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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3000년전 청동기 나라 고인돌 48기, 해체 철거후 '잡석'으로 취급됐다

최근 문화유산과 관련해서 모종의 사건이 터졌죠.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2006년 김해 구산동 택지개발사업을 벌이던 중에 윗돌의 무게가 350t이나 되는 고인돌을 확인하죠. 김해시가 급기야 2020년 예산 16억여원을 확보, 고인돌 정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적(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염두에 두고 정비계획을 세운겁니다.

■의욕과잉과 무지의 소치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고인돌을 제대로 복원하겠다면서 박석을 빼내어 세척하고 강화처리 후 다시 박아넣었다는 겁니다.  ‘박석(薄石)’은 ‘얇고 넓적한 돌’입니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무덤의 묘역을 표시하려고 이런 돌을 깔아놓은 겁니다. 
이 박석 밑에는 문화유물이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구산동 고인돌’은 도(경남) 지정문화재여서 유적 및 유구에 손을 대려면 경남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김해시가 ‘박석은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정비계획을 승인한 도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무시하고 박석을 들어낸 겁니다. ‘매장문화재법’ 31조 2항은 “매장문화재 유존지역 내에서 현상을 변경할 경우에는 별도의 문화재 보호대책 수립과 그에 따른 조사를 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이를 어기면 10년 이하의 징역과 1억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습니다. 
이에 문화재청 산하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현장조사를 벌였는데요. 김해시가 당초 수작업으로 돌을 빼냈다고 해명했지만 중장비까지 동원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이번 사건을 정리해볼까요. 예산을 확보한 김해시가 유적공원 정비계획을 밀어붙이다가 빚은 참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의욕과잉과 무지의 소치라 할 수 있습니다.

춘천 중도에서 확인된 한가운데 시신을 안치한 돌널무덤을 설치하고 고인돌. 많은 돌을 이용해서 원형 혹은 장방형의 묘역을 조성하고, 무덤 위에 상석을 올린, 상당히 ‘소박한’ 고인돌이다.

■‘중도식 토기’의 발견
그러나 이번 사건은 제가 언급할 ‘참사’에 견주면 새발의 피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5월에 레고랜드가 들어선 춘천 중도 유적입니다. 레고랜드는 블록장난감(레고)를 주제로 한 이른바 테마파크인데요.
강원도가 1984년부터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면서 사유지 매입을 완료했구요. 
마침내 2011년 영국 멀린사와 함께 레고랜드 테마파크 조성을 확정지었구요. 
그러나 사실은 이곳에 테마파크니 뭐니 하는 놀이동산을 짓겠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계획이었습니다.

왜냐면 중도와 그 주변은 예부터 북한강과 소양강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가 쌓여 이뤄진 비옥한 충적대지였습니다. 
농사를 짓기 시작했던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자취가 남아있습니다. 지금의 중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는데, 의암댐 건설(1967년)로 수몰되고 남은 땅이 섬으로 변한 겁니다. 그리고 댐 때문에 호수의 수위변동이 심해 강변 쪽은 물줄기가 급격히 변하는 바람에 급속도로 깎기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1977년 중도 지표조사에 나선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이 그렇게 3m 정도 깎여나간 지층에서 심상치않은 유물을 확인했는데요. 무늬가 없는 단단한 토기, 즉 경질무문토기 조각들이 무수히 박혀있었던 겁니다. 

이런 경질 무문토기들은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후 1980년대 국립박물관의 주거지 후속 발굴에서도 계속 출토되었습니다. 
이 때 확인된 경질무문토기는 ‘중도식 토기’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중도에서 ‘안정적으로’ 확인된 원삼국시대(기원 전후~3세기 사이의 고고학 시대구분)의 표지유물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죠. 
그런데 이때가 첫번째 실기(失機)라 할 수 있는데요. 첫 지표조사 이후 중요한 청동기 시대 표지유물이 나온 곳을 ‘사적’과 같은 국가지정문화재로 묶어야 하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겁니다.  

■유구 3000여기, 유물 8000여점의 보고
그후 30여년이 지난 2010년대 레고랜드 테마 파크 조성 때 기어코 일이 터집니다.
사업추진을 위해 시행된 2013년 1단계 발굴조사에서 청동기 시대를 중심으로 무려 1400여기의 유구가 쏟아져 나온겁니다.  고인돌 101기, 집터 917기, 구덩이 355기, 바닥 높은 집터 9기와, 마을을 지키는 긴 도랑(환호) 등…. 
집자리에서 ‘둥근 바닥 바리 모양토기’(원저심발형토기)와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가 확인됐는데요. 이것은 이 유적이 조기 청동기시대(기원전 14~12세기)임을 알려주는 표지유물들이죠. 

고조선 시대의 대표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청동도끼 등도 출토됐습니다. 남한지역 집터에서 처음 확인되는 유물이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둘레 404m의 도랑(환호·環濠)과 함께 농사를 지었음을 알려주는 경작 유구까지 확인됐습니다.
조사가 끝난 2017년까지 7개 기관이 구역을 맡아 진행한 발굴의 성과는 놀라웠습니다. 
신석기시대 유구 8기와, 청동기시대 환호(마을 방어용 도랑)·집터·구덩이·무덤 등 2205기, 철기(초기 삼국) 유구 772기, 삼국 및 삼국시대 이후 무덤 및 경작유구 등 65기, 고려~조선시대 유구 등 20기, 시대미상 20기 등…. 모두 3091기의 유구가 조사되었습니다. 출토 유물도 8028건(8079점)에 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도 유적의 ‘시그니처’는 다양한 형태로 줄지어있는 고인돌이었습니다.
중도의 고인돌은 흔히 알려진 규모의 탁자식(북방식)이나 바둑판식(남방식)은 아닙니다.

많은 돌을 이용해서 원형 혹은 장방형의 묘역을 조성하고, 그 한가운데 시신을 안치한 돌널무덤을 설치하고 윗돌을 올린, 상당히 ‘소박한’ 고인돌이었습니다.
지하의 무덤방 위를 바로 뚜껑으로 덮는다 해서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라 이름 짓기도 합니다. 사실 한반도에서 확인되는 고인돌(약 4만기) 중 90% 정도가 탁자식이나 바둑판식이 아니라 중도에서 발견된 것 같은 고인돌이거든요. 

큰 규모의 탁자식·바둑판식 고인돌은 고을의 최상위 지도자 무덤 혹은 제사용이거나, ‘랜드마크’ 같은 마을의 상징물일 가능성이 짙습니다. 중도에서 확인된 ‘소박한’ 고인돌은 어떨까요.

역시 나름 이 마을에서 행세깨나 했던 가문의 무덤일 수 있어요.
어떻든간에 실제 시신을 묻고 장례를 치른 실용적이면서 대중적인 무덤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중도 고인돌의 배열을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마을 안에 3열로 40여기가 200m 정도 길게 조성된 고인돌군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5~6세의 어린아이가 구부린 자세로 묻힌 작은 고인돌도 보였습니다. 

2013~2017년 레고랜드 조성을 위한 사전 발굴조사에서 총 3091기의 유구가 확인됐고, 유물만 8025건, 8079점이 출토되었다. 조사된 집터 1300여기 중 3분의 2정도가 청동기 중기(기원전 9~6세기)로 편년된다. 1가구당 5~6명 살았다고 치면 4500~5500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히 청동기나라 도성급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청동기 시대 아파트 평형
발굴된 집터도 재미있는데요. 그 중 기원전 14~12세기쯤 조성된 집터는 26평(86.5㎡)에 달했습니다. 126㎡(38평)과 154㎡(47평) 짜리 집터도 보였는데요. 25~26평, 38평형, 47~48평형 등은 요즘도 기준으로 삼는 아파트의 평형이잖아요. 
26평형 집의 한가운데에 집안을 따뜻하게 해준 화덕 자리가 보였는데요.

4줄로 연결된 통나무가 불에 탄 그 형태 그대로 무너져 있더라구요. 벽체 혹은 천장이 불에 타면서 폭삭 붕괴되었다는 얘기죠. 그렇게 무너진채 3400~3200년간 보존된 셈이죠.
불에 탄 집터에서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유구들도 있었는데요. 재미있는 해석이 있더라구요. 이 집 주인이 이사하면서 이삿짐을 다 옮긴 뒤 옛집을 불에 태우는 이벤트를 벌인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겁니다.

레고랜드 예정부지에서 청동기 유구가 쏟아지자 ‘개발과 보존 및 활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이에 따라 청동기 시대 환호(도랑) 지역 6만1500㎡와 철기~삼국시대 유적 3만2000㎡만 보존키로 했다.

또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신석기(기원전 27~21세기)에서 조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13세기)로 넘어가는 500~600년과, 기원전 11~9세기 사이의 200~300년이 공백기로 남는다는 겁니다. 반면 중도의 건너편인 현암리와 천전리·신매리에서는 그런 공백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생겼기에 중도 주민들이 보따리를 싸서 주변 마을로 이사한 걸까요.
또 조사된 집터(1287기) 중 3분의 2정도가 청동기 중기(기원전 9~6세기)로 편년되는데요.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는 “1가구당 5~6명 살았다고 치면 4500~5500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렇다면 중도는 ‘청동기 나라의 도성’을 방불케하는 유적인 셈이죠. 
중도를 발굴한 7개 발굴조사기관은 2017년에 펴낸 약식조사보고서에서 ‘중도유적=한국고고학 역사상 청동기 시대 최대의 마을유적’이라 규정했습니다.

■플라스틱 장난감 공원 조성계획
이 정도면 레고랜드 유치계획을 초기단계에서 바꿔야 하는 것 아니었나요. 서양의 플라스틱 놀이공원 말고, 세계적인 청동기 유적공원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레고랜드를 유치한 당시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물론이구요. 2013년 7월 중도를 방문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레고랜드 사업을 ‘5대 현장대기 프로젝트 지원사업’으로 독려했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개발계획을 밀어붙인 겁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논리가 등장했습니다. ‘보존과 활용’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 ‘윈윈 전략’을 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작정 보존만 외칠 게 아니라 활용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한거죠.   
이런 논리에 따라 중도(127만㎡) 안에서 조사된 유구 중 청동기 시대 환호(도랑) 지역 6만1500㎡와 철기~원삼국시대 유적 3만2000㎡만 보존키로 했습니다. 사업을 담당한 강원 중도 개발공사는 레고랜드 안에 청동기 및 원삼국 유적공원을 조성, 조사된 유구들을 옮겨 보존·전시하는 별도의 전시관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었을까요.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엄청난 규모의 집자리와 경작유구 등은 매립·복토됐구요. 고인돌(지석묘) 150기 중 100여기도 역시 흙으로 덮어버렸는데요. 이걸 복토라고 하고요. 
건물과 같은 시설물을 어쩔 수 없이 조성할 수밖에 없을 때 불가피하게 마련하는 보존대책인데요. 
유구가 확인된 곳에 충분히 흙을 덮은 뒤 그 위에 시설물을 조성하는 방식이죠. 
그러나 레고랜드의 경우는 어떨까요. 결과적으로는 3500~3000년전 청동기시대 고인돌 위에 서양의 플라스틱 놀이공원을 조성한 셈이니까요. 청동기 유적 위에 플라스틱 놀이공원을 반드시 조성해야 하는 불가피한 시설인지 논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고인돌은 잡석?
더 큰 문제는 이전 복원, 혹은 이전 전시 하겠다면서 일단 해체해버린 고인돌 48기(이전 복원 대상 36기, 이전 전시 대상 12기)입니다. 철거한 48기의 고인돌은 ‘잡석’이라는 이름을 붙여 비닐하우스에 야적해놓았는데요. 
그것도 8년째 임시보관되어 있다니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하기야 돌이 고인돌(지석묘)로 조성되었을 때나 청동기 시대의 중요한 유구이지, 해체되는 그 순간부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석’이 되고 말죠. 유적 유구는 원래의 자리에서 보존되어야 고고학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은 상식에 속하니까요.  

그래서 ‘잡석’으로 취급한걸까요. 정리해보면 멀게는 기원전 2500년부터 가깝게는 조선시대까지 4000년 동안 이어진 중도 유적을 까부수고(발굴 자체가 훼손이니까) 그 위에 플라스틱 놀이공원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죠. 그것도 확인된 3000여기의 유구 가운데 유적공원으로 이전 복원되는 것은 100분의 1도 안되는 고인돌 36기 정도밖에 안됩니다. 
그것도 기가 찬데 레고랜드가 정식개장(5월5일) 되었는데, 유적공원 및 전시관 조성, 유적 이전 보전 계획은 어찌 되었습니까.  공사비가 부족하네, 뭐네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는 상황이랍니다. 이제 상황 끝인데, 답답할게 없다는 이야기일까요. 
하기야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사이 고인돌은 비닐하우스 안에 ‘잡석’이라는 이름으로 놓여있을 수밖에 없겠죠.

해체된 고인돌 48기는 ‘잡석 취급’을 받은채 8년째 비닐하우스에서 임시보관되고 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그럼 상황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고고학계는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1970~80년대 이른바 ‘중도식 토기’를 발굴해놓고도 문화재 지정없이 넘긴 국립박물관을 비롯한 당시 학계에 원죄를 묻고 싶고요. 
그와 함께 청동기 유구가 쏟아져 나온 레고랜드 사업 초기(2013년)에 전체 보전 결정을 내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이와 관련해서 2000년 초 풍납토성과 경주 경마장의 현지보존 조치를 내릴 때 문화재위원회 전체 회의를 주재하던 당시 최영희 문화재위원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때립니다. 그때 문화재위원들의 결기란….  

1980년대 공단조성이 예정되었던 일본의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 이곳에서 야요이(彌生) 시대(기원전 3~기원후 3세기)의 유구 3000여기가 확인됐다. 해당 지자체는 “이미 수천억원이 투입되었으니 개발을 멈출 수는 없다”면서 공사를 강행했다. 그러나 시민단체와 언론이 나섰고, 일본 문화청까지 호응하자 지자체도 공단조성을 포기하고 유적의 전면 보존 및 복원을 결정했다.

초기에 다잡지 않았으니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합니다. 강원도와 정부가 적극 나선 사업이고, 또한 수천억원이 투입되는 판이니 중간에 ‘전면 보존 결정’이라는 제동을 걸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업을 추진한 강원도 관계자는 “모든 사업 과정은 일일이 문화재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진행됐다”고 강조했는데요. 그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학계 연구자들이 결과적으로는 레고랜드 사업의 방관자 내지는 조력자가 된 겁니다. 어떤 경우든간에 3000여기의 유구가 쏟아진 유적을 개발하도록 한 것은 고고학계의 수치라는 말이 나옵니다.
필자와 같은 언론의 책임도 피할 수 없습니다. 저도 관련 기사를 한 두번 썼는데요. 그러나 강원도와 정부는 물론이고, 여기에 학계까지 미온적이니 ‘달걀로 바위치기’의 느낌이 들더군요. 그러니 전의를 상실하게 되구요.
물론 모두 가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풍납토성 보존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형구 교수 등이 적극 나섰는데요. 

■일본 요시노가리와 중국 뉴허량 유적의 모범사례
그런 이교수가 전범으로 삼은 해외 유적이 둘 있더라구요. 하나는 일본의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입니다. 이 유적은 일본 규슈(九州) 북부지역인 사가현(佐賀縣) 간사키(神岐)에서 확인된 유적인데요. 이곳이 워낙 낙후지역이어서 공업 단지 조성 공사가 계획됐는데요. 그런데 발굴 결과 독무덤 등 야요이(彌生) 시대(기원전 3~기원후 3세기)의 유구 3000여 기가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사가현 관계자들은 “특별한 유적이지만 개발을 멈출 수는 없다”는 판단 아래 공사를 강행하려 했는데요. 하지만 시민단체가 일어났고, 언론이 나섰으며, 일본 문화청까지 호응하자 “이미 수천억원이 투입됐다”고 반대하던 사가현도 입장을 바꿨습니다. 공단조성을 포기하고 유적의 전면 보존 및 복원을 결정한겁니다. 불과 며칠 뒤면 불도저로 파괴될 운명이었던

불법으로 훼손된 김해 구산동 고인돌. 반면 춘천 중도 유적은 합법적으로 복토되었고, 결과적으로 훼손되는 참사를 빚었다.

요시노가리 유적은 극적으로 보전됐습니다. 요시노가리는 이로써 한해 70만명이 찾아오는 대표적인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이 되었습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신석기 유적인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시(朝陽市)의 뉴허량(牛河梁)은 훙산문화(紅山文化·기원전 4500~3000년) 시기의 석관묘, 석곽묘, 적석총, 적석 제단 등으로 구성된 유적인데요. 중국정부가 2013년부터 1700억원이라는 예산을 들여 대형 유리 돔(Dome)을 씌운 유적 보존관을 완공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저는 김해 구산동 현장 사진에서 보이는 중장비를 보면서 춘천 중도 유적에 나타난 중장비를 떠올렸습니다.
불법으로 손을 댄 구산동의 사례도 물론 잘못된 일이죠. 그러나 멀쩡한 고인돌을 ‘잡석’으로 처리해버린 춘천 중도의 일은 괜찮다는 겁니까. 법을 다 지켰다는 이유로요? 저라도 머리를 박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