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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롱' 혀내민 압도적 크기의 신라 금령총 말모양 토기 ‘혀를 낼름 표현한 말모양 토기의 정체는 무엇인가.’ 경주 금령총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것 중 압도적인 크기(56㎝)의 말모양 토기가 발굴됐다. 그런데 이 말모양 토기의 모습은 혀를 쑥 내밀고 있었다.지난해부터 금령총(5세기말~6세기초)을 발굴해온 국립경주박물관은 올해 4월부터 진행된 2차발굴에서 무덤 둘레에 쌓는 돌(호석)의 바깥쪽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것 중 가장 큰 56㎝ 크기의 말모양 토기 1점 등 30여개체의 제사용 토기들을 수습했다고 30일 밝혔다. 제사용 토기 안팎에는 말과 소, 기타 포유류 등의 동물뼈와 굴, 고동, 조개류 등 각종 패각류, 뚜껑접시, 토제방울, 유리구슬, 쇠스랑 등이 확인됐다.발굴된 말모양토기.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민 모습이 이채롭다. 왜 혀를 내민 모습으로 표현했는지는 알 ..
고종이 '대인배의 나라' 미국을 짝사랑한 결과는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는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 1882년 5월22일 제물포 바닷가의 임시장막에서 조선과 미국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열렸다. 한문 3통, 영문 3통으로 된 조약에 서명한 이들은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1810~1888)과 미국전권대표인 로버트 슈펠트 해군제독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해괴한 조약이었다. 도장은 신헌에 찍었지만 조약의 교섭권을 행사한 쪽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1823~1901)이었다. 교섭과정에서도 블랙코미디가 이어졌다. 1905년 미국의 아시아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과 중국, 조선을 방문한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사진 아랫줄 가운데). 그러나 사절단장인 윌리엄 테프트 국방장관(앨리스 바로 뒤)은 일본의 가쓰라 수상..
다시 미궁에 빠진 백제 무왕의 부인묘 선화공주인가, 사택적덕의 딸인가, 의자왕의 모친인가. 전북 익산 쌍릉(사적 제87호) 중 백제 무왕의 무덤임이 사실상 밝혀진 대왕릉과 달리 소왕릉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다시 미궁에 빠졌다.익산 쌍릉 중 소왕릉을 발굴한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19일 “지난해 대왕릉의 주인공이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라는 증거를 사실상 확보했지만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소왕릉에서는 피장자와 관련된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소왕릉의 주인공을 가늠할 명문자료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익산 쌍릉 중 소왕릉의 무덤길 안쪽에 서있는 묘표석. 높이가 120㎝에 달하는 거대한 돌이 무덤의 주인공을 지키고 있다. 발굴단은 이 묘표석이 무덤주인공의 사후 생활이 편안하도록 귀신을 지키는 벽사의 의미로 조성된..
흉노 군주는 왜 한나라 황후에게 ‘성희롱 편지’를 썼을까 약 2200년 전 중국 중원을 공포로 몰아붙인 종족이 있었으니 바로 흉노족이었다. 진시황 이후 어지러워진 중국대륙에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즉 산을 뽑을 만한 힘과 세상을 덮을 만한 기세를 자랑했던 항우마저 제압하고 다시 중국을 통일한 난세의 영웅은 한나라 개국시조 고조 유방이었다. 그러나 천하를 차지한 한나라를 우습게 본 종족이 흉노족이었다. 몇가지 일화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발굴팀이 2012년 몽골 골모드에서 발굴한 동복(구리솥). 흉노인들은 이 청동솥을 가지고 다니면서 요리를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에피소드 ①“잔말 말고 조공품이나 보내라” 언젠가 한나라 사신이 흉노의 풍습을 ‘오랑캐가 아니냐’면서 비아냥댄 일이 있었다. “흉노에서는 노인을 천대한다지요? 또 아비와 아들이 같은 천막에..
'사람 얼굴 모양' 출토된 무덤에서 알아보는 흉노역사 몽골 연구기관과의 협약으로 몽골 현지의 흉노유적을 발굴중인 국립중앙박물관 조사팀이 사람 얼굴 모양의 은제 허리띠 장식 등 흉노유물을 찾았다.국립중앙박물관은 몽골 과학아카데미 역사학고고학연구소 등과의 협약으로 몽골 헨티 아이막의 도르딕 나르스 유적의 흉노무덤 200여기 중 가장 큰 제160호 무덤과 그 무덤에 딸린 배장묘를 조사한 결과 사람얼굴모양의 은제허리띠를 확인했다고 11일 밝혔다. 은제 허리띠 장식의 경우 비슷한 형태를 한 2점이 피장자의 허리부분에서 출토됐다. 이런 형태의 유물은 러시아내 몽골자치공화국인 부랴트 공화국의 차람 고분군 등 몽골 동북부 지역의 흉노무덤 등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 유물의 연대는 기원후 1세기 쯤으로 편년된다. 기원후 1세기 흉노족 무덤에서 발굴된 사람 얼굴 모양의 은제..
‘날 잊지말라’고 보내온 부인의 다홍치마에 쓴 다산 정약용의 편지 “눈서리 찬 기운에 수심만 더욱 깊어지고 등불 아래 한 많은 여인은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그대와 이별 7년. 서로 만날 날 아득하네.” 1806년(순조 6년) 겨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부인(홍혜완·1761~1838)이 남편에게 ‘절명시’에 가까운 애끓는 시를 쓴다. 병들어 약해진 마음에, 언제 유배에서 풀려날 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는 부인의 안타까운 그리움을 한껏 담은 시였다. 아내는 이 시와 함께 시집 올 때 입었던 빛바랜 다홍치마를 전남 강진의 남편에게 보냈다. 시를 쓴 1806년은 다산과 부인의 결혼 30주년 되는 해이기도 했다. ‘하피첩’. 다산의 부인이 유배중인 남편에게 혼인 때 입었던 다홍치마를 보냈다. 다산은 빛바랜 다홍치마가 “글 쓰기에 훌륭하다”면서 두 아들에게 보내는 ..
260년 왕희지 그늘에 가려진 김생, 김육진, 황룡사 스님 “신라 무장사에 김생의 글씨를 쓴 비석이 있는데 어디인지는 모릅니다.” 1760년(영조 36년) 무렵 경주부윤이 된 이계(耳溪) 홍양호(1724~1802)는 ‘전설의 명필’인 김생의 비석이 무장사에 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무장사는 원성왕(재위 785~798)의 아버지(대아간 효양)가 숙부인 파진찬을 추모하려고 지은 절이다. 는 ‘무장(무藏)은 태종무열왕(654~661)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와 투구를 이 사찰에 묻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속전을 소개했다. 이 절에는 승하한 소성왕(799~800)을 위해 부인인 계화왕후가 세운 아미타불상의 이력을 적은 비석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무장사비이다. 무장사비문의 복원도. 왕희지의 필체를 빼닮아 왕희지집자비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최근 이계 홍양호..
"성락원 바위글씨는 '나만의 집(장외가)'…누가 '추사 코스프레'했나"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늪의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고 새긴 글씨는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것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사이트에 쓰여있는 명승 제35호 성락원 설명자료이다.성락원 영벽지 바위에 새겨진 글씨. 지금까지는 ‘장빙가(檣氷家)’로 읽어 ‘고드름이 열린 집’이라는 의미로 통용됐다. 그러나 손환일 대전대 서화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빙’자는 ‘외(外)’자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연구원은 후한시대의 이른바 팔분법에 따라 표기된 용례를 들어 ‘장외가’는 ‘아름답지만,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성락원은 1992년 당시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고 국가문화재로 지정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최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