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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궁궐 현판 쓴다’하면 “전하가 연예인이냐”고 욕먹었다 조선시대 관원들의 공무수행 공간이었던 창덕궁 궐내각사에는 약간 특별한 ‘현판’이 걸려있었습니다. 1725년 대은원이라는 전각을 수리한 내역을 새긴 건데요. 그런데 수리공사를 지휘한 것도 내시이요, 현판의 글을 지은 것도 내시이고, 글씨를 쓴 것도 내시였습니다. 아마 내시들이 머물렀던 건물이니 내시들이 수리공사의 모든 책임을 진 거죠. 그러나 내시가 궁궐 전각의 현판을 썼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였죠. ■“초심을 잃으면 안됩니다” 현판은 왕조의 상징물이고, 그 상징물의 간판이죠. 국왕의 글씨 혹은 당대 최고 명필들의 글씨를 받아 장인들이 정교하게 새겼고, 화려한 문양과 조각으로 장식했습니다. 이중 왕과 왕세자의 글과 글씨가 상당수 남아있는데요. 현판에는 특별히 작은 글씨로 어필(御筆·임금의 글씨), ..
죄책감에 빠진 '백,제,왕,창'…0.08mm 초정밀 예술 쏟아냈다 제가 가본 문화재 발굴 현장 중에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곳이 있는데요. 2007년 10월 24일 부여 왕흥사터 발굴유물을 실견했을 때입니다. 절정기 백제예술의 정수를 보면서 넋을 잃었답니다. 과연 어떤 발굴이었는지 시간을 15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발표 2주 전인 10월10일이었습니다. 왕흥사 목탑터를 조사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단원들의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습니다. 목탑터 초석의 사리구멍을 막은 돌뚜껑(25㎝×15㎝×7㎝)이 노출되었는데요.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자 흙탕물이 가득했답니다. 대나무칼로 조심스레 흙을 제거하자 글자들이 한자 한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백, 제, 왕, 창’ ‘정(丁), 유(酉), 년(年), 2월(二月), 25일(十五日)’. 이 목탑의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명문이 분명..
어전에서 방귀뀐 얘기까지…2억7420만자 실록·승정원일기의 X파일 저는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다가 포복절도할 기사를 보았습니다. 1601년(선조 34) 3월25일자인데요. 임금(선조)이 편전에서 왕세자(광해군)가 입시한 가운데 침을 맞았다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약방제조 김명원(1534~1602)·유근(1549~1627)·윤돈(1551~1612) 등이 있었구요. 우리가 잘 아는 허준(1539~1615)과 이공기·김영국(생몰년 미상), 허임(1570~1647) 등 어의와 침의 등도 총출동 했죠. 아무래도 임금을 치료하는 자리이니만큼 무겁고도 심각한 분위기였겠죠. ■어전에서 감히 방귀를? 그런데 실록기사 중에 ‘유근’이라는 분의 이름 뒤에 작은 글씨로 쓰여진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유근(임금의 지척에서 감히 방귀를 뀌었으니 이는 위인이 경솔한 소치이다.(咫尺..
숙종의 피난처, 북한산성에 왜 금괴 매장설이 퍼졌을까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포인트가 있다. 도심에서 걸어서 오를 수 있는 산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은 산을 등지고 강을 마주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리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전통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100여 년 전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도 ‘도심 지척의 산’이 그렇게 신기했나보다. “경성에서 서양인의 피크닉이라 하면 대개 북한산이 통념으로 되어 있었다…지게꾼들을 데려와서 말과 대나무 가마로 간다.”(, 1934) 1894년 7월 관립법어(프랑스어)학교 교장으로 내한한 에밀 마르텔(1874~1949)의 회고이다. 대한제국 시절 궁내부 찬의관을 지낸 윌리엄 샌즈(1874~1946)는 한술 더 뜬다. “한국땅을 벗어나 휴일을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시의 옛 궁궐..
형제간 알력 극심했다…실록이 밝힌 양녕대군 폐위, 세종 즉위의 전모 양녕대군(이제·1394~1462)과 관련해서 가장 인구에 회자된 이야기는 두 동생(효령대군·충녕대군)과의 일화일 겁니다. “옛날 양녕대군은 태종의 뜻이 충녕(이도·1397~1450)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미친 척했다. 어느날 야밤에 효령(이보·1396~1486)의 집을 찾아가 효령에게 귓속말을 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새벽 효령 역시 불가에 입문했다.”( 1603년 3월 9일) 야사모음집은 은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효령이 절간으로 뛰어가 북 하나를 하루종일 두들겼다. 지금도 부드럽고 늘어진 것을 ‘효령대군 북가죽’이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양녕대군이 “살아서는 왕(세종)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효령대군)의 형이 될 것이니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 1446년 4월23일자)이..
부러진 대롱옥 맞춰보니…백제판 '사랑과 영혼'의 약속이었네 2003년 9월이었습니다. 충남 공주 의당면 수촌리에서 농공단지 조성을 위한 사전 발굴조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조사는 1구역(1000평), 2구역(300평)으로 나누었는데요. 그런데 먼저 발굴한 1지역의 흙무덤에서 뜻밖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한국식 세형동검과 꺾창, 창, 도끼, 조각칼 등 청동기 세트가 노출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어 실시된 2구역 조사에서는 불과 300평 남짓한 구릉 한편에서 고분 6기가 노출되었는데요. 거기서 금동관 2점과, 금동신발 3켤레, 중국제 흑갈유도자기 3점, 중국제 청자 2점, 금동허리띠 2점, 환두대도 및 대도 2점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언론에서 ‘무령왕릉(1971년) 이후 최대 발굴’이라고 대서특필할 만 했습니다. 농공단지 터는 하룻밤..
소름돋는 '벚꽃엔딩'…사쿠라 꽂고 죽어간 가미카제 특공대 지난 4월 7~8일 답사차 경주에 다녀왔는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신라의 천년고도인 경주가 온통 벚꽃천지더군요. 김유신 장군 묘 주변이나 보문단지 같은 곳은 물론이구요. 다른 곳도 온 길가에 벚꽃으로 터널을 이루고 있고,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비가 장관을 이루더라구요. 서울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국회 윤중로 벚꽃이 탐스럽게 피었더라구요. 제가 사는 파주의 길가 곳곳에도 막 꽃봉우리를 터뜨리기 시작했구요. 요즘 사람들은 반짝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시드는 벚꽃길을 따라 북상(혹은 등산)한다는군요. ‘벚꽃 엔딩’을 즐기며 흐드러지는 봄날을 만끽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벚꽃에 열광하는 요즘 세태에서 한가지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바로 ‘창경궁(원) 벚꽃놀이’ 였습니다.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닙니다. 1980년대..
1888년 흑단령에 갓쓴 조선외교관들…워싱턴 정가 발칵 뒤집어놓았다. 얼마 전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1850~1927)의 서거 95주기(3월29일)를 맞아 색다른 자료가 공개됐는데요. 선생이 한성감옥에 투옥(1902년)된 뒤 감옥 도서실의 대출내역을 정리한 장부()입니다. 선생의 가문이 올 초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자료인데요. 대출대장에는 선생 뿐 아니라 훗날 독립운동가로 활약할 이승만(1875~1965), 정순만(1873~1928), 박용만(1881~1928), 이준(1859~1907), 이종일(1858~1925), 이동녕(1869~1940) 선생 등의 이름도 보인답니다. ■“저 여인들은 기생들이냐.” 이상재 선생 자료를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1841~1905)을 모시고 워싱턴 외교무대를 개척한 분입니다. 조선의 초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