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381) 썸네일형 리스트형 사라진 송산리 29호분, 일인 교사 '도굴’ 88년 만에 발굴하는 이유 왜 하필 29호분일까.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웅진 백제 시기(475~538년) 왕릉의 구조와 상장례를 규명한다면서 첫번째로 지목해서 발굴 조사하는 고분이 바로 송산리 29호분이다. 송산리 고분군(사적 13호)은 웅진백제 시기 조성된 왕릉묘역이다. 그때의 임금이라면 문주왕(재위 475~477)-삼근왕(477~479)-동성왕(479~501)-무령왕(501~523)-성왕(523~554, 538년 사비로 천도) 등 5명이다. 일제강점기 자료를 종합하면 송산리에 29기 이상의 고분이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29호분의 정체 2019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표조사와 지하물리탐사 등의 첨단기법으로 분석해보니 자그만치 40여기의 백제고분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를 얻어냈다. 현재는 주인공이 밝혀진 무령왕.. 이곳이 1500년전 무령왕비의 장례식장이었네…‘유지’서 27개월 2021년은 한국 고고학사에 매우 뜻깊은 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된 지 딱 50년이 지난 해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시대 고분 중 도굴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첫번째 고분이 현현했습니다. 게다가 올해는 고구려의 침략으로 임금(개로왕)이 죽임을 당한 뒤 공주로 천도한 뒤에 국력을 가다듬고는 마침내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역사서의 표현인 ‘갱위강국(更爲强國)’을 선언(521년)한 지 1500주년이 되는 해라네요. 당연히 잔칫상을 받아야 하겠네요. 아닌게 아니라 문화재청과 공주시는 올해 무령왕릉 발굴 50년과 백제 ‘갱위강국’ 선언 1500년을 맞아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네요. 그런데 한가지 이의를 제기해야겠습니다. 아무리 무덤 주인공이 무령왕이기로소니 남편과 함께 묻.. 내시도 궁궐 현판을 썼다…일제강점기 훼철된 385점 제자리 찾아보니 조선 왕비의 침전을 교태전(交泰殿)이라 했다. 경복궁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궁전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좀 얄궂지 않은가. 남편(임금)의 사랑을 얻으려는 왕비가 교태(嬌態)를 부리는 침실이라는 것인가.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교태(交泰)’는 에서 하늘과 땅의 사귐, 즉 양과 음의 조화를 상징한다. 임금과 왕비가 후사를 생산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교태전이라 한 것이다. 1395년(태조 4년) 태조는 서울에 새 궁궐을 짓고 대대적인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술이 거나하게 취한 태조가 정도전(1342~1398)에게 “새 궁궐의 이름을 지으라”고 명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구절을 외웠다. “(임금의) 술대접에 취하고 임금의 덕에 배부르니 후왕의 앞날에 큰 복(경복·景福)을 받게 할 것입니다.” ■왕비 침전.. 마을 어귀의 '선돌', 이끼 벗겨보니 '제2의 광개토대왕비'였네 “어? 이건 ‘국토(國土)’네, 이건 ‘토내(土內)’, 이건 ‘대(大)이고….’ 1979년 2월 24일 향토연구모임인 예성동호회원들은 충북 중원군(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우뚝 서있던 비석에서 예사롭지 않은 명문을 읽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한반도에서 처음 발견된 고구려비석의 역사적인 발견 순간이었습니다. 예성동호회는 1978년 9월 당시 유창종 충주지청 검사(현 유금와당박물관장)와 장준식 충주 북여중 교사(전 충청대 교수) 등이 결성한 답사모임이었는데요. 그러나 이 예성동호회는 예사로운 향토모임이 아니었답니다. 동호회를 결성한 그해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았고, 고려 광종(재위 949~975)이 954년(광종 5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생몰년 미상)를 위해 세운 숭선사(사적 .. '조선의 타임캡슐' 미라는 문화재인가 그저 무연고 시신일뿐인가 ‘혹시 암이 아닐까.’ 2002년 9월 경기 파주 교하의 파평 윤씨 묘역 중 무연고 묘에서 나온 미라의 옆구리 쪽을 살피던 김한겸 교수(고려대 의대)팀의 심장이 떨렸다. 미라의 홑바지 옷고름에 있는 글씨로 보아 ‘병인년윤시월’(1566년 윤 10월)에 묻힌 여인으로 추정됐다. 436년이 지났는데도 피부의 탄력이 살아있었다. 아직 인체에 수분이 남아있다는 증거였다. ■모자 미라의 충격 무엇보다 김교수가 경악한 것은 심하게 부풀어오른 옆구리였다. 이것이 수백년전 사망한 여인의 암덩어리라면 어떨까. ‘암 연구’에 획기적인 실마리를 제공하는 셈이 된다. 떨리는 심정으로 미라의 X레이 사진을 찍어보았다. 그랬더니 판독결과는 더 충격적이었다. 부풀어 오른 복강과 골반강 안에서 태아의 골격이 보이고 있었다. 암 덩어.. 왜 대서소 주인이 사상 첫 신라 금관 발굴(1921년)을 주도했을까 한국의 대표 문화유산이라면 훈민정음(국보 70호), 금동반가사유상(국보 78·83호), 석굴암(국보 24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와 신라금관을 꼽을 겁니다. 금관 중에서는 1921년 발굴된 첫번째인 금관총 금관(국보 87호)을 으뜸으로 칠 겁니다. 하지만 이 금관총 발굴이 당시 경주에서 ‘대서방’ 주인이었던 일본인 비전문가가 주도한 ‘아마추어 발굴’이었다는 기막힌 사실을 아십니까. 또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본학계는 “우리(일본) 영토 안에서 처음 발견된…”이라고 흥분했답니다. 정말 통탄할 노릇이죠. ■아마추어가 3~4일만에 후딱 판 금관총 시간을 1921년으로 경주로 되돌려 볼까요. 경주 노서리 마을을 순찰하던 미야케 요산(三宅與三) 순사(경주 경찰서)의 눈에 3~4명의 아이.. 오랑캐 황제 그림 확보하고, 사진속 사진서 광화문 문배도 찾고…국외소재 유물추적자들의 분투 문화재청 산하기관인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해외에 있는 문화재들을 추적해서 기증 혹은 구입 환수하는 케이스가 늘고 있다. 최근 정조 연간에 오랑캐 황제의 사냥모습을 그린 ‘호렵도’를 구입 환수했고, 설날 연휴에 광화문에 내건 황금갑옷을 입은 장군 그림을 그린 ‘문배도’ 역시 끈질긴 추적 끝에 복원된 것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끈질긴 추적으로 찾아내거나 복원한 문화유산들이다. ■오랑캐 황제의 사냥그림 ‘호렵도(胡獵圖)’라는 그림이 있다. 문자 그대로 오랑캐(胡)가 사냥(獵)하는 그림이다. 여기서 오랑캐라 함은 청나라(1616~1912)를 뜻하므로, 호렵도는 청나라 황제의 사냥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호렵도가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알다시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물웅덩이 속 금동대향로는 백제멸망 순간의 증거였다 1993년 10월26일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이색적인 행사가 열립니다. 일본 규슈(九州) 미야자키현(宮崎縣) 난고손(南鄕村) 주민들이 이곳을 찾아와 제사를 지낸 겁니다. 뜬금없죠. 왜 남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그것도 누구를 위해 제사를 지낸단 말입니까. ■일본 난고손 주민들의 고유제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다들 백제가 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했다고들 배웠겠죠. 그러나 백제는 3년을 더 버팁니다. 결국 663년 백제·왜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백강(금강?)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여 패하면서 거셌던 백제 부흥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동북아의 운명을 건 이 국제전쟁은 1000척에 분승한 2만7000여 백제 부흥군·왜 연합군이 4차례 접전 끝에 완패하게 된 거죠. .. 이전 1 ··· 30 31 32 33 34 35 36 ··· 17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