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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월맹의 구정 대공세 ㆍ전투 졌지만 심리전선 ‘대승’ 1968년 1월말 베트남은 모처럼 구정(舊正·Tet)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월맹(북베트남)측이 구정을 맞아 1주일간의 휴전을 선포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월맹군의 기만전술이었다. 1월31일 미명(未明)을 기해 월맹의 대공세가 불을 뿜었다. 월남(베트남) 전역의 14개 성(군) 주요 도시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 것이다. 물론 이 구정대공세는 월맹의 완패로 끝났다. 월맹은 참전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3만5000여명이 사살됐고 5800여명이 생포됐다. 반면 미군의 손실은 전사자 534명, 부상자 2547명에 불과했다. 이 전투를 기획한 것은 물론 월맹의 지도자인 호찌민과 국방장관 보응 우엔 지압이었다. 1967년에 이르러 월남은 군사력이 미군과 월남군, 한국군, ..
1968년 푸에블로호 납치 ㆍ미국의 치욕 코흘리개 시절, 청운동 바로 눈 앞에서 1·21사태를 바라보면서도 빅 머로 주연의 유명한 TV드라마 를 떠올렸으니 뭘 알았겠냐만 1968년 1월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 분위기에 휩싸였다. 1·21 사태 이후 이틀도 지나지 않은 23일 낮. 원산 앞바다에서 정찰활동 중이던 미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초계정에 의해 납치된다. 미 공군의 요청을 받은 한국 공군기 3대가 즉각 출격했지만, 푸에블로호는 북한의 방공망에 진입한 뒤였다. 미국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원산만 근처로 급파하고 핵폭탄 사용까지 불사한다는 복안을 세웠지만, 미국의 대응은 거기까지였다. 베트남전에서도 고전 중이었는데 한반도까지 확전된다면 미국으로서는 너무 큰 부담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11개월간의 협상 끝에 영해 침범..
해방전까지 신문 1면을 장식한 사건들-<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김성희 해설 | 서해문집 생명을 봉헌함은 지사의 본분이거늘~이렇게 학대를 가하는 일은 부당한 일이라~내 무리를 대신(大臣)으로 대우하라 하여~.”(대한매일신보 1909년 11월20일) “신천리(信川里)와 잠실리(蠶室里) 두 동리는 약 1000호에 약 4000명이 물 속에서 모두 절명상태에 있다는데~살려달라는 애호성(哀號聲)이 차마 들을 수 없이….”(1925년 7월18일 조선일보 호외) 실시간 정보홍수에 빠져있는 요즘이지만 새벽에 배달되는 신문에서만 오로지 시대를 읽고 역사를 읽었던 때가 있었다. 이 책은 바로 우리 백성이 미증유의 질곡에서 헤매던 바로 구한말~일제강점기~해방 때까지의 신문기사 141건을 통해 당대의 하루하루 역사를 읽어냈다. 기실 우리는 ‘한일합방’, ‘3·1운..
1979년 팔레비 이란 국왕 망명 ㆍ민중 혁명의 승리 1979년 1월16일 낮. 이란의 팔레비 국왕이 눈물 속에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망명 소식에 이란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2월1일 귀국한 종교지도자 호메이니는 “이란은 알라의 뜻과 지시만 따르는 이슬람 공화국이 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팔레비는 53년 미국 CIA가 주도한 쿠데타에 힘입어 권좌에 오른 뒤 미국의 후원 아래 야심찬 근대화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팔레비는 비밀경찰 등을 동원해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자행했다. 또한 이슬람의 전통을 근대화의 걸림돌로 치부하면서 극심한 반발을 샀다. 더구나 그의 근대화는 다국적 기업과 절대왕권에 기생하는 세력을 길러놓았다. 신흥 부유층의 무절제와 극빈층의 신음 사이에서 축적된 모순은 결국 혁명으로 표출됐다. 78..
(27)‘조선의 부활’ 알린 청진동 ㆍ도심 한복판서 끄집어 낸 ‘시전’ ㆍ‘서울 600년’ 서민의 삶 켜켜이 2003년 12월 말. 문화운동가 황평우씨가 종로 청진동을 기웃거렸다. 건설사(르메이에르 건설)가 주상복합건물 사업시행을 위해 낡은 기존 건물들을 철거하고 있었다. 재개발 면적은 8665㎡.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3만㎡ 이상의 공사를 벌일 때 문화재지표조사를 거쳐야 한다. 그러니 이곳은 지표조사 없이 공사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폭삭 주저앉은 그대로 확인된 조선시대 시장인 시전(市厘)의 행랑(行廊). 조선정부는 시전을 개설하면서 방-마루-방-창고를 하나의 단위(40평 정도)로 끊어 일반분양한 것으로 보인다. 장사가 잘 되는 이는 바로 옆 가게를 사서 확장한 흔적도 엿볼 수 있다. 모습을 드러낸 조선의..
(26) 인천 계양산성 ㆍ1600년전 백제인의 논어책을 엿보다 2005년 5월11일.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인천 계양산성 내부의 집수정을 발굴하고 있었다. 계양산성은 풍납토성 발견(1997년)과 함께 이 교수가 눈여겨봤던 곳. 도로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엔 바다와 강(江)이 고속도로 역할을 했을 것이 아닌가. 이 교수는 한성백제시대(BC 18~AD 475년) 중국과의 교역 관문일 것 같은 한강 하구의 계양산성을 발굴하게 된 것이다. “체육시설이 있었던 이곳(집수정)은 골짜기였기 때문에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었어요. 그러니 집수정이 있었던 게지. 겉으로 보기에 지름이 13m 정도 돼보였는데….” 조심스레 층위별로 흙과 돌을 걷어내며 바닥까지 발굴하고 있을 때. “눈앞에 나타난 한성백제시대 ‘논어’ ” 인천 계양산성에서 발굴된 집..
(23) 동래읍성 下 ㆍ조총 공세 속절없이 함락 왜병들 살육에 ‘아비규환’ “조선을 정벌할 것이니 단단히 준비하라.” 1592년 1월, 일본 전역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출병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린다. 왜병의 총병력은 30만명이었다. 마침내 4월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총사령으로 한 선봉군 2만 여 명은 700척의 전함에 분승,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강토를 피로 물들인 치욕의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① 즉시 길을 비키라는 왜군의 회유에 맞서 “싸워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假道難)”는 내용을 쓴 목패를 던지는 송상현 부사. ②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 ③ 왜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모습. ④ 송상현 부사의 순절 직전 모습. 조복을 입고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린 뒤..
(22) 동래읍성 上 ㆍ해자 바닥에 수북이 왜병 만행 ‘몸서리’ 1731년(영조 7년) 어느 날. 동래성 수축을 위해 공사를 벌이던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은 경악했다.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이 뻔한 백골들이 다수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포환(砲丸)과 화살촉들이 백골 사이에 띠를 이뤘다. 이에 숙연해진 정언섭은 백골들을 수습한 뒤 비문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제전(祭田)을 설치했다. 정언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향교에 넘겨 해마다 유생들에게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여지집성·輿地集成’ 기록에서) 도랑에 묻힌 415년 전의 역사 2005년 발굴된 동래읍성 해자의 모습과 출토유물들. 1592년 4월15일 벌어진 동래성 전투의 참화를 보여준다. 그로부터 꼭 274년 뒤인 2005년 4월 어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