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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남침에 전전긍긍하던 시기의 한성백제군의 막사가 발견됐다 한성백제군의 내무반인가. 최근 충남 당진 성산리 산성 내에서 확인된 주거지 6기는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침을 막기위한 한성백제군의 전방사령부 막사로 추정된다. 지난 4월부터 산성을 정밀조사해온 발굴조사기관(금강문화유산연구원)은 “성 내부에서 총 6기의 주거지가 성벽과 가까이 밀집해 있었다”면서 “유구의 형태로 보아 군사들의 거주용 막사인 군막일 가능성이 짙다”고 밝힌 바 있다. 이들 건물지들은 암반 위에 조성됐고, 성벽에 매우 가깝게 붙여 열을 지어 있었다. 또한 구들시설을 구축해서 계절에 관계없이 취사와 난방도 할 수 있는 구조였다. 연구원측은 “축조하기 어려운 암반 위에 사철 난방과 취사가 가능한 건물을 열을 지어 축조했다”면서 “성벽에 붙여 조성한 것 등을 미루어 볼 때 이..
마한의 심장부에 웬 생뚱맞은 백제고분…담로제의 흔적? ‘마한의 심장부에 웬 생뚱맞은 백제지배층의 무덤이 나타난 것일까.’ 3~6세기 전반 영산강 유역의 독특한 문화가 ‘옹관 무덤’이다. 땅 위에 거대한 봉분을 쌓아올린 뒤 그 속에 여러 개의 옹관(독널)을 묻은 묘제를 일컫는다. 옹관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인 마한의 문화권임을 상징하는 묘제이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대형옹관의 핵심분포권인 반남고분군 인근에 옹관과는 어울리지 못한 고분이 버티고 있다. 나주 송제리고분 돌방에서 수습한 은제관식과 하단 고정 못. 6세기 전반 백제 중앙정부가 하사한 복식(옷과 장식)인 것으로 추정된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전혀 어울리지못한 고분 영산강 지류인 금천과 만나는 전남 나주 세지면 송제리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이른바 송제리 고분이다. 예부터 ‘동산’이니 ‘고려장’이..
지독한 근시에도 책1만권 읽었다는 매천 황현의 문방구류가 문화재 된다 ①“바탕이 올곧으며 아름다운 게 덕을 지닌 군자의 빛과 같으니 오래도록 진실로 좋아하리라(貞固含章 君子之光 其壽允臧).”②“돌 위에는 샘솟는 벼루가 있으니 군자는 강한 덕으로 빛날 것이다.(石上有泉硯 君子以 剛德而潤)”③“문예의 밭 날로 갈면 추수 풍성하리니 즉묵(후)에 봉해진 네 공적 가상하구나.(藝圃日闢 秋有穫 余嘉乃積 封卽墨)”보물 제1494호 매천 황현 초상. 지독한 근시에 시달린 황현 선생의 안경은 이번에 등록문화재가 된다. 구한말~조선제국기 애국시인이자 역사가이며 경술국치 직후 순절한 매천 황현(1855~1910)은 에 벼루를 소재로 한 시(‘연명·硯銘’)를 여러편 지었다. 그것을 명(銘)이라 한다. ‘명’은 본래 ‘새기다’라는 뜻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물건에 대한 내력과 단상 혹은 물건을 ..
정조는 '이산'에서 '이성'으로 개명한 터무니없는 이유 ‘이산이 아닌 이셩(성)이라고?’ 최근 수원시가 설립한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이 개최한 기획전의 제목이 ‘셩: 판타스틱 시티’이다. 수원이라는 도시를 상징하는 두 개의 성을 주제로 한다는 것인데, 하나는 ‘수원 화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셩(성)’이란다. 그런데 ‘이셩(성)’이 뭔가하면 조선의 제22대 임금인 정조(재위 1776~1800)란다. 혼란스럽지 않은가. 잘 알려진 정조의 이름은 이산(李示+示)이 아닌가. 그러기에 ‘이산’이라는 사극까지 나오지 않았던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정조대왕의 이름은 이산도 맞고, 이셩(성)도 맞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1846년(헌종 12년)에 간행된 . 주로 한시를 창작할 때에 운자를 찾아보는 사전으로 이용되었다. 산(示+示)자에 정조의 어휘(이름)임을 표시하고 난..
고구려 광개토대왕군과 맞서던 한성백제군의 군사기지, 충남 당진에서 발견 충남 당진 성산리 산성에서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한성백제군 군사기지의 막사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됐다. 지난 4월부터 산성을 정밀조사 중인 금강문화유산연구원은 “성 내부에서 총 6기의 주거지가 성벽과 가까이 밀집해 있었다”면서 “유구의 형태로 보아 군사들의 거주용 막사인 군막일 가능성이 짙다”고 최근 밝혔다. 한성백제군 부대 막사에서 춡토된 세발달린 그릇과 굽다리 접시, 계란모양 토기, 시루, 가락바퀴 등의 유물들. 취사를 비롯한 생활용품들이다. 백제병사들을 위한 군납용품이었을 것이다. |금강문화유산연구원 제공 길이 239m에 이르는 성벽은 해발 67m의 야상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다. 성벽은 야산의 자연경사면 위에 흙과 잡석을 켜켜이 쌓아 축조한 테뫼식(산 정상부를 둘러서 쌓은) 산성이다. 성벽의 ..
18세기 조선 재벌들의 돈버는 법과 베푸는 법 “이진욱의 장례를 치르는 날… 멀거나 가까운 사이를 따질 것 없이 다들 부의금을 보내고 찾아와 조문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빈털터리 고아로 태어나 큰돈을 번 18세기 부자 이진욱의 장례식 풍경이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을 보기 어렵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이진욱의 장례식을 보면 그 어떤 재상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추구한 조선 사회의 도덕 기준으로 본다면 이진욱의 ‘비루한 인생’을 좋게 평가할 수는 없다. “집안의 살람살이는 어찌되는지 살피지 않았다”(不問産業)든가, “생업에 힘쓰지 않았다”(不治産業)든가 하는 것은 당대 조선사회의 미덕이었다. 조선 영조시기에 식니당 이재운이 쓴 . 이재운은 부를 경..
제2의 무령왕릉 출현하나…공주 송산리서 확인된 46기 고분의 실체 “‘중방(中方)’ 명 벽돌의 원 위치를 찾아라.”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무령왕릉 및 6호분과 같은 성격의 벽돌무덤을 포함, 새로운 백제고분 41기가 존재할 가능성이 확인됐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백제역사유적지구·2015년 등재) 중 한 곳인 송산리 고분군의 중장기 학술조사 수립을 위한 첫 정밀현황조사 결과 무령왕릉 인근에서 ‘중방(中方)’ 명 벽돌을 수습했다고 밝혔다. 이성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무령왕릉 남쪽 80m 지점의 지표면에서 ‘중방’ 명 벽돌을 수습했다”면서 “이 벽돌은 일제강점기에 보고된 파괴벽돌무덤(17호분)의 추정위치와도 70m 정도 떨어져 있다”고 전했다. 무령왕릉 서벽 창문모양 장식에 사용된 ‘중방(中方)’명 벽돌(좌)과 이번 조사에서 수습한 ‘중..
"세금 거둘 땅을 빼앗다니…" 1500년전 신라 판결문 뜯어보니 “응? 이거 뭔가 글씨 같은데?” 1988년 3월 20일 경북 울진 죽변면 봉평 2리 마을 이장 권대선씨는 길 옆 개울에 처박혀있던 돌을 유심히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봐도 돌에 새겨진 문양은 글씨 같았다. 이 돌은 두 달 전인 1월 20일 주두원씨 소유 논에 거꾸로 박혀있다가 포크레인 작업으로 뽑아내어 길옆 개울로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돌의 문양이 글씨라는 것을 확신한 권대선 이장은 즉시 죽변면사무소와 울진군청에 신고했다. 이것이 유명한 울진 봉평비(국보 제 242호)의 발견 이력이다. 이번에 3D 가공 이미지로 판독해본 포항 중성리 비문 글씨. 다양한 각도의 조명에서 찍은 결과 135도, 225도, 315도에서 찍은 사진이 양호했다. 이 사진은 조사각 315도에서 찍은 것이다.|국립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