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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바둑 공주, '아담사이즈' 금동관 쓰고 1500년만에 재림했다 ‘바둑 고수’였던 신라 공주가 ‘아담 사이즈 금동관’ 등으로 치장한채 환생한 것일까. 미성년자로 짐작되는 신라여성이 무게 약 1000t(트럭 약 200대분)에 달하는 돌무지에 묻혀있다가 1500년 만에 홀연히 등장했다.2014년부터 경주 쪽샘지구를 조사해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44호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무덤주인공이 착장한 금동관(1점), 금드리개(1쌍), 금귀걸이(1쌍), 가슴걸이(1식), 금·은 팔찌(12점), 금·은반지(10점), 은허리띠 장식(1점) 등 장신구 조합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주인공 주변에서는 비단벌레 딱지날개로 제작된 금동 장식 수십 점과 돌절구·공이, 바둑돌(200여 점)과 운모(50여 점) 등이 쏟아져 나왔다.경주 쪽샘 44호분 주인공의 출토현황. 순금제 드리개를 늘어뜨린 금동관과 ..
600년 도읍지 한양, 동전던지기로 낙점된 사실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새로운 도읍지가 된 한양(서울)이 어떻게 낙점되었는지 아십니까. 원래의 유력후보지가 계룡산이었다가 한양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죠.또 한양으로 새로운 도읍지를 정할 때 궁성의 방향을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하죠. “인왕산을 진산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산을 좌청룡우백호로 삼아야 한다”는 무학의 주장에, 정도전이 “그리되면 임금이 동쪽을 향해 앉게 되는 것”이라면서 “자고로 군주는 남면(南面), 즉 남쪽을 향해 앉아야 한다”고 응수한거죠. 지금의 청와대·경복궁처럼 북악산을 진산으로 해야한다는 거죠. 여기서 더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자기 주장이 ‘킬’되자 무학대사가 “200년 뒤 내 말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말…. 200년 뒤라면..
한국문화재 털어간 '큰 창고(오쿠라) 작은 창고(오구라)'는 누구? “장관님, 오쿠라(大倉)가 아니라 오구라(小倉)입니다.” 2015년 2월 웃지 못할 기사가 하나 떴다. 한 시민단체 소속 학생들이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당시 문화부 장관이 2014년 11월 열린 한·중·일 문화장관 회의에서 일본 문무과학성 대신에게 “오쿠라 컬렉션 등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한국문화재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는 것이다. 오구라 유물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전 경남 출토 금관’. 신라의 전형적인 ‘출(出)자’형이 아니라 가야의 특성인 ‘초화(草花)’ 형 금관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쿠라와 오구라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자성으로 오쿠라는 ‘대창(大倉)’이고, 오구라는 ‘소창(小倉)’이다. 예전엔 큰 대(大)자를 ‘오..
고려 역사 최대의 미스터리…태조 왕건은 왜 만부교 사건을 일으켰나 “제발 고려 좀 배워라!” 조선의 광해군은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섬기려고 애쓰는 조정의 공론을 한심스러워하면서 “고려의 외교 좀 배우라”고 가슴을 쳤답니다. 왜일까요. 고려의 ‘줄타기 외교’하면 정평이 나있기 때문입니다. 즉 고려는 거란(요)-금-몽골(원)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얼음판 외교를 펼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물론 세계제국 몽골(원)의 애간장을 녹일만큼 능수능란한 곡예외교를 펼쳤답니다. 개성의 태조 왕건릉에 봉안된 ‘태조 왕건’ 영정(왼쪽 사진). 태조가 왜 만부교 사건을 일으켰는지는 1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속시원히 풀 수 없다. 오른쪽 사진은 이인문의 낙타도(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곡예외교의 달인인데…뭐 다른 예를 들 필요도 없죠.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15m '세한도'엔 중국 한국 문사 20명 댓글 달려있었네…여백 5m는 무엇? “절개가 견고하다가 급한 순간에 변하는 이도 있다…군자가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배우는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했다…세상을 떠나 있으니 걱정이 없다는 심정으로 추사옹의 마음을 엿보다.”(장악진)1845년(헌종 11년) 청나라 명사 장악진(생몰년 미상)이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본 뒤 남긴 감상평이다. 장악진 뿐이 아니다. 청나라 문사 16명과 조선의 오세창(1864~1953)·이시영(1869~1953)·정인보(1893~1950) 선생 등 4명까지 모두 20명이 ‘세한도’에 줄줄이 시쳇말로 ‘긴 댓글’을 달았다. 물론 20개의 댓글이 모두 ‘선플’로 도배했으니 ‘세한도’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만 하다. 애초에 세로 23.9㎝, 가로 70.4㎝ 정도였던 ‘세..
고종은 '전깃불 얼리어댑터'...에디슨의 전구 발명 7년만에 경복궁을 밝힌 이유 어떤 이들은 조선을 두고 시대착오적인 쇄국정책으로 근대화가 늦어진 나머지 망국을 초래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유독 한 분야에 관한 한 중국 및 일본보다 앞서 서구문물을 받아들인 예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바로 전깃불입니다. 그 유명한 토마스 에디슨(1847~1931)이 인류 역사상 위대한 백열전구를 발명한 것은 1879년 10월이었습니다. 1887년 1~3월 사이 조선의 정궁 경복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건청궁에 전등을 설치하고 불을 밝혔다. 전등 설치에 관한한 중국과 일본보다 2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한국전력 전기박물관 홈페이지 ■1887년 1~3월 경복궁을 환하게 밝힌 전등불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7년 여가 지난 1887년(고종 24년) 1~3월 사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가장 깊숙한 건청..
"해시계를 종로거리에 걸라"…세종대왕이 천기를 누설한 이유 “때를 아는 것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밤에는 자격루가 있지만 낮에는 알기 어려워…신(神)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요. 해에 비쳐 각(刻)과 분(分)이 환하고 뚜렷하게 보이고, 길 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1434년(세종 16년) 10월2일 기록이다. 세종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또하나의 발명품을 선보였다는 내용이다. 즉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시내 혜정교(종로 1가 광화문우체국 부근)와 종묘 앞에 설치했다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仰·앙) 가마솥(釜·부) 모양에 비치는 해 그림자(日晷·일귀)로 때를 아는 시계’라는 뜻이다. 이것은 1859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 끝에 설치한 빅벤보다 415년이나 빠른 공중시계탑이라 할 수 있다.국외소..
일본 장관의 경천사 탑 강탈사건을 폭로한 두 외국인은 누구? 1900년대 초까지 개성에서 약 20㎞ 떨어진 풍덕군 부소산 기슭에 있는 절터에는 특이한 탑 한 기가 서있었습니다. 아(亞)자형 3단 기단을 빼면 10층이어서 경천사 10층 석탑이란 이름이 붙었고, 높이가 13m나 되는 대형탑이었습니다. 옥개석 밑에 새겨진 명문(발원문) 등에 이 탑의 조성자는 1348년(충목왕 4년) 원나라에 빌붙어 권세를 누린 강융(?~1349)과 고용보(?~1362) 그리고 원나라 승상 탈탈(1314~1355) 등입니다. 이들은 고려왕실이 아니라 순전히 원나라 황제(혜종·재위 1330~1370)와 황후(당시 고려 출신인 기씨), 황태자 등의 만수무강을 빌기위해 이 탑을 조성했습니다.오른쪽 사진은 1902년 무렵의 경천사탑 10층석탑. 왼쪽 사진은 겅천사탑 강탈사건을 특종보도한 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