목간은 사람얼굴 모양 토기와 시루, 싸릿대와 함께 출토됐다.|화랑문화재연구소 제공
이러한 수리시설 확보는 신라 중앙정부의 관심사였다. 531년(법흥왕 18년) 법흥왕이 중앙관청에 저수지 축조를 명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전경효 주무관은 “수리시설을 통해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전답을 확보하고 이렇게 확보한 전답을 통해 수확량과 토지이용률을 향상시켜 중앙정부의 재정을 안정적으로 늘렸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주보돈 교수는 “바로 저수지를 쌓아 마련한 전답을 토대로 세금을 걷기 위한 기초자료를 얻기위해 목간에 기록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주교수는 또한 “목간이 쓰레기 더미가 아니라 제사 구덩이에서 사람 모양 토기 및 시루 등과 함께 출토된 점도 착안거리”라면서 “제사를 지내면서 왜 세금할당량을 기록한 문서(목간)를 매납했는지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소월리 제사구덩이에서 명문 목간과 시루, 사람 얼굴 모양 토기 항아리와 함께 출토된 싸릿대 또한 어려 추측을 낳게 한다. 일각에서는 목간 밑쪽에 글자연습을 한 흔적이라는 ‘제제제(堤堤堤)’와 ‘사사사사(四四四四)’ 글자와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즉 세금할당용으로 쓰였던 목간이 용도폐기되어 글자연습용으로 1차 활용됐고, 그 뒤 다시 싸리비로 재활용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싸릿대가 함께 출토된 것에 착안한 해석이다. 그러나 신성한 제사를 올리고 싸리비를 매납했다는 것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경효 주무관은 “글자를 기재한 형태가 정연하지 않고 줄 구분도 쉽지 않으며, 연습한 흔적도 보이는 등 즉흥적으로 쓴 목간일 수도 있다”면서 “아마도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실제 현장을 둘러보면서 업무용 수첩처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무덤에 자신이 품에 두고 늘상 적어두었던 업무용 수첩을 매납했다는 얘기인가.
이용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소월리 목간의 해석은 이제 첫발을 내딛은 것에 불과하다”면서 “글자를 더 판독해야 함은 물론이고 비석의 문맥 또한 더 밝혀내야 전체적인 내용이 파악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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