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래자 思來者

또 한 분의 여왕, 진덕여왕 무덤 찾았나

태종무열왕, 흥덕왕, 원성왕, 선덕여왕…. 

신라 56대 국왕 중 거론된 임금들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무덤의 주인공이 분명하거나 거의 확실한 이들이다. 제29대 태종무열왕릉은 경주 서쪽의 서악동 구릉에 있다. 왕릉의 동북쪽에 세워진 비석(국보 제25호) 중앙에 전서체로 ‘태종무열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8자가 양각되어 있다. “내가 이 무덤의 주인공”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도당산 고분의 근경. 경주 남산에는 8기의 ‘전칭’ 왕릉이 존재하고 있다.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은 남산 끝자락 도당산에 위치한 고분을 진덕여왕의 무덤으로 판단했다.|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 제공 

경주 안강읍 육통리 산 42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제42대 흥덕왕릉(사적 제42호)에서도 전서체로 ‘흥덕(興德)’이라고 쓰인 비편들이 확인됐다. 그러니 주인공은 흥덕왕(재위 826~836)이 분명하다. 경주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왕릉(사적 제26호)의 주인공은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이 확실해보인다. 주인공을 알리는 명문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원성왕이 재위 14년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숭덕사) 남쪽에 화장했다”고 했다. 왕릉의 인근에 바로 숭복사터가 있다.

경주 보문동의 낭산 남쪽 사면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왕릉(사적 제182호)의 주인공은 제28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이 확실하다. 물론 명문은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 ‘선덕왕조’와 <삼국유사> ‘선덕여왕 지기삼사조’에 “왕을 낭산에 장사지냈다”고 일관되게 나온다. 

도당산 고분의 북쪽에 보이는 월정교와 월성 일부. 고분과 월정교 거리는 직선으로 500 미터 정도 떨어져있다.|박홍국 관장 제공

나머지 임금들의 무덤은 대개가 추정이거나 전(傳·알려진)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수많은 절터와 석불, 석탑들도 산 전체가 거대한 불국토를 형성했다는 경주 남산 자락에도 8기의 ‘전칭(傳稱) 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전 헌강왕릉(재위 875~886)과 전 정강왕릉(886~887), 전 지마왕릉(112~134), 전 경애왕릉(924~927), 전 일성왕릉(134~154)이 보이고, 유명한 삼릉(사적 제219호)의 주인공은 아달라왕(154~184), 신덕왕릉(912~917), 경명왕릉(917~924)으로 ‘전(傳)’해진다.

그런데 남산자락에 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고분 주인공이 신라 제28대 진덕여왕(재위 647~654)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불교고고학을 전공한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은 신라사학회가 발간하는 학술지 <신라사학보> 최신호에서 그동안 학계에서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한 지름 15m 안팎의 신라 고분 2기를 소개하는 논문(‘경주 남산 약수곡과 도당산 서북록(西北麓)의 왕릉급 단독 고분’을 발표했다.

박관장은 그중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4년 발간한 ‘경주 남산 정밀학술조사 보고서’에는 삼국시대에 축조한 ‘식혜곡 고분’으로 기술한 고분 1기에 주목했다. 박관장은 이후 체계적인 보호와 관리를 받지 못한 이 고분의 이름을 ‘도당산 서북록 고분’이라 이름짓고, 이 무덤의 주인공이 ‘진덕여왕’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진덕여왕의 선왕인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은 이번에 박홍국 관장이 진덕여왕릉으로 지목한 도당산 고분보다 약간 규모가 크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고분은 남산의 끝부분인 도당산에 자리잡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4년 당시 “이 고분의 직경은 약 15m, 잔존높이 4.5m의 봉토분이며 도굴흔적이 역력했다”고 기술했다. 박홍국 관장이 전문기관과 함께 다시 고분을 측량해보니 무덤형태는 타원형으로, 긴 지름이 19.8m이고 짧은 지름이 16.1m로 계측됐다. 높이는 약 6.5m였다. 

박관장은 “봉분 꼭대기에 오르면 월정교와 월성 서쪽 부분이 한눈에 들어와 단번에 위치가 비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며 “아마 월성에서도 이 무덤이 또렷이 보였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관장은 “우선 남산에 자리잡고 있는 ‘전’ 신라왕릉 8기와 비교해서 이 ‘도당산 서북록 고분’의 규모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즉 ‘전’ 왕릉고분 8기의 지름이 대략 12~20m이고, 봉분의 높이는 3.3~5.2m 가량인데, 도당산 고분은 16.1~19.8m로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규모로 봐서는 신덕왕릉(19.5~19.9m)과 경명왕릉(19.1~19.5) 다음 순번 정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당산 고분도 왕릉급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누구일까. 박관장은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또 한사람의 여성지도자인 진덕여왕을 꼽았다.

현재 진덕여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이 있기는 하다. 경주 북쪽 현곡면에 있는 ‘전 진덕여왕릉’(사적 제 24호)이다. 하지만 이 무덤에서는 결정적인 흠결이 보인다. 8세기 중반 이후 나타나는 십이지신상이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최근 진덕여왕(재위 647~654) 무덤일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박홍국 관장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진덕여왕을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 주목했다. 신라시대 사로(斯盧) 6부 가운데 하나인 사량부는 경주 남천 남쪽의 서남산 일대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바로 도당산 고분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박관장은 또 진덕여왕의 선대인 선덕여왕의 무덤을 분석했다.

낭산에 자리잡고 있는 선덕여왕릉의 지름은 약 23m 정도의 대형고분이다. 도당산 고분의 규모보다 선덕여왕릉이 크다. 그러나 박 관장은 “진덕여왕의 재위기간이 7년(647~654)에 불과하고 직계왕자가 계승한 것도 아니기에 선덕여왕의 규모를 넘지는 못했을 것”이라 해석했다. 박 관장은 “남산의 이른바 ‘전칭’ 왕릉 가운데 과거 사량부에 속한 지름 15m 이상의 고분은 전(傳) 일성왕릉과, 바로 이 도당산 고분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전 일성왕릉’은 “경애왕이 927년 승하하자 해목령(남산의 북쪽)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 ‘경애왕조’의 내용에 따라 경애왕릉으로 지목되고 있다. 박관장은 “전칭 왕릉들을 하나하나 제외시키면 사량부에 장사지냈다는 진덕여왕의 무덤만 남게 된다”고 결론 내렸다. 박관장은 “도당산 고분 서쪽 250m 거리에는 7세기 전반에 창건된 것으로 판단되는 천관사 터 역시 주목되는 유적”이라고 전했다. “신라인들이 바로 이 절에서 도당산 고분, 즉 진덕여왕릉과 관련한 불사를 봉행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박관장은 이어 “도당산 고분 외에도 남산 약수곡 등산로 출발 지점에서 약 300m 정도 걸어가면 닿는 무덤도 왕릉급 고분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이 고분은 지름이 15.8∼16.4m이고, 봉분 높이는 약 4m다. 박관장은 “능선의 끝부분이 급경사를 이루고 고분 앞쪽의 평지가 좁다는 점에서 경주 부지리의 전 경덕왕릉 등과 비슷하다”고 추정했다. 박관장은 “이 발표문은 남산에 존재하는 ‘전칭’ 왕릉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