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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고령 만취 운전'으로 사망한 조선의 개국원로공신

“남양백 홍영통이 임금의 탄일에 만취해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1395년(태조 4년) 10월11일 <태조실록>의 기사다. 기사의 주인공 홍영통(?~1395)은 여말선초의 문신이다. 고려말 공민왕(재위 1351~1374) 연간에 신돈(?~1371)에 의해 감찰대부와 밀직부사를 지냈지만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 주살된 신돈의 당여(같은 패)로 몰려 파직유배됐다. 그러나 <고려사절요>나 <동사강목>은 신돈이 정적을 죽이려 할 때 입도 벙긋 못하고 수수방관하던 다른 이들과 달리 ‘죽이면 안된다’고 직언함으로써 여러 사람을 살린 인물로 표현된다. 

혜원 신윤복의 <유곽쟁웅>. 유흥업소 기생을 차지하기 위한 남성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갓과 양태가 벗어지도록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가운데 웃통 벗고 있는 수염난 이가 승리자이다. 싸움에서 진 이가 씩씩 거리고 있다.|간송미술관 소장

예컨대 신돈은 1367년과 68년 자신을 제거하려다가 미수에 그쳐 유배당한 정적들을 아예 모조리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때 홍영통이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인들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불교의 인과응보가 두렵지 않으냐. 생각을 바꿔라”고 서술퍼런 신돈에게 쓴소리를 던졌다. 신돈은 이 홍영통의 충고를 듣고 처단의 명을 거두었다. 

이 덕분에 신돈이 주살되었음에도 홍영통은 처형을 면하고 유배형에 그쳤다. 홍영통은 조선이 개국된 1년 후 ‘개국의 공이 많은 원로’라는 이유로 다른 126명과 함께 포상의 대상자가 되어 ‘남양백’의 관작까지 받았다.


■고령에 만취승마까지

그러나 홍영통의 최후는 너무도 허무했다. 

임금(태조 이성계)의 환갑잔치에 참석한 홍영통은 만취되어 말을 타고 돌아오다가 그만 말이 놀라는 바람에 떨어져 사망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홍영통의 부음을 들은 태조는 사람을 보내 치제(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던 일)하고 담당관청에게 “성심을 다해 장례를 치르라”는 명을 내렸다.  

“홍영통은…천성이 순박하고 조심스러워 늘 상식을 좇아 여러차례 대우를 받았다. (홍영통이 말 사고로 죽자) 태조는 예장(禮葬)을 명했다…홍영통에게는 아들이 없다.”

일련의 실록 기사는 대체 무엇인가. 홍영통의 출생연도는 나와있지 않다. 다만 홍영통이 1365년(공민왕 14년) 감찰대부가 되었다는 <고려사절요>의 기사나 조선개국 후인 1392년(태조 1년) 1325년생인 배극렴(1325~1395)·안종원(1325~1394) 등과 함께 관직을 제수받았다는 기사, 그리고 1년 뒤인 1393년 다시 안종원과 함께 원로대접을 받아 개국공신의 포상을 받았다는 기사로 미루어보면 1320년대생일 가능성이 짙다.  

홍영통은 지금으로 치면 ‘만취운전’에 해당되는 ‘음주승마’로 죽었으며, 그 당시의 나이가 75살 전후였을 가능성이 짙다. 그렇다면 홍영통은 요즘의 음주에 고령운전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얘기가 된다.

시체를 묻은 뒤에 혼백과 신주(神主)를 모시고 돌아오는 작은 가마를 요여라 한다. 그러나 조선 개국초인 1395년(태조 4년) 태조가 “술을 마시면 제발 말을 타지말고 가마에 타서 귀가하라”는 뜻으로 원로·재상들에게 요여를 하사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사진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4 ~ 1488)의 요여로 추정되는 가마라 한다.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 13호이다.  

■원로·재상들에게 가마 1대씩 하사한 임금

그런데 홍영통이 죽은 지 3일 뒤 태조 임금은 자못 흥미로운 지시를 내린다. 

“좌정승 조준(1346~1405), 우정승 김사형(1341~1407), 판문하부사 권중화(1322~1408), 판삼사사 정도전(1342~1398)에게 대나무(竹)로 만든 작은 가마(요여·腰輿) 한대씩 내려주었다. 다른 기로제신(耆老諸臣·60세를 넘긴 원로)에게도 주었다. 홍영통이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경계한 것이다.”(<태조실록> 1395년10월14일자)

무슨 지시일까. 태조는 원로대신인 홍영통이 이른바 고령에 음주승마 사고로 죽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조정의 고위층은 물론 다른 원로대신들에게도 술을 마신 뒤에는 직접 말을 몰지말고 가마꾼이 ‘모는’ 가마를 타고 귀가하라고 신신당부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임금이 대신들에게 “제발 음주승마 하지말라”면서 승용차 한대씩 선물했다는 얘기다.


■음주낙마는 시마(詩魔)와 주광(酒狂) 탓?

생각해보면 요즘의 승용차격인 말을 탔던 조선시대에 이른바 음주승마 사건은 심심찮게 일어났을 것이다.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이조판서·형조판서·우참찬·좌참찬 등 요직을 거친 이승소(1422~1484)의 시도 음주승마에 따른 낙마의 경험을 전하고 있다.

“대취하여 오던 중에 낙마하여 몸 상하니(大醉歸來墜馬傷) 밤새도록 끙끙대며 침상 위에 누워 있네.(終宵呻叫臥匡床) 베갯머리 맑은 눈물 어버이가 그리운데(枕邊淸淚思親苦) 바람벽 붉은 등은 긴 불꽃을 토하누나.(壁上紅燈吐焰長)…어느 누가 있어 내게 의술과 약 빌려주어(何人乞我刀圭藥) 시마에다 주광을 다 치료하게 하려는가.(醫得詩魔與酒狂)”(<삼탄집> ‘연기객사’)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이승소가 음주낙마 뒤에 입은 부상 때문에 충청도 연기 객사에서 끙끙 앓았다는 경험을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승소는 음주낙마의 원인을 ‘시마(詩魔)에 주광(酒狂)’ 탓이라 돌리고 있다. ‘시마’와 ‘주광’은 시 짓기를 좋아하고(시마), 술을 좋아하는(주광) 성벽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승소는 음주 낙마 사고의 원인이 ‘시마와 주광’인데, 이 병을 누가 고칠 수 있겠냐고 되묻고 있다. 이승소는 시적인 표현으로 자신이 ‘풍류남아’임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다. 

‘음주 운전’ 사고를 ‘살인’ 행위로까지 단죄하는 요즘 같은 세태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들이다. 임금이 직접 나서 조정차원에서 ‘고령 음주 승마’ 사고로 죽은 관리의 장례까지 주관하고, ‘음주낙마에 숙취의 경험’을 풍류의 후유증 쯤으로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 상나라 시대 무덤인 부호묘에서 발견된 고. 고는 원래 술 2잔 정도를 담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술잔이다. 술을 적당히 마시라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공자가 ‘고불고 고재! 고재!’라 외친 까닭

‘고불고 고재고재(고不고 고哉! 고哉!)’라는 유명한 ‘공자왈’이 있다. ‘모난 술잔이 모가 없으면 모난 술잔이겠는가! 모난 술잔이겠는가!’(<논어> ‘옹야 23장’)라는 뜻이다. 임금과 신하가 각자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 안타까운 세태를 개탄한 ‘공자왈’이라고 하지만, ‘술주정’을 경계한 ‘공자왈’이라는 해석도 있다.

하기야 공자는 <논어>에서 “술에 일정한 양이 없었으나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고 했다. 공자는 주량을 알 수 없었지만 정신이 늘 멀쩡할 정도로만 술을 마셨음을 알 수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역시 ‘공자왈’을 “고라는 술잔을 사용하면서도 주량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어찌 고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해석했다. 청나라 시대 고전학자인 모기령(1623~1713)도 “공자의 ‘고불고’는 술주정을 경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술그릇의 이름인 ‘고(고)’는 ‘두 되 정도 담을 적은 양의 술잔’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술 마시는 양을 두고 ‘3되면 적당하다’고 하고, ‘5되는 과하다’고 했으며, ‘2되는 적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의 시대에 과음의 풍조가 퍼지자 공자가 “어찌 고를 고라고 하겠느냐”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내 주량을 모를 정도로 술이 쎄지만….” 

정약용은 둘째아들인 정학유(1786~1855)에게 쓴 편지에서 “네가 그렇게 술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따지고는 “난 이날 이때까지 나의 주량을 알지 못한다”면서 주량이 엄청남을 은근히 자랑했다. 

“주상께서 삼중소주(三重燒酒)를 옥필통(玉筆筒)에 가득히 부어서 하사하셔서 ‘나는 오늘 죽었구나’ 라 생각했지만 취하지 않았다. 또 춘당대에서 시험을 보고 답안지를 채점할 때도 주상께서 술을 큰 사발로 한 그릇 하사하셨는데 다른 학사들은 인사불성이 되었다. 어떤 이는 남쪽으로 향하여 절을 올렸고,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엎어졌다. 그러나 난 답안지를 다 읽고, 착오없이 등수를 매기고 물러날 때가 되서야 약간 취했을 뿐이다.”

정약용은 “그럼에도 너희(아들들)는 지금까지 내가 술을 반 잔 이상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했다. 주량은 엄청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한 잔 이상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그러면서 경쟁적으로 술을 마시는 당대의 풍조를 개탄했다.

“소가 물 마시듯 하며 마시는 사람들은 뭐냐. 입술이나 혀를 적시지 않고 곧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무슨 맛이 있겠느냐.”

정약용은 “술의 참맛이란 그저 입술을 적시는 것(誠以酒之味在沾脣)”이라 했다. 공자왈이나 다산 정약용의 말대로라면 술이란 취하지 않는 수준이라면 괜찮다는 의미로 들린다.

전국시대 중산국의 왕릉에서 발견된 2300년 전의 술병과 술. 동이의 후손으로 알려진 중산국의 술은 전국시대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술에는 ‘위태로움’과 ‘죽음’이 녹아있다

하지만 술이 술을 부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무 자르듯 자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술을 사람의 의지대로 절제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정약용도 그 점을 지적한다.

“술마시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대부분 폭사(暴死)하게 된다. 술독이 오장육부에 스며들어 하루아침에 썩기 시작하면 온 몸이 무너지고 만다. 이것이 크게 두려워할 만한 점이다.”

당시 강진 유배중이던 다산은 음주로 발생할 지도 모를 갖가지 병을 열거하면서 “너(아들 학유)에게 빌고 비노니 제발 술을 입에서 끊고 마시지 마라”고 신신당부한다.

“너에게…못된 술주정뱅이라는 이름이 더 붙게 된다면 앞으로 어떤 등급의 사람이 되겠느냐. 경계하여 절대로 입에 가까이하지 말아서, 제발 천애일각(天涯一角)에 있는 이 애처로운 애비의 말을 따르도록 하여라. 술로 인한 병은 등창이 되기도 하며, 뇌저(腦疽)·치루(痔漏)·황달(黃疸) 등 별별스러운 기괴한 병이 있는데, 이러한 병이 일어나게 되면 백약(百藥)이 효험이 없게 된다.”

하기야 정약용 뿐이 아니다. 이덕무(1741~1793)의 <청장관전서>도 ‘술’의 폐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예부터 종묘에 비치된 술그릇(酒器)인 ‘이(이)’에는 배(舟)가 그려져있다. 이것은 뒤집힘을 경계하는 것이라 한다. 또 술주정을 ‘후(후)’라 하는 이유는 술로 인한 흉덕(凶德)을 경계하는 것이다. 글자 가운데 ‘취(醉)’자는 죽음을 뜻하는 ‘졸(卒)’에 매여있고, 술에서 깬다는 뜻의 ‘성(醒)’은 살아난다는 ‘생(生)’에 매여있다. 또 술잔을 뜻하는 ‘치(치)’는 위태롭다는 ‘위(危)’와 비슷하고, 술잔 ‘배(杯)’는 ‘불(不)’자에 속한다.”(‘이목구심서 6’)

이덕무는 “술에서 깬다는 뜻의 ‘성(醒)’자를 빼면 술과 관련된 모든 글자에 ‘죽는다’ ‘위태롭다’ ‘안된다’는 뜻이 담겨있으니 술을 입에 대면 ‘위태롭거나’ ‘죽는다’”고 경계한 것이다.     


■나라를 망치고 가정을 파탄내는 술

남효온(1454~1492)의 시문집인 <추강집> 4집에는 김시습(1435~1493)에게 보낸 답장이 실려있다.

“술이 중도를 잃으면 머리를 풀고 노래하며 어지럽게 춤추고, 시끄럽게 부르짖고, 넘어지고 자빠져서 예의를 무너뜨리고 의리를 없애며 소동을 일으킵니다. 까닭 없이 마음을 풀어놓고 눈을 부라리다가 싸움이 일어나서 작게는 몸을 죽이고….”

남효온은 “맛있는 술맛이 사람을 변하게 하여 점점 술주정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주정하는 줄조차 모르게 되는 것은 이치상 필연적”이라고 경계했다. 

얼마전 음주운전자의 처벌을 강화한 ‘윤창호법’(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개정안)과 음주운전 단속기준을 높인 ‘제2윤창호법’(도로교통법 개정안)이 발효됐다. 

음주운전 사망사고를 낸 운전자의 형량이 ‘1년 이상’에서 ‘무기 또는 3년 이상’으로 높아졌고, 면허정지 기준도 혈중 알코올 농도 0.05%에서 0.03%로 강화됐다. 면허취소 기준도 0.1%에서 0.08%로 내려갔다. 

“소주 딱 한 잔인데 괜찮겠지” 혹은 “공자님 말씀 중에 ‘고불고고재고재’라 했는데 적당히 마시면 괜찮겠지”하는 이야기도 이젠 허튼 변명이 되었다.

조선 전기의 남효온이나 후기의 정약용이 공통적으로 결론짓은 한마디가 있다.

“무릇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하는 흉패(兇悖)한 행동은 모두 술로 말미암아 비롯된다.”(<추강집> <다산시문집>)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