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360) 썸네일형 리스트형 서울시의 무지와 안하무인' “이렇게 안하무인일 수가….” 26일 문화재위원회 사적 및 근대문화유산 분과회의가 열린 국립고궁박물관 회의실. 백발이 성성한 문화재위원들이 서울시의 시청사 철거 사실에 입을 모아 분노했다. 문화유산 정책을 담당하는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기자에게 짙은 절망감을 뱉어냈다. “이거 정말 못해먹을 노릇이네요.” 특히 이날 문화재위원회가 사적 가지정 결정을 내리자 김효수 서울시 주택국장은 “문화재위원회가 일부 강경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발언했다. 이 대목에 이르자 문화재위원들은 귀를 의심했다. “정말입니까? 21명이나 되는 문화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결정 내린 것인데 우리를 두고 일부 강경세력 운운했다고요?” 어떤 사안이 벌어질 때마다 편을 가르고 좌우·흑백논리로 ‘무슨 세력 운.. (10)나주 복암리 下 - 마한의 수수께끼 결국 마한은 8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지해온 고대국가라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백제와는 다른 문화를 유지했다고 백제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 즉 고대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백제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800년간이나 정치체를 유지했다면 왜 마한과 관련된 역사기록은 없을까.’ 차근차근 풀어보자. 마한에 대한 기존의 통설을 살펴보자. ■ 마한의 역사가 800년이라고? “마한은 BC 2세기 무렵 한반도 중서부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백제가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점차 흡수됐으며, 4세기 후반에는 영산강 유역에 남아있던 잔여세력까지도 백제에 통합되었다.” 이 통설은 두계 이병도가 일본서기에 나온 반설화적 기록을 해석한 이후 구축됐다. “(왜가) 침미다례(枕彌多禮·전남 지방의 마한 소국.. (9)나주 복암리中- 무덤박물관이 던진 고대사 실마리 나주 복암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 ㆍ마한·백제 고분 틈새 일본식 무덤의 정체는? 1996년 영산강 유역에 자리잡은 나주 복암리 3호분의 발굴성과는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럴 만했다. 3m에 가까운 대형옹관이 잇달아 출토되고(26기), 금동신발과 장식대도, 은제관식 등 영산강 유역과 백제·일본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으니 말이다. 어디 유물만이랴. 하나의 분구(봉분)에 41기의 무덤이 아파트처럼 조성된 복암리 3호분. 동일집단이 3~7세기 사이 400년 동안 조성했다. 마한계 옹관묘에서 왜계로 평가되는 초기 횡혈식 석실분, 그리고 백제 석실분까지 차례로 조영됐다. 고분박물관으로 일컬어진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3호분 한 분구에서 41기나 되는 다양한 무덤들.. (8) 나주 복암리 上 - 고대사의 블랙박스 열리다 나주 복암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 ㆍ영산강 유역 잊혀진 역사 ‘옹관’으로 모습 드러내다 1995년이었다. 전남 나주시는 영산강 중류, 즉 나주 다시면 너른 들에 자리잡고 있는 복암리 고분군(당시 전라남도 기념물 136호)에 대한 정비복원을 계획했다. 특히 이 가운데 3호분은 어느 종가의 선산이었는데, 주변 경작으로 계속 분구가 유실되어 나가자 복원계획을 세운 것이다. 기초조사는 전남대 박물관이 맡았다. “그때까지는 3호분을 비롯해 4기의 고분이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칠조산(七造山)이라고 했어요. 분구(봉분)가 7개가 있었다는 얘긴데, 3기는 1960~70년대 경지정리로 삭평된 상태였죠.”(임영진 전남대 교수) ■ ‘처녀분이다!’ 그 해 11월27일부터 한 달간 실시된 당시의 조.. (7) 2000년전의 무역항 해남 군곡리 ㆍ해남은 고대 동북아의 ‘물류허브’ 였다 1983년 3월 어느 날. 황도훈이라는 해남의 향토사학자가 있었다. 해남문화원장을 지내면서 고향 땅을 답사하는 것을 여생의 일로 삼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군곡리 마을을 지나던 황씨의 눈길이 멈췄다. 무슨 옹관 같은 유물이 눈에 띈 것이었다. 게다가 불에 탄 흔적도 있었다. ■ 2300년 전 음식물 쓰레기장 ‘이건 야철지 아닌가.’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우던 그의 눈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는 행장을 꾸려 서울로 올라가 서울신문사를 찾았다. “회사 논설위원 중에 해남 사람이 있었는데, 황도훈씨와 친구였지. 그 인연으로 우리 신문을 찾아온 거지요.”(황규호 전 서울신문 기자) 황 기자는 즉시 황도훈과 함께 해남으로 내려갔다. 최성락 목포대 교수와도.. (6) 1만년전의 세계 제주 고산리(下) 제주 고산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 ㆍ1만년전 땅을 밟고 내려와 온난화의 바다에 갇히다 1만1000~1만년 전 제주로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후기 구석기 최말기(세형돌날문화)~신석기 여명기(고토기문화)를 산 경계인들이었다. 출발지는? 고산리 신석기 유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강창화(제주문화예술재단)는 지금의 아무르 강 유역이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식물성 고토기의 모양이 아무르강 유역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 점을 꼽는다. 그들은 어떻게 이 머나먼 제주 땅까지 왔을까. ■ 육지였던 황해 “일단은 1만년 전의 기후나 지형을 한 번 살펴봐야겠지.”(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예, 그런 의미에서 당대의 기후와 해수면의 변화를 연구해봤습니다.”(강창화) 박용안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린 최종 빙하기의 해안선과 강.. (5) 1만년전의 세계 제주 고산리(上) 제주 고산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 ㆍ구석기와 신석기의 경계를 풍미한 맥가이버들 1987년 5월 어느 날. 제주도 서쪽 끝 마을인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흙을 갈고 있던 마을주민 좌정인(左禎仁)씨가 돌 두 점을 주웠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고?” 고구마처럼 생긴 돌이었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좌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돌 두 점을 집으로 가져갔다. “(윤)덕중아, 이 돌들이 이상하게 생겼는데 한번 봐라.” 마을엔 제주대 사학과에 다니던 윤덕중이란 학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이 심상치 않은 돌을 보여준 것이다. 윤덕중 학생은 이 돌 두 점을 다시 스승인 이청규 제주대 교수(현 영남대)에게 보여주었다. 이 교수는 곧 돌을 수습한 현장에서 지표조사를 벌였다. ■농부가 찾은 1만년 전.. 문화재청의 ‘이상한 마인드’ “담당자가 좀 오버한 것 같습니다.” 송인범 문화재청 차장은 15일 문화재청이 서울 태릉사격장에 조성된 88서울올림픽 기념 조형물에까지 사격장 철거를 알리는 현수막을 거느라 콘크리트 못을 박았다는 보도가 나오자 이렇게 코멘트 했다. “지혜롭지 못한 대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담당자의 단순 실수일까. 기자는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문화재청 직원들의 기본 마인드를 지적해두고 싶다. 우선 태릉사격장만 해도 그렇다. 40개 조선왕릉 전체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눈 앞에 두고 있고, 오는 9월 실사단이 방한하기 때문에 태릉사격장을 철거해야 한다는 게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태릉사격장이 지니는 역사적인 의미는 한번이라도 따져 보았는지 묻고 싶다. 태릉사격장은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 이전 1 ··· 160 161 162 163 164 165 166 ··· 1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