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369) 썸네일형 리스트형 “석굴암은 본래 젖어 있었다”…“어둠 속에 가둔 ‘신라 걸작’ 해방시켜라?” “석굴암은 영원한 걸작이다. 동양문화가 최고조였을 때 그 영기(靈氣)를 살린 신라 사람들이 만들었다.”(야나기 무네요시)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의 ‘석굴암 예찬론’이다.( 1919년 2권 5호) 미술사학자 고유섭(1905~1944)은 “인도를 버릴지언정 세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한다던 영국처럼, 우리에게는 석굴암이 있다”고 했다.(1934년 10월13일) 극찬이다.1910년대초 수리 복원 이전의 석굴암 모습. 석굴암 앞면에 보이는 금강역사상과 옆면에 조성된 팔부중상의 윗부분에서 처마의 역할을 하는 석재가 보인다. 야외에 노출된 석굴암의 원형을 짐작할 수 있다.|강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설명그런데 1960년대 이후 석굴암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일까. 관람객 처지에서 ‘석굴암’은 건물.. ‘트럼프 금관’은 ‘합성’이지만 ‘기생 금관’은 ‘실사판’이었다…6점6색, 신라 금관의 비밀 “너희가 금관을 아느냐.” 요즘들어 신라 금관이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 정부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의 모형을 선물한 것이 화제를 뿌린 것이다.(이 모형은 순금은 아니다. 구리에 소량의 금을 합금한 적동에 순금을 도금한 금동관이다.)금관 쓴 트럼프 미 대통령 모습을 표현한 합성 사진(왼쪽)과 서봉총 금관을 쓴 기생 차릉파 사진.어쨌든 그 덕분일까. 12월14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리는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 특별전은 ‘오픈런’이 벌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또한 국내에서 출토된 금관 6점이 사상 처음으로 한꺼번에 모이는 자리라는 점도 ‘관객 폭발’을 유도했다. 결국 관람인원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이번 기회에 신라 금관을 둘러싼 이야깃거리의 정수만 골라.. ‘반역자’ 연남생, ‘망국 군주’ 보장왕…고구려 멸망 후 그들의 엇갈린 행적 ‘고충운, 발해인. 선조는 해동 구려국의 왕족…증조 할아버지는 당나라(皇)의 국내성왕(國內城王), 할아버지는 국내성 좌상(左相)….’얼마전 신라사학회 주최 발표회에서 알쏭달쏭한 내용의 따끈따끈한 논문이 새롭게 소개되었다. 루정호(樓正豪·러우정하오) 절강(浙江·저장)해양대 교수의 ‘고구려 유민 고충운 묘지명 고찰’ 논문이었다.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 4세대인 고충운(?~774)의 행적을 기록한 돌판(묘지·墓誌) 관련 연구다. 고충운 묘지명은 ‘평원 발해인 출신인 고충운의 선조는 해동 구려국(고구려)의 왕족이며 고구려 멸망 때 포로로 잡혀왔고, 이후 고씨를 성씨로 정했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신라사학회 주최 발표회에서 소개된 ‘고충운 묘지명’. 고구려 유민 4세대 ‘고충운’의 행적을 담은 명문.. ‘사초 쓰는 심정’으로…‘난신적자’를 처단하라 “사초를 쓰는 자세로 세심하게 살펴가며…특별검사의 직을 수행하겠다.”추석 이후 후반기로 들어선 3대 특검의 수사를 재차 기대하며 조은석 내란특검의 취임 일성을 다시금 떠올린다. ‘사초 정신’의 강조이다.그런데 ‘사초’하면 떠오르는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이 있다. 바로 ‘영조(재위 1724~1776)의 사초 소각(사건)’이다. 왜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영조와 사초 소각 사건’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어 ‘갑툭튀’하는가. 그 사연을 들어보자.에 표현된 사관. 맹자는 “공자가 를 쓰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등문공·하’)고 했다. “나라와 윤리를 어지립히는 난신적자들을 평가하고 심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임무라는 뜻이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심야의 사초 소각 사건1735년(영조 11) 2월10일 밤늦.. 3대 아닌 4대가 ‘망한(?)’ 독립운동 가문…“무릎 꿇어 노예 되지 않겠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더는 통용될 수 없도록….” 이재명 대통령이 8월14일 ‘광복 80주년, 대통령의 초대’ 행사에서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다짐한 약속이다.친일파 집안은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하고, 독립투사의 가문은 불우한 삶을 대물림해온 쓰라린 역사를 일컫는 표현이다.그런데 3대가 아니라 ‘4대가 망한’ 가문이 있다.(좀더 정확하게는 ‘4대가 고초를 겪은’이라는 표현이 맞다.) ‘임청각’(보물)으로 알려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1858~1932)과 그 가문이다.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은 1910년 경술국치 후 “차라리 목이 떨어질 지언정 무릎꿇고 종이 되어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만주망명→독립투쟁’의 길을 택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한번 꼽아보자. 이상룡.. ‘아부외교’의 끝판왕…삼국통일의 비법 된 진덕여왕의 ‘태평송’ ‘위대한 당나라 왕업을 여니…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해와 달, 뭇별이 (당나라의) 만방을 두루 도네…우리 당나라 황제 밝게 비추리라.’( ‘진덕여왕’조)650년 신라 진덕여왕(재위 647~654)이 당나라 황제인 고종(649~683)에게 올린 ‘태평송’이다. 그 내용을 더 들여다보자.“…(당나라가) 전쟁을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문치를 닦아 대대로 잇게 했도다. 하늘의 뜻을 잘 받드니 은혜의 비가 내리고…깊은 어짊은 해와 달에 짝할 만 하고 시운(時運)을 어루만져 태평세월을 갈구하도다…”손발이 오글거린다. 이게 다가 아니다. 는 “진덕여왕이 손수 비단을 짜서 그 위에 ‘태평송’을 수놓아 바쳤다”고 덧붙였다.650년 신라 진덕여왕은 당 고종에게 ‘태평송’을 지어 바친다. “황제의 높은 포부 빛난다. 테.. 허준은 왜 70번이나 탄핵 당했나…사람 살린 일이 부지기수인데… “병신년(1596) 선조가 태의 허준(1539~1615)을 불러 ‘…의서 한 권을 편집하도록 하라’고 명했다…그러다 정유재란 발발(1597)로 중단….”월사 이정구(1564~1635)가 쓴 ‘서문’에 등장하는 편찬 시기이다. 1596년 선조의 명에 따라 허준이 책임지고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러다 정유재란 때문에 중단됐고, 이후 허준 단독으로 편찬 임무를 수행해 1610년 25권으로 완성하고 1613년 초간본이 빛을 보았다는 게 정설이었다.임진왜란 공신들의 연회를 그린 ‘태평회맹도’(보물). 허준은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란하는 선조를 수행했다는 공로로 호성공신(3등)이 되었다. 허준은 ‘양평군’의 군호와 함께 숭정대부(종 1품)의 작위를 받았다.|국립진주박물관 위탁관리■4년 앞선 초고본?그런데 최근 선.. ‘내시라고 얕보지 마라’…나라 위해 목숨 바친 ‘환관 열전’ ‘내시(환관·내관)의 별장인 성북동 별서 화재.’ 얼마전 서울 소재 문화유산(명승)인 ‘성북동 별서’ 내 목조 건물인 송석정에서 불이 났다.이 화재로 ‘성북동 별서’의 전체 영역 중에 1953년에 신축된 송석정의 일부(3분의 1)가 파괴되었다.‘성북동 별서’가 어떤 유산일까. 1992년 ‘성락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재분류된 유산이다.사적 지정 당시 이 별서의 주인공은 ‘환관’이 아니었다.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의친왕 이강(1877~1955)의 별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19년 심각한 결격 사유가 드러났다. ‘이조판서 심상응’이 사료에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 뒤늦게 확인됐다.철종-고종-순종 등 3대에 걸쳐 왕명을 전달하는 승.. 이전 1 2 3 4 ··· 4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