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던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의 해체·보수 작업이 마무리되어 30일 오후 2시 준공식이 열린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날 전북도 및 익산시 등과 공동으로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정비 마무리를 기념하고 그 성과와 의미를 알리는 준공식을 연다고 밝혔다.
그동안 진행되었던 미륵사지 석탑(서탑)의 해체·보수 사업을 숫자로 풀어본다.
수리 전(왼쪽)과 후의 미륵사지 석탑 사진. 1999년 해체·복원결정 후 만 20년만에 복원됐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639, 1380
지난 2009년 1월14일 탑의 심주석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공을 확인했다. 사리공에는 금동제사리호와 함께 탑을 세우게 된 이력을 새긴 금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긴 글씨의 내용은 깜짝 놀랄만 했다. 이 탑이 ‘백제왕후 사택적덕의 딸(왕후)’이 세웠다는 것이었다. 선화공주와 남편인 무왕이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내용은 어찌 된 것인가. 하지만 아직까지 이 탑(서탑)을 세운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두고 학계에서는 여전히 논쟁중이다. 다만 이 금판에는 “백제왕후가…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1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대목이 분명히 새겨져있다. 639년이면 무왕 40년이다. 그러니 석탑 공사가 끝난 올해는 이 탑을 건립하고 사리를 봉안한 지 꼭 13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숫자로 풀어본 미륵사지 석탑 복원
▶20, 120.000
미륵사지 석탑은 국내 최고(最古), 최대의 석탑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는 과정의 형식이므로 석탑인데도 목탑의 공법을 따르고 있다. 그러니 돌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탑은 1,400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6층 일부만 남았고, 1915년 일제가 붕괴를 막기 위해 싸발라 놓은 콘크리트에 무겁고 늙은 몸을 기댄 채 아슬아슬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방치되다가 1998년 구조안전진단에 따라 콘크리트가 노후됐고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진단결과가 나왔다. 1998년 4월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해체보수가 결정됐다. 그러니 올 4월은 해체·보수가 결정된지 딱 20년 되는 것이다. 김현용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는 “20년 동안 보수공사에 투입된 연인원은 12만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미륵사에는 3개의 탑과 3개의 금당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번에 복원된 탑은 서탑(왼쪽)이다. 가운데 중앙탑은 복원되지 않았고 동탑은 1990년대 복원됐다. 전문가들 가운데는 중앙탑과 금당은 선화공주가, 동서탑과 동서금당은 사택왕후가 지었을 것이라는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185, 4
1915년 일제가 미륵사지 석탑의 붕괴를 막기 위해 싸발라놓은 콘트리트의 무게다.
지금까지는 일제가 흉물스럽게 콘크리트로 싸 바른 것을 비난해왔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콘크리트 공법은 최첨단 기법이었다. 콘크리트는 기원전 300년 무렵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기 포틀랜드 시멘트(Portland cement)의 발명 이후 1867년 프랑스에서 철망으로 보강된 콘크리트가 본격적인 콘크리트 공법의 시작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니까 1915년 일제가 미륵사지탑 구조보강에 활용한 콘크리트 기법은 당대의 기준으로는 첨단기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훗날 콘트리트의 약점이 특히 석조문화재에서 확인된다. 석재에 붙은 콘크리트가 표면의 풍화를 일으키고, 또 탄산칼슘을 만들어 석조문화재가 하얗게 변하는 백화현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구부재를 재활용하려면 석재에 늘어붙은 콘크리트를 한알갱이 한알갱이 떼어내야 했다. 미륵사지석탑 해체·보수 때 그런 약점이 드러났다.
연구소측은 원래 콘크리트의 두께를 30∼40㎝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최대 4m나 됐다. 콘크리트 양이 185t이나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석재에 늘어붙은 콘크리트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수작업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미륵사지 석탑 1층 내부 심주석에 마련된 사리공에서 유물을 수습하는 모습.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2400, 1627, 1830
비단 콘크리트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연구소측은 탑을 구성하는 부재를 당초 1000개 정도로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해체해보니 실제로는 적심 부분만 제외해도 무려 2400개에 달했다. 붕괴위험 속에 석재는 갈수록 늘어나고, 옆에서 보면 속 터질 노릇인 수작업으로 진행되다 보니 시간과 예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제 6층으로 마무리한 탑의 복원에 사용된 부재는 총 1627개였고, 무게만 해도 1830t에 이른다.
▶81
옛부재의 재사용 비율은 81%에 이른다. 최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추정에 의한 복원이 아닌, 원래의 부재를 81%까지 최대한 재사용하여 석탑의 진정성과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미륵사지 석탑 조성 경위, 무왕의 부인이 선화공주가 아니라는 사실 등을 기록한 ‘금제 사리봉안기’.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사실 문화유산 복원의 핵심덕목은 ‘원형 복원’이다. 따라서 복원의 성패는 옛 부재를 최대한 쓰면서도 구조적인 안전성을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이다. 연구소측은 당초 탑의 안전을 위해 새로운 부재를 많이 쓸 예정이었지만 중간에 계획을 수정했다. 당초 설계대로 시공하다보니 새로운 석재가 너무 많다는 판단이 들어 3층부터는 원래 탑의 적심에 들어있던 옛 석재를 재활용하기로 했다. 즉 3층 정도부터는 옛 석재를 써도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석탑의 신·구 부재 비율은 38%(신 부재)와 62%(구 부재)이다. 그러나 해체된 석탑에서 수습된 옛 부재를 기준으로 치면 81%를 재활용했다.
▶24.000.000.000
당초 미륵사지 석탑 해체·복원은 2007년이면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콘크리트 양은 물론 해체된 부재 역시 엄청나게 늘어나자 공기와 예산이 계속 수정됐다. 공사는 2007년에서 2014년으로 연기됐고, 급기야 이 순간까지 늘어지게 된 것이다. 예산도 당초 80억원에서 140억원으로, 급기야 최종 240억원으로 마무리됐다.
미륵사지석탑을 복원하는 모습. 부재가 2400개나 나왔고, 해체된 콘트리트만 185톤이나 되는 난공사였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9947
탑의 사리공에서는 건립연대와 주인공 등 탑 조성경위을 새긴 금판 사리봉안기 외에도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금동제 사리외호와 내호, 그리고 각종 구슬과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그릇·병) 6점도 출토됐다. 금동제 사리외호와 내호는 모두 동체의 허리부분을 돌려 열어야 하는데, 이것은 동아시아 사리기중 유사사례를 찾기 어려운 구조이다. 청동합은 구리와 주석 합금으로 크기가 다른 6점으로 구성됐다. 청동합 중 하나에 새겨진 ‘달솔 목근(達率 目近)’이라는 시주자가 보인다. 달솔은 백제 16관등 중 제2품이다. 백제 최고위 관리가 시주한 그릇이라는 뜻이다. 이밖에도 은제관식과, 금괴, 금제고리, 칼, 유리 및 구슬류, 다양한 직물류 등 다양한 유물이 수습됐다. 유리 한알 한알까지 계산하면 유물 양은 9947점이 이른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올해말까지 그간의 연구성과와 해체보수 과정을 기록한 수리보고서를 발간해서 전체사업을 완료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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