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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역사 최대의 미스터리…태조 왕건은 왜 만부교 사건을 일으켰나 “제발 고려 좀 배워라!” 조선의 광해군은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섬기려고 애쓰는 조정의 공론을 한심스러워하면서 “고려의 외교 좀 배우라”고 가슴을 쳤답니다. 왜일까요. 고려의 ‘줄타기 외교’하면 정평이 나있기 때문입니다. 즉 고려는 거란(요)-금-몽골(원)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얼음판 외교를 펼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물론 세계제국 몽골(원)의 애간장을 녹일만큼 능수능란한 곡예외교를 펼쳤답니다. 개성의 태조 왕건릉에 봉안된 ‘태조 왕건’ 영정(왼쪽 사진). 태조가 왜 만부교 사건을 일으켰는지는 1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속시원히 풀 수 없다. 오른쪽 사진은 이인문의 낙타도(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곡예외교의 달인인데…뭐 다른 예를 들 필요도 없죠.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15m '세한도'엔 중국 한국 문사 20명 댓글 달려있었네…여백 5m는 무엇? “절개가 견고하다가 급한 순간에 변하는 이도 있다…군자가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배우는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했다…세상을 떠나 있으니 걱정이 없다는 심정으로 추사옹의 마음을 엿보다.”(장악진)1845년(헌종 11년) 청나라 명사 장악진(생몰년 미상)이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본 뒤 남긴 감상평이다. 장악진 뿐이 아니다. 청나라 문사 16명과 조선의 오세창(1864~1953)·이시영(1869~1953)·정인보(1893~1950) 선생 등 4명까지 모두 20명이 ‘세한도’에 줄줄이 시쳇말로 ‘긴 댓글’을 달았다. 물론 20개의 댓글이 모두 ‘선플’로 도배했으니 ‘세한도’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만 하다. 애초에 세로 23.9㎝, 가로 70.4㎝ 정도였던 ‘세..
고종은 '전깃불 얼리어댑터'...에디슨의 전구 발명 7년만에 경복궁을 밝힌 이유 어떤 이들은 조선을 두고 시대착오적인 쇄국정책으로 근대화가 늦어진 나머지 망국을 초래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유독 한 분야에 관한 한 중국 및 일본보다 앞서 서구문물을 받아들인 예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바로 전깃불입니다. 그 유명한 토마스 에디슨(1847~1931)이 인류 역사상 위대한 백열전구를 발명한 것은 1879년 10월이었습니다. 1887년 1~3월 사이 조선의 정궁 경복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건청궁에 전등을 설치하고 불을 밝혔다. 전등 설치에 관한한 중국과 일본보다 2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한국전력 전기박물관 홈페이지 ■1887년 1~3월 경복궁을 환하게 밝힌 전등불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7년 여가 지난 1887년(고종 24년) 1~3월 사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가장 깊숙한 건청..
"해시계를 종로거리에 걸라"…세종대왕이 천기를 누설한 이유 “때를 아는 것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밤에는 자격루가 있지만 낮에는 알기 어려워…신(神)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요. 해에 비쳐 각(刻)과 분(分)이 환하고 뚜렷하게 보이고, 길 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1434년(세종 16년) 10월2일 기록이다. 세종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또하나의 발명품을 선보였다는 내용이다. 즉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시내 혜정교(종로 1가 광화문우체국 부근)와 종묘 앞에 설치했다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仰·앙) 가마솥(釜·부) 모양에 비치는 해 그림자(日晷·일귀)로 때를 아는 시계’라는 뜻이다. 이것은 1859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 끝에 설치한 빅벤보다 415년이나 빠른 공중시계탑이라 할 수 있다.국외소..
일본 장관의 경천사 탑 강탈사건을 폭로한 두 외국인은 누구? 1900년대 초까지 개성에서 약 20㎞ 떨어진 풍덕군 부소산 기슭에 있는 절터에는 특이한 탑 한 기가 서있었습니다. 아(亞)자형 3단 기단을 빼면 10층이어서 경천사 10층 석탑이란 이름이 붙었고, 높이가 13m나 되는 대형탑이었습니다. 옥개석 밑에 새겨진 명문(발원문) 등에 이 탑의 조성자는 1348년(충목왕 4년) 원나라에 빌붙어 권세를 누린 강융(?~1349)과 고용보(?~1362) 그리고 원나라 승상 탈탈(1314~1355) 등입니다. 이들은 고려왕실이 아니라 순전히 원나라 황제(혜종·재위 1330~1370)와 황후(당시 고려 출신인 기씨), 황태자 등의 만수무강을 빌기위해 이 탑을 조성했습니다.오른쪽 사진은 1902년 무렵의 경천사탑 10층석탑. 왼쪽 사진은 겅천사탑 강탈사건을 특종보도한 190..
'돌담장으로 폐쇄한 성문'…통곡하며 헐어야 했던 강화성의 흔적 13세기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몽골군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바로 물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부족을 통합한 칭기즈칸(재위 1206~1227)이 ‘물이나 재에 방뇨하는 자는 사형이 처한다’(제4조), ‘물에 손 담그는 것을 금한다. 물은 반드시 그릇으로 떠야 한다’(제14조)는 법을 제정했을 정도였다. 물이 부족한 초원·사막지대에 사는 부족이었기에 당연했다. 몽골군의 침입에 맞서 도읍을 옮긴 고려가 쌓은 강화 중성의 흔적. 몽골의 압력으로 성을 폐쇄한 뒤 돌담장으로 메워버린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런 면에서 고려조정이 몽골군이 침입하자(1231년) 강화섬으로 피란처를 삼은 것은 신의 한수였다고 할 수 있다(1232년). 고려는 강화섬에 궁성에 해당되는 내성과 도성 격인 중..
세계 제패 몽골군은 왜 강화도를 무서워했을까 “비록 작은 나라지만 산과 바다로 막혀있어 군사를 동원한지 20여 년이 되었는 데도 신하로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고려 태자가 조회했으니 후히 대접하소서. 일단 돌아가면 오지 않을 것이니….” 1259년(고종 46년)이었다. 몽골 조정의 강회선무사 조양필이 쿠빌라이(세조)에게 고한다. “제발로 찾아온 고려 태자를 홀대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상황일까. 와 등 고려 측 사료와, 등 몽골측 사료를 통해보자. 펄갯벌로 이뤄진 강화도 갯벌. 강화해협의 빠른 물살과 함께 허리춤까지 빠지는 갯벌 때문에 몽골군은 상륙의 엄두도 내지 못했다. ■쿠빌라이의 반색 고려는 1231년부터 만 28년 간에 걸친 몽골과의 항쟁에 지쳐 있었다. 고려는 결국 늙고 병든 왕(고종)을 대신해 태자인 전(원종..
15살 소녀를 묻은 잔인한 순장제도…신라와 가야의 운명 갈랐다 얼마전 경남 창녕 교동 및 송현동 고분군의 교동 2지역에서 도굴 없이 노출된 63호분을 발굴한 결과 금동관을 비롯하여 각종 장신구를 온몸에 치장한 무덤 주인공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요. 발굴단에서는 무덤 주인공의 몸쪽에 놓인 장신구의 출토상황과, 은장도 및 굵은 귀고리 등 주로 여성 무덤에서 보이는 유물 등으로 신장과 성별을 추정한 결과 1500년 전에 죽은 신장 155㎝ 가량의 여성이라고 조심스레 추정했습니다. 2006년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 확인된 인골(왼쪽 사진)을 과학적으로 복원한 얼굴(오른쪽 사진). 첨단과학으로 복원한 결과 이 인골의 주인공이 16세, 키 152.3㎝, 허리 21.5인치의 여성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 소녀에게 ‘송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16살 소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