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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말고 래고랜드?'…춘천 중도 청동기 마을의 파괴 방조는 역사의 수치다 "중도 유적 대신 레고랜드를 짓는다. 이것은 역사의 수치다." 서울 석촌동과 풍납동 일대는 백제 왕릉급 고분(석촌동)과 도성(하남위례성·풍납토성)이 확인된,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년)의 500년 역사를 오롯이 증거하는 핵심유산이다. 하지만 개발의 광풍에서 사라질 뻔 한 유적을 온몸을 던져 막아낸 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형구 동양고고학연구소장(75·선문대 석좌교수)였다. 레고랜드 조성부지에서 확인된 다양햔 형태의 지석묘(고인돌). 신분의 상중하를 알 수 있는 지석묘들이다. 이교수는 1983년 백제 적석총인 석촌동 3호분과 4호분 사이에 도로 관통 공사를 강행하고, 마구 파헤친 고분에서 백제 인골이 포클레인 삽날에 찍혀나가는 참상을 확인했다. 이교수는 한편으로는 공사 차량을 몸으로 막아서고 한편..
사라진 신안 보물섬 유물 2만점 중 일부 도자기, 40년만에 현현했다 1975년 8월20일 전남 신안 중도 앞바다에서 조업중이던 어부 최평호씨(당시 35살)의 그물에서 심상치않은 물건이 걸렸다. 청자꽃병을 비롯한 중국제 청자와 백자였다. 최씨는 이 물건들을 그냥 마루밑에 보관해 두었다. 6개월 뒤 초등학교 교사인 최평호씨의 동생이 ‘마루밑 중국제 청·백자 이야기’를 듣고 가만 있지 않았다.40여년만에 회수된 신안선 유물들. 1980년대초 잠수부를 동원해서 건져올린 뒤 은닉해온 것들이다. |문화재청 제공"심상치 않은 물건 같은데 신고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동생은 곧바로 신안군청에 중국제 청백자의 인양 사실을 알렸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신안선의 존재는 이렇게 알려졌다. 감정에 들어간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은 이 중국제 청·백자가 중국 송~원나라 시대의 것임을 ..
태종이 직접 밝힌 양녕대군 폐세자 이유-"대체 너 때문에 몇 사람이 죽었냐" “나이 10세 때 세자 책봉을 받았지만…16~17세 때 성스러운 덕을 타고난 세종에게 하늘도, 인심도 쏠린 것을 알고는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하루같이 술과 기생 속에 보내….” 정조가 1789년(정조 13년) 양녕대군 이제(李제·1394~1462)의 사당을 위해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의 내용이다. 왜 양녕대군의 사당을 ‘지극한 덕’을 뜻하는 ‘지덕사’라 했을까. 정조는 “무슨 덕이 제일 좋을까”라고 자문하고는 “그야 사양하는 덕, 그것도 명예를 사양하는 일”이라고 자답했다. 1962년 개봉된 영화 ‘양녕대군 주유천하’. 양녕대군이 부왕(태종)의 뜻이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 일부러 거짓 광태를 부리며 주색에 빠진다. 그러나 이 영화는 “훗날 양녕대군이 ..
도량형 통일한 세종대왕 당시의 기준 자(尺) 는 무엇인가 세종대왕이 도량형을 통일한 1446년(세종 28년) 건축물을 지을 때의 영조척(營造尺·과거 건축물이나 조영물을 만들때 사용된 길이기준)은 312㎜ 내외였다. 세종대왕 영조척은 상황에 따라 다소 달리 쓰이기는 했지만 18세기 후반까지 건축물을 지을 때 대체적인 기준으로 알려져 왔다. 이 기준은 19세기 들어 일본의 영향아래 1자당 303㎜의 자로 바뀐다. 그런데 최근 세종대왕 당시의 영조척이 19세기 중후반에도 사용됐음을 알려주는 유물이 나왔다.경기 안성 청룡사 대웅전 해체 보수과정에서 확인된 곡자가 발견됐다. ㄱ’자 형태의 자인 곡자는 전통건축에 쓰인 목재와 석재 길이를 측정하거나, 집 전체의 크기와 비례, 치목(治木·나무를 깎는 일)과 치석(治石·돌 다듬는 일)에 필요한 기준선을 부여할 때 사용한다. ..
행방이 묘연했던 신라 명필 김생의 친필 글씨, “3건이나 있었다” 신라 명필 김생의 일화 중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다.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김생의 필법을 이어받은 서예가인 홍관(?~1126)이 송 휘종 연간(재위 1100∼1125)에 진봉사(進奉使·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려고 파견한 사신)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김천 수도암비’에서 확인된 ‘김생서(金生書)’ 글자(왼쪽)와 제작연대를 밝힌 연호인 ‘원화 3년’(808년) 글자(가운데), 그리고 제작목적을 알린 ‘비로자나불’ 글자.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은 “이 비문은 ‘김생서 수도암 비로자나불 조성비’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 제공 ■왕희지의 재림을 몰라본 중국인들 어느날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빈관에 머물고 있던 홍관을 찾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송나라 한림대조 양구와 ..
아라가야 해상세력 부부묘 등에서 쏟아진 1만여점의 유물 무역선까지 건조하고 5세기 해상무역을 주도한 아라가야 지방세력 부부묘인가. 경남 창원 현동에서 670기 가량의 아라가야 최대 규모의 고분군과 1만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거제-마산간 국도’ 건설 구간을 발굴 중인 삼한문화재연구원은 5세기 전반기 아라가야 시기의 부부묘 등 나무덧널무덤, 돌덧널무덤과 배 모양 및 오리·낙타 모양의 상형토기 등이 출토됐다고 4일 밝혔다.국도 건설 공사 구간에서 확인된 유구는 청동기 시대 수혈(구덩이) 주거지 40기와 가야시대 수혈주거지 15기, 나무덧널무덤(목곽묘) 622기, 돌덧널무덤(석곽묘) 35기, 널무덤(토광묘) 17기, 기타유구 200여기 등이었다.창원 현동 아라가야 유적에서 출토된 배모양토기. 노를 고정하는 고리가 없는 범선(돛단배)으로 국제항로를 다니던..
'의문사' 인종의 기일마다 대성통곡한 참선비 김인후, 그의 유언은? “타고난 성품이 맑고 순수했다. 5~6세 때에 문자를 이해하여 사람을 놀라게 했고…용모만 바라보면 속세 사람같지 않았다. 마음이 관대하여 남들과 다투지 아니했으며, 예의와 법도를 실천했다.” 1560년(명종 16년) 1월16일 이 기록한 하서 김인후(1510~1560)의 졸기(부음기사)다. 절대 다수의 부음기사는 고인의 잘잘못을 엄정하게 따졌지만 김인후의 졸기는 그야말로 찬양일색이다. 그런데 그런 김인후의 유언 한마디가 심싱치않다. “(내가 죽은 뒤) 옥과(전남 곡성)현감 이후의 관직은 쓰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김인후는 지금으로 치면 곡성군수(옥과현감)를 지낸 뒤에도 명종 시대에 성균관 전적(정6품), 홍문관 교리(정 5품)와 성균관 직강(정 5품) 등의 관직을 명받은 바 있다. 그러나 “그런 직함은..
숭례문 현판글씨의 주인공은 양녕대군이 맞나 ‘문화재 절도는 공소시효가 없다.’ 25년 전인 1994년 도난 당한 보물 ‘만국전도’(제1008호)와, 11년 전인 2008년 사라진 전(傳)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 목판 및 후적벽부 목판 등이 마침내 회수됐다.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공조수사를 통해 1994년 9월 서울 동대문 휘경동에서 도난당한 ‘만국전도’ 1점과 함양 박씨 정랑공파 문중 전적류 필사본 116책을 회수했다고 29일 밝혔다. 함양 박씨 문중 유물 가운데는 ‘만국전도’를 포함해서 7종 46점이 보물(제10078호)로 일괄지정되어 있다. 경찰은 이 함양 박씨 문중의 전적류를 은닉한 혐의로 ㄱ씨를 검거했다. 전남 담양 몽한각에서 도난당했다가 112년만에 회수된 ‘숭례문’ 목판, 현재 숭례문에 걸린 현판 글씨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