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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주엔 황금칠을 한 기와집이 있었다. 880년 9월9일 신라 헌강왕은 월상루에 올라 경주 시내를 바라보며 대신들에게 물었다. “지금 민간인들이 초가가 아닌 기와집을 짓고(覆屋以瓦不以茅) 나무 대신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게 사실이냐”. 대신들은 “백성들의 삶이 풍족해진 것은 모두 전하 덕분”이라 입을 모았다. 는 “경주부터 동해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죽 이어졌으며 초가가 하나도 없었고, 풍악과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는 “전성기 경주엔 황금을 입힌 저택(金入宅) 39채를 포함해서 17만8936호가 있었다”고 정확한 숫자까지 기록했다. 신라시대와 견줄 수 없지만 지금도 경주엔 1만2000채에 이르는 기와집(한옥)이 있다. 정부가 ‘고도(古都)이미지 찾기 사업’의 하나로 적극 장려한 덕분이다. 특히 황남동·인왕동·구황동·교동 등..
경주의 지하수위 상승과 지진 징후 일본에서는 ‘진흙속 메기가 준동하면 지진이 발생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2년 교토의 후시미에 성을 쌓을 때 “반드시 메기를 막을 대책을 세우라”는 특명을 내린 이유였다. 지진의 전조현상으로 운위되는 일본의 지진운. 솜사탕 같은 구름이 지진의 전조라는 이야기다. 이후 지진을 일으킨 메기에게 벌을 내리고, 무거운 돌로 짓누르는 조형물이나 그림이 쏟아졌다. 메기, 즉 동물의 이상행동을 지진의 전조 현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지진의 전조를 허투루 넘기지 않고 대지진의 참사를 막아낸 사례가 있다. 1975년 2월4일 중국에서 일어난 규모 7.3의 하이청(海城) 대지진이다. 중국 지진국이 동물이상행동 정보를 수집한 것이 주효했다. 즉 1974년 12월부터 겨울인데도 뱀이 도로에 나..
무령왕릉 발굴, 고대사의 블랙박스를 열었지만… 1971년 7월 공주에서는 한국 고고학사에 길이남을 발굴이 있었습니다. 공주 무령왕릉 발굴이었습니다.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현현한 무령왕은 '내가 무덤의 주인공'임을 선언하고 나선 첫번째 임금이었습니다. 특히 무덤벽이 완전히 밀봉된채 발견되었기 때문에 도굴의 화를 입지않았다는 점에서도 엄청난 화제를 뿌렸습니다. 무덤벽을 메웠던 벽돌을 들어내자 '1500년동안 밀폐된 공간의 기운'이 바깥 공기와 만나 '쏴아아' 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무덤에는 '사마왕(무령왕)이 62세를 일기로 돌아가셔서 이 자리에 묻혔다'는 내용을 담은 지석이 확인됐습니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이 발굴은 고고학 발굴사에 길이남을 흑역사였기 때문입니다. 하루밤에 유물 수습을 끝내고, 빗질까지 해서 말끔히 정리해버린, 아 이..
진시황릉 왜 발굴을 포기했나 “무덤조성에 죄인 70만명을 동원했다. 구리물을 부어 틈새를 메워 외관을 놓았다. 모형으로 만든 궁궐과 백관, 그리고 온갖 기기묘묘한 형상의 물건들을 설치했다. 자동발사되는 활을 장치했고, 수은을 주입하여 강과 바다를 조성했다. 풀과 나무를 심은 묘지는 마치 산과 같았다.”( ‘진시황 본기’) 기원전 246년 등극한 진시황은 불멸을 꿈꾸며 37년 동안 자신의 무덤을 조성했다. 시황제의 뒤를 이은 진2세는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뒤 무덤문을 닫아버렸다. 1974년 여름, 우물을 파려던 농부들에게 발견된 병마용 군단.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이를 두고 세계 8대 불가사의라 극찬했다. 무덤의 구조를 알고 있던 노예들과 기술자들의 비밀누설이 두려워 모조리 질식사시킨 것이다. 이후 진시황릉 관련 기록들은 처..
황금보검의 주인공은 금수저가 아니었다 1973년 경주 계림로에서 발굴된 무덤(계림로 14호분)은 희한했습니다. 적석목곽분치고는 상당히 작았는데, 그 안에 성인 남자 두 명이 누워있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오른쪽 남자는 대도를 찬 흔적이 있었는데, 왼쪽 남자가 달고 있던 유물이 군계일학이었습니다. 길이 36㎝에 불과했지만 눈부신 황금보검이었습니다. 분명 신라 고유의 제품은 아니었습니다. 1928년 옛 소련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에서 확인된 검의 파편과 비슷했습니다. 이밖에도 비슷한 양식의 벽화 그림들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무덤의 주인공은 왜 외국산 황금보검을 차고 있었을까요. 서역인이 이역만리 신라의 수도 경주에 묻힌 것일까요. 아니면 신라인일까요. 신라인이라면 당시로서는 해외명품이었던 황금보검을 찰만큼 금..
훈족-흉노-신라가 황금보검의 계보인가 1973년 경주 계림로에서 발굴된 무덤(계림로 14호분)은 희한했습니다. 적석목곽분치고는 상당히 작았는데, 그 안에 성인 남자 두 명이 누워있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오른쪽 남자는 대도를 찬 흔적이 있었는데, 왼쪽 남자가 달고 있던 유물이 군계일학이었습니다. 길이 36㎝에 불과했지만 눈부신 황금보검이었습니다. 분명 신라 고유의 제품은 아니었습니다. 1928년 옛 소련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에서 확인된 검의 파편과 비슷했습니다. 이밖에도 비슷한 양식의 벽화 그림들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무덤의 주인공은 왜 외국산 황금보검을 차고 있었을까요. 서역인이 이역만리 신라의 수도 경주에 묻힌 것일까요. 아니면 신라인일까요. 신라인이라면 당시로서는 해외명품이었던 황금보검을 찰만큼 금..
'밀정' 속 독립투사 김시현의 이승만 암살미수 사건 2015년 5월 최근 매우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이 공개됐다. 미국 뉴저지에 사는 수집가(김태진 국제지도수집가협회 한국대표)가 미군 첩보부대(CIC)의 사진첩에 수록된 사진을 언론에 배포한 것이다. 1952년 6월25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일어난 이승만 대통령 암살시도 장면을 포착한 찰나 사진이다. 6·25 2주기 행사에서 연설 중이던 대통령의 바로 뒤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권총을 겨누기 직전의 극적인 순간이 담겨 있다. 범인은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원으로 활약했던 독립투사 출신의 호호백발 노인 유시태(당시 62)였다. 하지만 이 저격사건은 미수에 그쳤다. 유 노인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발사되지 않은 것이다. 63년 만에 공개된 사진과 관련된 뉴스는 이렇게 과거의 가십거리 쯤으로 거론된 뒤 마무리됐다. 의열..
'박애주의자' 묵자는 왜 독가스를 발명했을까. 중국이 최근 발사한 양자위성에 모쯔, 즉 묵자(墨子)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묵자는 바로 겸애론을 주장한 춘추전국시대 사상가입니다. 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은 왜 인공위성 이름에 공자·노자와 어깨를 나란히 한 철학·사상가의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런데 이유가 있었습니다. 묵자는 철학·사상가이기도 했지만 불세출의 과학자이면서 무기개발자이기도 했습니다. 묵자는 기하학·역학·광학·수학에서 뛰어난 이론을 전개했으며,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무기를 여럿 개발했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독가스를 전쟁에 사용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묵자가 누구입니까.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고 외쳤던 겸애론자 아닙니까. 평화와 사랑을 부르짖으면서 독가스를 만들고, 그 외에 다른 신형무기까지 개발했다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