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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와 동년배, 세종은 가장 아름다운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얼마전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국내에서는 전해지지 않는 15세기 금속활자본을 일본 도쿄(東京) 와세대대(早稻田大) 도서관에서 찾아냈다는 소식이 들렸는데요. (吏學指南)이라는 책은 중국 원나라 때인 1301년에 편찬한 법률·제도 용어집이자 관리 지침서랍니다. 그러나 저는 이라는 책 자체에는 그리 관심이 없구요. 이 책이 1420년(세종 2년) 제작된 ‘경자자(庚子字)’라는 금속활자로 만들었다는 것에 눈길이 쏠렸습니다. ■신료들은 왜 금속활자를 반대했을까 1420년이라면 어떻습니까. 최초의 금속활자본이 (1377년)이든, 혹은 공인본(보물 758-2호·1239년 무렵)이든 43~181년이나 흘렀던 때입니다. 바로 그럴 때 조선의 태종과 세종은 양질의 금속활자를 개발해서 책을 대량인쇄하는 것을 국책사업으로 여기..
홍문관 관리에서 홍어장수까지…조선판 '하멜표류기' 남긴 사람들 지난 2월초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의 특별전(‘ㄱ의 순간’)을 보던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이 한 점 있었다. ‘조선인일본표착서화’(배가 조난당해 일본에 표착한 조선인을 그린 그림과 글씨)’라는 그림이었다. 일본 후쿠오카(福岡)의 개인사업가가 소장한 작품이 대여전시된 것이다. 이 작품이 특별전에 출품된 사연이 있다. 대학(평택대)의 일본어과에 재학중이던 학생(장윤화씨)이 일본에 머물던 친구에게서 작품의 존재를 알고서 서예박물관에 연락했다. 마침 특별전을 준비중이던 서예박물관측이 수소문 끝에 후쿠오카(福岡)의 개인사업가가 소장한 작품의 대여전시를 성사시켰다. ■표류민 초상화에 쓰여진 한글 흘림체 이 그림은 1819년(순조 19년) 1월7일 강원도 평해(지금 경북 울진)에서 멸치와 담배를 싣고 출항했다가..
실명 공개된 ‘신라 최대의 세습재벌’ 김유신의 황금저택 기이 진한조에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보입니다. “신라 전성기 서울(경주)에는 17만8936호가 있었고…. 금입택(金入宅)이 35개(실제로는 39곳)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4인 1가구 기준으로 따져볼 때 전성기 경주의 인구가 70만명을 훌쩍 넘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금이 들어간’ 호화저택, 즉 금입택(金入宅)이 35곳(39곳)에 달했다는 것 또한 대단하지 않습니까. ■신라판 호화저택 공개 그런데 는 이 기사를 쓰면서 ‘금입택’, 즉 호화저택의 명단을 공개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특히 눈에 띄는 ‘금입택’이 포함되어 있는데요. 바로 김유신 가문의 종가인 ‘재매정택(財買井宅)’입니다. 먼저 한번 생각해봅시다. ‘금이 무시로 들어간다’는 뜻인 ‘금입택’은 과연 어떤 집을 가리키는 표현일까요. 의 편찬자는 ‘금..
하룻밤 사이에 수습한 무령왕릉…왜 최악의 졸속발굴이었나 올해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기도 하고, 백제가 웅진천도 이후 다시 강국이 됐다는 이른바 갱위강국을 선포한지 1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공주시와 문화재청이 올해 내내 갖가지 행사를 펼쳐진다고 합니다. 축하받아야 마땅하겠네요. 그러나 고대사의 블랙박스를 열었다는 무령왕릉 발굴은 최악의 졸속 발굴이었다는 비판도 받는데요.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에서 알아봅니다. 문=무령왕릉 발굴의 의미를 말하자면? 답=무엇보다 “내가 이 무덤의 주인공인 무령왕이요”하고 선언한 명문이 나왔으니까요. 삼국시대 고분 중에 이렇게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고분이 나온 건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무덤에서 나온 모든 유물은 연대가 분명하니까 삼국시대 유물의 연대를 편년하는 기준자료가 되었죠. 그래서 ..
한국도 '약탈문화재 보유국'이지만 …오타니 유물, 반환은 글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해외에 흩어진 한국문화재의 환수를 추진하고, 또한 제대로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문화재청 산하기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재단의 홈페이지 화면을 보면 ‘193136’이라는 숫자가 떠있습니다. 이것은 22개국에 흩어져있는 한국 문화재의 숫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숱한 문화유산을 빼앗긴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이자, 언젠가는 되찾아야 할 문화유산이라는 다짐과 각오를 담았을 것입니다. ■약탈문화재를 소장한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대한민국 땅에도 ‘남에게서 빼앗은 약탈문화재’가 있답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대표 박물관인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360여건 1500여점의 중앙아시아 문화재입니다...
사라진 송산리 29호분, 일인 교사 '도굴’ 88년 만에 발굴하는 이유 왜 하필 29호분일까.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웅진 백제 시기(475~538년) 왕릉의 구조와 상장례를 규명한다면서 첫번째로 지목해서 발굴 조사하는 고분이 바로 송산리 29호분이다. 송산리 고분군(사적 13호)은 웅진백제 시기 조성된 왕릉묘역이다. 그때의 임금이라면 문주왕(재위 475~477)-삼근왕(477~479)-동성왕(479~501)-무령왕(501~523)-성왕(523~554, 538년 사비로 천도) 등 5명이다. 일제강점기 자료를 종합하면 송산리에 29기 이상의 고분이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29호분의 정체 2019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표조사와 지하물리탐사 등의 첨단기법으로 분석해보니 자그만치 40여기의 백제고분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를 얻어냈다. 현재는 주인공이 밝혀진 무령왕..
이곳이 1500년전 무령왕비의 장례식장이었네…‘유지’서 27개월 2021년은 한국 고고학사에 매우 뜻깊은 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된 지 딱 50년이 지난 해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시대 고분 중 도굴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첫번째 고분이 현현했습니다. 게다가 올해는 고구려의 침략으로 임금(개로왕)이 죽임을 당한 뒤 공주로 천도한 뒤에 국력을 가다듬고는 마침내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역사서의 표현인 ‘갱위강국(更爲强國)’을 선언(521년)한 지 1500주년이 되는 해라네요. 당연히 잔칫상을 받아야 하겠네요. 아닌게 아니라 문화재청과 공주시는 올해 무령왕릉 발굴 50년과 백제 ‘갱위강국’ 선언 1500년을 맞아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네요. 그런데 한가지 이의를 제기해야겠습니다. 아무리 무덤 주인공이 무령왕이기로소니 남편과 함께 묻..
내시도 궁궐 현판을 썼다…일제강점기 훼철된 385점 제자리 찾아보니 조선 왕비의 침전을 교태전(交泰殿)이라 했다. 경복궁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궁전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좀 얄궂지 않은가. 남편(임금)의 사랑을 얻으려는 왕비가 교태(嬌態)를 부리는 침실이라는 것인가.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교태(交泰)’는 에서 하늘과 땅의 사귐, 즉 양과 음의 조화를 상징한다. 임금과 왕비가 후사를 생산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교태전이라 한 것이다. 1395년(태조 4년) 태조는 서울에 새 궁궐을 짓고 대대적인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술이 거나하게 취한 태조가 정도전(1342~1398)에게 “새 궁궐의 이름을 지으라”고 명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구절을 외웠다. “(임금의) 술대접에 취하고 임금의 덕에 배부르니 후왕의 앞날에 큰 복(경복·景福)을 받게 할 것입니다.” ■왕비 침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