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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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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향 고분’이 아니다…‘황금새다리’는 왜 초라한 무덤에서 나타났나 일제강점기 일인학자들이 혈안이 되어 파헤친 지역이 있다. 가야고분이 집중되어 있던 영남 지방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조선병합은 임나일본부의 부활이니 반드시 그 근거를 이곳(영남의 가야고분)에서 찾아낼 것”( 1915년 7월24일자)이라는 일인학자 구로이타 가쯔미(㎘)의 큰소리에 그 이유가 나와있다. 그러나 막상 마구잡이로 파헤친 고분 및 산성 중에 이른바 ‘임나일본부의 증거’는 털끝만큼도 찾아내지 못했다. 구로이타는 결국 “막상 임나일본부라고 해도 조사하면 조선풍인 것이 틀림없다…임나일본부 추정할만 하나, 그 자취는 이미 사라져서 이것을 찾을 방법이 없다는 게 유감”이라고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돌아오지 못한 부부총 유물 그중 대표적인 고분이 1920년 11월 조사된 경남 양산 부부총(북정리 10호..
200년 조선의 패션리더 ‘별감’, 서울을 ‘붉은 옷’으로 물들였다 200년전 서울과 서울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려볼 수 있을까. 사실 100년전이면 신문·잡지가 발행된 시기였고, 사진 기록까지 다수 남아있으니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데 ‘200년전은?’ 하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쉽지 않다. 다행히 단원 김홍도(1745~?)와 혜원 신윤복(1758~?) 같은 이들의 풍속화로 200년전의 ‘이미지’를 가늠할 수 있다. ■껌씹고 침 좀 뱉은 200년전 양아치 또 놓쳐서는 안될 자료가 있다. 18세기말~19세기초의 서울 풍물을 시로 묘사한 ‘성시전도시’ 몇 편이다. 그중 초정 박제가(1750~1806)의 시가 눈길을 끈다. “물가 주막엔 술지게미 산더미네…눈먼 장님 호통치니 아이놈들 깔깔 거리고…개백정이 옷 갈아 입으면 사람들은 몰라뵈도, 개는 쫓아가 짖어대고 성을 내며 노려..
무령왕 부부 3년상 완전복원…제사상에 은어3마리 올린 이유 “영동대장군 사마왕(무령왕)이 62세가 되는 계묘년(523년) 5월7일 돌아가셨다. ‘신지(申地)’의 땅을 사서 무덤을 조성했다. 을사년(525년) 8월12일 대묘에 안장했다.” 1971년 7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백제 무령왕릉 발굴의 출토품은 5000점이 넘는다. 그 가운데 12건(17점)이나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그중 ‘원톱’을 꼽자면 금은으로 치장한 화려한 유물이 아니다. 생뚱 맞지만 ‘돌판’ 2점이다. 무령왕의 발쪽에는 청동거울과 함께 청동신발도 놓여져있었다. 무령왕의 혼을 천상으로 올려줄 승선 도구로 삼은 듯 하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령왕릉 유물의 ‘원톱’ 하지만 예사로운 ‘돌판’이 아니다. 무령왕의 돌판, 즉 무덤 임자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묘지석이다. 그 돌판엔 ‘주인공=사마(斯..
'3대 천재' 최남선에게 '요즘 젊은애들은 한자를 몰라'고 혀를 찬 '전설' “오등(吾等) 玆(자)에 我(아) 선조(鮮朝)의 독립국 임과 조선인의 자주민 임을 선언 하노라….”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이 선언한 독립선언서의 도입부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3·1 독립선언서 2부가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 좀 이상하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조선의 독립국 임과~’가 ‘선조의 독립국 임과~’로 둔갑해있다. 왜 ‘조선’을 ‘선조’라 거꾸로 썼을까. 무슨 심오한 의미가 있을까. 허무개그 같지만 아니다. ■‘조선’과 ‘선조’, ‘박탈(剝奪)’과 ‘박상(剝喪)’ 그저 단순한 오자였을 따름이다. 독립선언서의 인쇄 과정을 두고 학계 논쟁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조선일보 1986년 3월1일) 당대 최고의 서화가이자 3·1 독립선언의 민족..
백선엽은 왜 윤봉길 의사가 죽인 '시라카와 요시노리'로 창씨개명했나 “백선엽의 창씨명이 바로 백천의칙(白川義則), 즉 시라카와 요시노리이다.” 얼마전 윤봉길 의사(1908~1932)와 윤의사에게 ‘도륙된’ 시라카와 요시노리(1869~1932) 관련 기사를 쓰자 제법 달린 댓글이 있었다. 즉 ‘시라카와 요시노리(백천의칙)=백선엽의 창씨명’이라는 댓글이었다. 그 와중에 홍범도 장군(1868~1943) 등의 육사 교정 흉상 문제가 불거지자 소환되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백선엽 장군(1920~2020)이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홍범도를 비롯한) 독립영웅 다섯분의 흉상을 없애고 그 자리에 백선엽 장군 등의 흉상으로 대치한다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 언급했다. “그 분(백 장군)은 일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일제에 충성하는 길도 마다하지 않고 선택했지만 철거한다는 다섯 분의 영..
빛 비췄더니 ‘염촉=이차돈의 본명' 보였다…순교비서 79자 새로 읽었다 “79자를 새로 판독하고, 64자를 고쳐 읽었습니다.” 8월11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이차돈순교비’를 주제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판독문이 발표됐다. 817~818년(헌덕왕 10) 조성한 ‘이차돈 순교비’의 비문을 ‘RTI 촬영(Reflectance Transformation Imaging)’으로 읽어낸 결과물이었다. ‘RTI’는 360도 각도에서 빛을 쏘아 글자가 가장 잘 보이는 순간을 읽어내는 첨단 기법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신라관에 상설전시 중인 ‘이차돈 순교비’는 일반인 눈썰미로는 10자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마멸된 명문 비석이다. 그런데 세상이 좋아져서 첨단기법으로 79자나 새롭게 구별·판독해내고, 그동안 형태를 잘못 표기했거나(오기·誤記) 다른 글자로 잘못 읽은(오독·誤讀)..
"나라가 망했는데 한사람 쯤은 따라 죽어야지"…경술국치 '순국'의 변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순절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1910년 9월6일이었다. 경술국치(8월26일) 소식이 뒤늦게 매천 황현(1855~1910)이 은거하던 전남 구례에 전해졌다. 이때 동생(황원·1870~1944)은 형(매천)에게 실명까지 거론하면서 “나라가 망했는데, 왜 ‘아무개 공(某公)’ 같이 인망(人望)이 두터운 분이 죽지 않고 있는거냐”고 책망했다. 매천이 씩 웃었다. “나는 그러지 못하면서 남이 죽지 않는다고 뭐라 해서 되겠느냐. 나라가 망한 날에는 사람마다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틀 뒤인 9월9일 새벽 매천은 홀연히 붓을 들어 ‘절명시’ 4편과, 유서(‘순국의 변’) 등을 써내려갔다. ■내가 죽어야할 의리는 없지만… 우선 ‘순국의 변’을 보라.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
'고려양. 마미군, 상의노출'…시대의 '핫템' 된 고려·조선의 깜짝 패션 ‘고려양, 마미군(말총 속치마), 하후상박 노출패션…’. 최근 ‘한복과 갓 등 한국의 복식(옷 꾸밈새) 문화가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이 중국 온라인을 통해 확산된바 있다. 참일까, 거짓일까. 지난 21일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공동 개최한 학술대회(‘한국복식문화사-한국의 옷과 멋’)가 그 논쟁의 해법을 풀어보는 자리였다. 결론은 참도 거짓도 아니라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문화는 어느 한쪽의 일방통행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상호작용을 하면서 지역 특유의 정체성을 가진 새로운 버전으로 창조된다. 그와 같은 사실을 간파하면 굳이 소모적인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학술대회 발표문 중 ‘고려~구한말’ 원(몽골)-중국 대륙에 전파되고, 혹은 ‘비너스 보다 아름답다’는 찬사를 들은 고려~조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