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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동래읍성 下 ㆍ조총 공세 속절없이 함락 왜병들 살육에 ‘아비규환’ “조선을 정벌할 것이니 단단히 준비하라.” 1592년 1월, 일본 전역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출병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린다. 왜병의 총병력은 30만명이었다. 마침내 4월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총사령으로 한 선봉군 2만 여 명은 700척의 전함에 분승,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강토를 피로 물들인 치욕의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① 즉시 길을 비키라는 왜군의 회유에 맞서 “싸워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假道難)”는 내용을 쓴 목패를 던지는 송상현 부사. ②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 ③ 왜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모습. ④ 송상현 부사의 순절 직전 모습. 조복을 입고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린 뒤..
(22) 동래읍성 上 ㆍ해자 바닥에 수북이 왜병 만행 ‘몸서리’ 1731년(영조 7년) 어느 날. 동래성 수축을 위해 공사를 벌이던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은 경악했다.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이 뻔한 백골들이 다수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포환(砲丸)과 화살촉들이 백골 사이에 띠를 이뤘다. 이에 숙연해진 정언섭은 백골들을 수습한 뒤 비문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제전(祭田)을 설치했다. 정언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향교에 넘겨 해마다 유생들에게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여지집성·輿地集成’ 기록에서) 도랑에 묻힌 415년 전의 역사 2005년 발굴된 동래읍성 해자의 모습과 출토유물들. 1592년 4월15일 벌어진 동래성 전투의 참화를 보여준다. 그로부터 꼭 274년 뒤인 2005년 4월 어느 ..
(19) 부산 영도 동삼동패총 유적 下 ㆍ신석기문화 위용 드러낸 ‘동삼동 팔찌 수출단지’ 최고급 장신구 ‘투박조개 팔찌’ 유물 무더기로 출토 일본 흑요석 수입해 석기제작 왕성한 교역거점 추정 조개가면·토우 등도 발견… 한국 고고학계 산실로 대체 동삼동 패총(貝塚)이 무엇인데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 동삼동 팔찌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조개팔찌(패천). 한반도산 조개팔찌와 열도산 흑요석이 교역의 주대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흔히 ‘조개무지’라 하는 패총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오랜 기간 쌓여 만들어진 유적이다. 한마디로 ‘선사시대 음식물 쓰레기장’인 셈이다. 약 1만 년 전 신석기시대에 들어오면서 바닷가에 모여살던 사람들이 남긴 생생한 삶의 흔적이다. 원래 우리나라의 땅은 산성(酸性)이 많이 함유된 특징 때문에 동물이나 물고기뼈를 비롯한 ..
(18) 부산 영도 동삼동패총 유적 上 ㆍ불모의 한국 고고학, 선진발굴기법에 눈뜨다 “저기에 해동여인숙이 있었는데…. 횟집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 어디갔노?” 10월15일 가을 한낮. 더위 먹은 가을인가. 햇살이 따가웠던 부산 영도 동삼동 패총전시관. 전시관 직원 최정혜씨의 개략적인 설명을 듣고는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과 기자가 밖으로 나왔다. 조 관장이 스물여덟 ‘젊은 날의 초상’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긴다. 1999년 부산박물관의 발굴현장 설명회 모습. 어느 고고학자의 회상 “1969년 군대를 다녀와 직장을 잡은 것이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었지. 그런데 7개월 만인 8월 초년병 햇병아리 학예사인 나는 동삼동패총 발굴을 ‘명’받고 내려왔어요.” 조 관장의 추억담을 들으려는데, 급경사가 진 전시관 밖에 웬 젊은이들이 긴 줄을 선다. “저 ..
(17) 북한강변 화천 용암리·위라리 유적 ㆍ‘3000년전 청동기마을’ 정밀한 사회구조 갖췄다 BC12세기부터 1000년이상 지속된 대규모 취락 31평형 대형 주거지·선반·벤치·침상생활 흔적 마을행사 회의하고 석기공장·석기수리점 구비 "어! 여기 토기편이 있네. 어! 돌도끼도 보이네.” 2001년 1월. 강원 화천군 하남면 용암리 일대를 둘러보던 지현병 당시 강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의 눈이 반짝했다. 북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용암리 청동기 타운. 이 일대 전체가 선사시대 유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알알이 박혀있는 선사시대 유물들이 보였던 것이다. “수상한 곳이었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들러본 겁니다. 바로 윗동네에 있는 위라리 적석총도 조사할 겸 해서 왔던 것이고….” 수상한 충적대지 자세한 사연을 ..
(16) 청주 신봉동 유적 下 ㆍ철강제국 백제를 낳은 鐵기술의 산실 “속이 확 트이네.” 햇살이 따가웠던 9월. 청주 신봉동 유적을 떠난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과 기자는 차용걸 교수(충북대)와 함께 북쪽 평야지대를 달렸다. 한 3㎞쯤 시원한 바람을 맞고 달렸을까. 눈길을 왼쪽으로 돌리는 순간 차 교수가 외친다. “저기가 바로 정북동 토성입니다.” 이런 곳에 토성이라니. 금강 최대의 지류인 미호천과 무심천이 합류하는 이른바 까치내의 상류 너른 평야지대에 조금은 생뚱맞은 자세, 즉 사각형 형태로 조성된 평지토성이다. 강(미호천)과 접해 있고, 조성된 해자(垓子)와 입지조건…. 청주에 있는 풍납토성 성을 둘러보던 기자는 왠지 소름이 돋는다. “이거 풍납토성, 육계토성과 비슷한 입지가 아닌가요?” 한강변에 붙어있는 풍납토성은 물론, 임진강..
(15)청주 신봉동 유적 上 ㆍ도굴로 짓밟힌 무덤서 만난 ‘철강강국 백제’ “허허, 술 덕분이네.”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과 차용걸 교수(충북대)가 껄껄 웃는다. 두 사람은 1982년의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한성백제의 최전성기 때 조성된 청주 신봉동 유적 발굴현장. 도굴의 참화 속에서도 백제 철기군의 위용을 엿볼 수 있는 철제 무기류가 대거 출토됐다. | 충북대박물관 제공 ‘숙취 덕분에’ 발견해낸 백제의 역사 그해, 그러니까 1982년 3월21일 일요일 아침. 차용걸 교수의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속도 영 메스꺼웠다. 전날 마신 술이 덜 깼기 때문이었다. 대학(충남대 사학과) 동창생인 심정보(한밭대 교수)·성하규(대전여상 교사) 등과 청주지역 답사에 나서기로 한 날. “원래는 청주 상당산성(백제시대 때 초..
(14)국보 205호 중원고구려비 下 중원 | 이기환선임기자 ㆍ돌에 새겨진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옛 기록을 보면 의미심장한 일화가 많아요.”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이 빛바랜 책을 하나 건넨다. 1979년 중원고구려비 발견 직후 단국대가 만든 학술지 ‘사학지(史學志) 제13집’이다. 당대를 풍미했던 학계원로들의 발표논문이 수록돼 있다. 30년 남짓 지난 지금, 당시의 논문들을 능가할 만한 연구가 진전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기자의 눈에 띈 것은 1979년 6월9일 7시간 동안 펼쳐진 중원고구려비 학술좌담회 내용이다.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입석마을의 중원 고구려비 전각. 관광객들이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를 살펴보고 있다. “대박사는 없고 소박사만 왔나봐” 이병도·이기백·변태섭·임창순·김철준·김광수·진홍섭·최영희·황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