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1346)
‘코리안루트 탐사취재단’ 1만km 대장정 2007 10/16ㅣ뉴스메이커 745호 우리는 바이칼에서 왔는가 바이칼호 주변은 우리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수많은 소수민족이 태어나 터 잡고 살았던 곳이다. 호수 주변에 서식하는 3500여종의 동·식물 가운데 자생종만 87%일 정도로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어 ‘러시아의 갈라파고스’ 라고도 불린다. 우리를 비롯해 일본, 아메리카 인디언 등 많은 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아득히 먼 조상들의 ‘유전자’ 를 찾기 위해 이곳에 온다. 내몽골 고조선의 성채가…?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赤峰市) 서쪽 삼좌점(三座店)에서 치(雉)가 촘촘하게 배치된 거대한 석성이 3년전 댐 공사중에 발견됐다. 기원전 24~15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성은 국가 단위의 조직이 아니면 쌓을 수 없는 규모와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
(30) 건봉사(下) -지금 다시 ‘萬日會의 정신’ 볼 수 있을까- 1500년의 성상을 쌓은 건봉사의 역사는 파란만장 그 자체다. 520년(신라 법흥왕), 절을 창건한 아도화상의 삶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중국 위나라 사신으로 고구려에 온 아굴마(阿굴摩)와 고구려 규수인 고도령(高道寧) 사이에서 난 혼혈아. 하지만 귀국길에 오른 아버지는 소식을 끊었고, 16살이 된 아들 아도는 아버지를 찾아 “불경을 더 배우고 아버지를 찾겠다”면서 중국으로 떠난다. 아도는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를 만났으며, 아버지의 소개로 고승 현창을 찾아 19년간이나 불경을 공부한다. 36살의 나이로 귀국한 아도는 신라로 건너가 눌지왕의 따님 병을 고치면서 신임을 얻는다. 이 인연으로 아도화상은 흥륜사와 도리사, 그리고 건봉사 등 여러 곳에 절을 짓는다. #..
(29)건봉사(上) -지뢰밭 뚫고 ‘호국불교의 성지’ 밟다- 금강산 일만이천봉 남쪽 끝자락, 아니 향로봉 자락 연꽃모양의 자방(子房)에 자리하고 있는 건봉사다. “(어릴 적) 다리 아픈 줄 모르고 이십오리길을 걸어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매달리며 (건봉사를) 찾았다. 탑 고개를 헐레벌떡 넘어서면 울창한 노송 사이로 들려오는, 염불하는 북소리, 징소리가 울렸다.”(이관음행 건봉사 불교부인회장) “(4월 초파일) 참관하는 사람끼리 비켜서기조차 힘들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뤄 각종 장사꾼들, 그리고 흰 포장의 음식점 하며, 문수고개는 전후 10여일간 시골 5일장터를 방불케하는 대성황의 모습이었다.”(윤용수 전 거진읍장) 일제시대, 건봉사의 추억을 전하는 이들의 감회는 새롭겠지만, 불교신자가 아닌 기자에게는 다소 무미건조한 여정이다. ..
(28) 양구 펀치볼(下) -수천년 터전… 무릉도원의 꿈… 그러나 갈등의 땅- '> “야. 정말 대단하네.” 그야말로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사가 터졌다. 하늘을 뒤덮었던 짙은 구름 사이로 환한 햇빛이 펀치볼(해안분지)을 비추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왜 구름은 저토록 초록의 분지만을 피했을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 아니면 환한 조명 아래 야간경기를 벌이는 축구장을 관중석 맨 꼭대기에서 바라본 느낌이랄까. 우여곡절 끝에 해안(亥安)에 들어온 선사인들도 이곳(을지전망대)에 올랐겠지. 신이 내린 듯한 저 찬란한 땅을 바라보고 경외감을 느꼈겠지. 그리곤 마음의 본향으로 삼았겠지. 해안분지, 즉 펀치볼은 그야말로 자연현상이 빚은 경이로운 땅이다. 해발 1000m 고봉준령이 병풍처럼 둘러쌌다. 서쪽은 가칠봉(1242m)·대우산(1..
(27) 양구 펀치볼(上) -중학교 발굴단 ‘선사유적’ 을 캐내다- '> “김선생, 해안중학교에서 근무해보지 않을래요?” 1986년초. 춘천여고에서 근무중이던 김동구 교사는 강원도교육청으로부터 해안중(亥安中) 발령을 통보받았다. “그 지역의 자연생태계와 역사문화유적을 조사해야 하는데 선생님이 해줘야겠어요.” 해안중이라. 양구군 해안면이라면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가 아닌가. 아마 편치볼이라 하면 귀에 확 들어올 것이다. 해안면은 56년 4월 이른바 ‘정책이주민’들이 정착한 이후 민통선 이북에 있는 유일한 면단위 마을이다. 휴전선이 지척이고, 민북지역이다 보니 학술조사가 어려웠다. 마침 도교육청이 역사·생태부문 전공자인 교사 5명을 뽑아 해안중학교에 발령을 낸 것이다. # 중학교 교사가 찾아낸 선사유적 ‘중책을 맡고’ 부임했지만 도..
(26)요동백 김응하(下) “압수 머리에 작은 사당 세웠으니/멀리 노니는 넋은 언제 오시려나/오늘 아침 비바람이 강가에 몰아치는데/원한에 찬 물결 위에 검을 짚고 서 있네.” 심하전투가 끝난 지 딱 1년 뒤인 1620년 3월4일. 월사 이정귀(1564~1635)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 김응하 장군의 사당을 지나다가 이런 시를 남겼다. 이정귀의 회고담이 생생하다. “압록강을 건너려는데 장대비가 쏟아졌다. 돌이켜보니 김응하 장군 및 2만의 관군이 전사한 날(3월4일)이니 그 분들의 넋이 비바람이 되어 돌아온 것이겠지. 가슴이 울컥하여 노래 세 수를 지었다.”(월사집 권7) ▲김응하 신격화 프로젝트 1619년 심하전역에 파병되어 후금군에 장렬하게 전사한 김응하 장군은 전쟁영웅으로서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요동파병군의 총사령관..
(25) 요동백 김응하(上) -광해군의 희생 카드 ‘요동파병 장군’- '> 대외리 5초소를 지났다. 이른바 민북지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늘 느끼지만 철원 쪽에서는 민통선을 과연 지나기나 한 것인지 실감할 수 없다. 비무장지대답지 않은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논길을 따라 2㎞쯤 달리자 제법 그럴듯한 산소가 마주 보고 있다. 철원 동송읍 하갈리다. “저기는 김응해 장군 산소고요. 저기 보이는 곳이 김응하 장군 묘소입니다.” # ‘충무공 김응하’ ‘요동백 김응하’ 형제는 용감했다는 말이 딱 맞다. 형(김응하 장군·1580~1619년)은 요동파병군을 이끌고 후금군과 접전을 벌인 뒤 전사했고, 동생(김응해 장군·1588~1666년)은 병자호란 때 청군과 결사항전을 펼쳤으니 말이다. 김응하 장군의 후손 김규장씨(77·안동..
(24) 고려말 출신 이양소선생 -不事二君 절개 ‘위대한 은둔- '>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민통선 이북(연천 중면 적거리 신포동). 해발 100m쯤 돼보이는 야산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고려말 충신이자 두문동 72현의 한 명인 이양소 묘를 찾는 여정은 험난했다. 키만큼이나 자란 수풀과 나무를 헤치고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안내한 후손(이희풍씨)의 낯엔 찾아온 손님들에게 송구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겨우 찾아낸 이양소(1367~?)의 묘.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풀이 점령한 탓인지 무덤의 형태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자세히 보니 무덤은 15m 둘레의 봉분에 화강암 재질의 묘비와 상석. 그리고 문관석(157㎝) 2기가 마주 대하고 있다. 문인석은 얼굴이 길쭉한 돌하루방을 연상케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