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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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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범 김영한 수첩도 사초다 “어젯밤 천둥·벼락을 동반한 폭우가 내렸는데도 그냥 넘어가십니까.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군주가 반성해야 하는데….”(이종성) “아냐. 난 듣지 못했어. 아마 내가 잠든 사이에 (천둥번개가) 친 모양이지. 근데 유신(이종성)은 소리를 들었는가.”(영조) 지금으로 치면 6급 공무원(이종성)의 질타에 최고 지도자(영조)가 쩔쩔매며 변명한다. 고 김영한 청와대 정무수석의 업무수첩. 1728년 10월 3일자 의 한 대목이다. 어느날 살인사건을 심리하는 엄중한 자리에서 신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그러자 영의정 이광좌가 ‘버럭’한다. “아니 대소변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당하관들까지 줄줄이 나가버리다니 이런 법도가 어디 있습니까.” 영조는 “그래 너무 동시에 많이 나가버려서 나도 이상하게 생각했어”라고 맞장구친다...
해시태그 운동의 시조는 광개토대왕이었다?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 1946년 5월 경주 노서동 140호 남분에서 흥미로운 청동그릇이 출토됐다. 그릇엔 을묘년(415년)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 제작했음을 알리는 명문이 있었다. 무덤은 ‘호우총’이라 명명됐다. 1946년 발굴된 호우총 청동그릇. 광개토대왕을 기려 그릇을 만들었음을 알리는 명문과 함께 #와 十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정복군주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흔적이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확인됐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유물이었다. 그런데 그릇의 명문에는 70년 가까이 흘렀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아직 숨어있다. 마지막 글자인 ‘十’자와, 명문의 윗부분에 비스듬히 새겨진 #자다. 1946년 발굴된 호우총 청동그릇. 광개토대왕을 기려 그릇을 만들었음을 알리는..
김응하 장군, 광해군 등거리 외교의 히든카드 -「충무공 김응하」,「요동백 김응하」 강원도 철원 대외리 5초소를 지나면 이른바 민통선 이북지역(민북지역)이다. 그러나 민북지역 잡지않게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논길을 따라 2킬로미터 쯤 달리면 동송읍 하갈리에 닿는다. 제법 그럴듯한 산소가 마주 보고 있다. 김응하 장군의 묘는 빈묘다. 요동전투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명황제는 파병군 장수로서 장렬하게 전사한 장군에게 요동백의 작위를 내렸다. 형제의 무덤이다. 하나는 김응해 장군의 산소이고, 다른 하나는 김응하(金應河) 장군의 무덤이다. 형제는 용감했다는 말이 딱 맞다. 형(김응하 장군·1580~1619년)은 요동파병군을 이끌고 후금군과 접전을 벌인 뒤 전사했고, 동생(김응해ㆍ金應海 장군·1588~1666년)은 병자호란 때 청군..
정종의 장남 '불노'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 10조’ 중 3조는 ‘맏아들의 왕위계승 원칙’을 천명했다. ‘맏아들이 불초할 때는 둘째가, 둘째가 불초할 때는 형제 중에서…’라는 단서 조항도 따른다. 조선시대 들어 특히 ‘적자와 장자’의 의미가 강조됐다. 1차 왕자의 난(1398년) 후 정권을 잡은 이방원은 “적장자가 뒤를 이어야 한다”면서 둘째형인 방과(정종)을 옹립한다. 첫째형(방우)은 고려의 충신으로 남았던 인물이었고, 술병에 걸려 죽었다. 그래서 둘째인 방과가 적장자를 계승했다는 것이다. 태종의 속셈은 뻔했다. 정종과 정부인인 정안왕후 김씨가 묻혀있는 후릉. 정종가 정안왕후 사이엔 자식이 없었다. 정종은 9명이 첩으로부터 15남 8녀를 두었다. 그러나 동생인 이방원의 존재 때문에 슬하의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켰다. 둘째형..
‘애모솝다’ '흐운하다'와 ‘낄끼빠빠’ '안궁안물' “네 형(자매)이 노리개를 나눠 가졌는데… 네 몫은 없으니… 악을 쓰더라도 네 몫의 것일랑 부디 찾아가라….” 여염집 부모가 주고받은 편지가 아니다. 조선조 효종 임금이 셋째딸 효명공주(1649~99)에게 보낸 한글 편지다. 외아들(현종)외에 딸 6명을 둔 딸부자였던 효종은 “하필 노리개를 나눠줄 때 너는 왜 없었느냐”고 짐짓 애달파하면서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네 몫을 찾으라”고 은근히 부추긴다. 효종이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 지엄한 군주가 아니라 영락없는 여염집 ‘딸바보’의 모습이다. 예전엔 한글을 언문(諺文)라 낮잡아보고 부녀자나 쓰는 ‘암클’이라고도 했다. 한글을 모독하고, 여성까지 폄훼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면서 “(백성을 위해) 언문 28자를 지었다”고 했고, ‘재주있는 자는 하루아침에..
신안보물선의 '닻', 그리고 도굴범 이야기 1972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주민 최씨의 그물에 갈퀴 4개가 달린 쇠닻이 걸려 올라왔다. 길이 2m30㎝에 무게가 140㎏이나 되는 대형 닻이었다. 최씨는 “정치망 어장의 그물추로 쓰라”고 이웃 주민 박씨에게 건넸다. 박씨는 2㎞ 떨어진 죽도 해역까지 쇠닻을 끌고가 어장의 그물추로 썼다. 청나라 궁중화가 서양의 . 신안선과 같은 모양의 닻이 그려져 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4년 뒤인 1976년 10월부터 신안앞바다에서 보물선의 본격 발굴이 시작되었다. 박씨의 동생은 4년 전 이웃 주민 최씨로부터 선물받은 쇠닻의 존재를 떠올리고 즉시 신고했다. 전문가의 감정결과 송·원나라 시대에 사용된 중국제 닻이었다. 쇠닻의 크기와 무게에 비추어 볼 때 신안선의 규모가 400t에 이르는 중국산 대형무역..
명문가로 거듭난 신라 최고의 재벌 김유신 가문 신라 전성기에 경주엔 무려 39곳의 호화저택이 있었다. 이른바 금테두른 저택, 즉 금입택(金入宅)이다. 그 금입택 중에서도 으뜸은 단연 김유신의 재매정(財買井)이다. 를 쓴 일연 스님은 39금입택 명단을 정리하면서 ‘재매정’ 기사에 ‘이곳은 김유신공의 조종(祖宗·종가)’라는 각주를 달아놓았다. ‘재매정’은 집 안에 있는 우물을 근거로 붙인 이름임이 틀림없다. 39개 금입택 중에서 물과 관련된 집이름은 지상택(池上宅), 천택(泉宅), 수망택(水望宅), 곡수택(曲水宅), 정상택(井上宅), 지택(池宅), 정하택(井下宅) 등 여러 곳이다. 특히 우물과 관련된 이름만 3곳(재매정·정상택·정하택)이나 된다. 그런데 김유신 장군의 우물과 관련해서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김유신 가문의 종가터인 재매정택터..
신라엔 금테 두른 집이 39채나 있었다 얼마전 흥미로운 발굴기사가 떴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집터(종택)인 재매정지(財買井址·사적 246호)에서 갑옷이 출토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김유신 장군이 입었던 갑옷은 아니었으므로 호사가의 입장에서는 다소 실망스러웠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 발굴을 보면서 새삼 김유신 가문의 종가인 ‘재매정택’을 떠올리게 됩니다. 재매정택은 최전성기 신라를 대표하는 가문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으로 친다면 권력형 축재로 성공한 제벌가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김유신의 '재매정택'은 한마디로 신라 최고의 재벌가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유신의 재매정택은 돈만 좇는 탐욕의 재벌은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을 했던 가문이고자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가였습니다. 김유신의 '재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