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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고등계 형사를 고문죄로 옥중고소한 '안동 모스크바' 권오설 선생의 분투기 “너희는 개 돼지보다 못하다. 산도 안되고 형무소도 안된다면 시신을 등에 지고 종로거리를 다닐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89년전인 1930년 4월 16일(음력 3월 1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 권오기가 달려갔다. 그러나 형 권오설의 숨이 끊어질 즈음이었다. “형님! 형님!”하고 애타게 부르자 형 권오설은 겨우 눈을 떠서 동생의 목을 감싸고 볼을 비비면서 “오늘은 나랑 같이 자자”고 했다. 동생 오기는 눈물을 삼키며 형무소 문을 나섰다. 다음날인 17일, 동생이 다시 형무소를 찾았을 때 형 권오설은 이미 운명한 뒤였다. 동생은 형무소측에 “살아서 내보내지 않는게 법이라면, 죽어서는 내보내야 하는게 아니냐”고 항의하면서 “시신..
고종을 매섭게 꾸짖은 70대 의병대장, "대체 전하는 무슨 마음을 먹고 …' “폐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무슨 사람이기에 이따위 짓을 합니까.(陛下何爲而爲此)”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황제를 매섭게 꾸짖는 상소문을 올린 이가 있었다.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였다. 상소문의 주인공은 구한말의 의병장인 척암 김도화 선생(1825~1912년)이다. 700자로 구성된 이 상소문은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른 순종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다.“500년 역사의 왕위와 3000리 강토는 선대의 왕으로부터 이어받았습니다. 국가의 통치대권은 폐하의 사유물이 아니며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의 사유물이 아닙니다.”척암은 “그런데 임금인 당신은 나라를 주고받는 일을 어찌 농사 짓는 자가 토지에서 난 곡식을 ..
1000년 고도 경주 월성의 연못터에서는 무엇이 쏟아져나왔나 “기원후 101년(파사왕 22년)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했다. 둘레가 1023보였다.” “487년(소지마립간 9년) 월성(月城)을 수리했다.” 에 등장하는 월성의 축성과 수리 기사입니다. 지금은 조선시대에 쌓은 석빙고만 남아있지만 경주 월성은 101년 축성이후 신라멸망(935년)까지 843년 동안 천년왕국 신라의 왕성이었습니다. 왜 달 월(月)자를 써서 월성이라 했을까요. 월성은 경주 시내 남쪽 남천(문천) 가에 위치한 토성입니다. 울산 방면에서 흘러온 남천이 북류하다가 월성의 구릉에 부딪쳐 서쪽으로 꺾여 흐르는데 그것을 감씨듯이 초승달 모양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월성이라 했던게죠. 바깥 둘레는 2340m 정도입니다. ■1000년 신라왕국의 왕성그런데 신라가 멸망한 이후 500년 가까이 ..
어이없이 보물에서 누락된 성주사 동탑, 85년만에 지위 찾았다 충남 보령 성주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성주사(사적 제307호)는 1400년이 넘은 유서깊은 절이다.백제 법왕(재위 599~600)때 창건되어 오합사로 일컬어지다가 847년(문성왕 9년) 신라 낭혜화상(무염·801~888)이 중창했다. 조선후기 폐사되어 건축물 대부분이 사라진 성주사에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 탑이 많다는 것이다. 경내 북서쪽에 낭혜화상탑비가 버티고 있고, 남쪽부터 오층석탑과 삼층석탑 3기 등이 늘어서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보물에서 누락되었던 충남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이번에 보물 제2021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다.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와 오층석탑(보물 제19호)·중앙 삼층석탑(보물 제20호)·서 삼층석탑(보물 제47..
'원균은요…', 선비 오희문의 헬조선 '임진왜란'고발기 “우수사는 이달초(7월8일) 전라 좌·우 수군과 함께 나가서 적선 80척을 나포해서 700여명의 수급을 베었다. 초 10일에도 또 적선을 만나 80여척을 사로잡았다…”1592년(선조 25년) 7월26일 오희문(1539~1613)의 일기인 에 기록된 한산대첩 승전보이다. 당연히 이순신의 승전기록일 것 같지만 다 그렇지는 않다. 일기에서 전투를 주도했다는 우수사는 바로 경상 우수사인 원균을 지칭한다. 원균의 주도 아래 전장에 나서 대승을 도운 전라 좌·우 수군의 지휘관은 바로 이순신(전라 좌수사)과 이억기(전라 우수사)이다. 에 따르면 주인공은 원균이고, 조연이 이순신과 이억기 같은 느낌이 난다.오희문이 1591년(선조 24년) 11월27일부터 1601년(선조 34년) 2월27일까지 9년 3개월간이나 써내려..
‘양심의 가책’... 미해병장교가 전리품으로 챙겨간 문화재 65년만에 반환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겨울) 본부중대 병사들이 몸을 녹이려고 절 안팎 여기저기서 활활 불을 태우고 있었다…돌과 도끼, 삽으로 마구 빠개진 불경 목판더미가 타고 있지 않은가…나는 부연대장에게 달려가 ‘겨레의 문화재가 타고 있으니 즉시 불을 끄고 경판을 회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고 리영희 교수가 1996년 법보신문에 기고한 컬럼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 보병 제11사단 9연대 청년장교로 참전했던 리영희 교수가 설악산 신흥사에 주둔한 부대의 병사들이 문화재인 불경판들을 불에 태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쟁이 끝난 1954년 10월 강원 속초에 근무하던 미 해병대 소속 리차드 락웰 중위가 부대원들과 수색정찰임무를 수행하다가 신흥사에 들렀다. 신흥사는 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되어 ..
어린이 무덤서 찾아낸 '대가야 버전' 가락국 신화... 사실일까 억측일까 지난주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사적 제79호)에서 발굴된 어린아이 무덤에서 아주 희한한 유물이 나왔는데요. 이를 두고 학게에서 거센 논쟁이 벌어질 것 같네요. 어떤 유물이냐면요. 지난 3월8일 고분군 내 탐방로를 정비하거 무인카메라를 설치하기에 앞서 진행한 발굴조사에서 여러 기의 무덤이 확인됐는데요. 그중 5세기 무렵의 석곽묘에서 다른 유물과 함께 어린아이의 두개골편과 치아가 나왔고, 무엇보다 흙으로 만든 방울을 하나 수습했는데요. 직경이 약 5㎝ 정도되는 아주 작은 방울이어서 심드렁 하고 넘길 수 있는 그저 그런 유물이겠지 했다네요. 대가야 왕릉급 고분이 즐비한 지산동에서 뭐 이 정도의 유물이라면 아무 것도 아닐테니까….고령지산동 고분군 석곽묘에서 발견된 토제방울에 새겨진 그림들. ‘가락국 신화’에 묘..
"미륵사지 탑 복원, 절차가 잘못됐다고? 옛 모습대로 복원하고 싶었을 뿐" ‘20년 이상 진행된 문화유산의 해체·복원이었던만큼 일반적인 공사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가 부적정했다는 감사원의 감사결과에 대해 문화재청은 21일 “1998년부터 장기프로젝트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복원방법이 자주 바뀌는 등 일관성이 없었고 설계를 바꾸는 등의 절차에도 다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20년만에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서탑). 6층인지 9층인지 그 원형을 알 수 없고, 해체된 부재만 3000개에 달해 복원에 난항을 겪었다. 지난 2017년 공사가 마무리됐고, 최근에는 가설덧집까지 완전히 해체됐다. 오는 23일부터 일반에 공개된다.|문화재청 제공그러나 문화재청은 “제대로 해체·복원하기가 까다로워 20년 장기 계획을 세운 미륵사지 석탑의 경우 달리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