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357) 썸네일형 리스트형 (26)요동백 김응하(下) “압수 머리에 작은 사당 세웠으니/멀리 노니는 넋은 언제 오시려나/오늘 아침 비바람이 강가에 몰아치는데/원한에 찬 물결 위에 검을 짚고 서 있네.” 심하전투가 끝난 지 딱 1년 뒤인 1620년 3월4일. 월사 이정귀(1564~1635)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 김응하 장군의 사당을 지나다가 이런 시를 남겼다. 이정귀의 회고담이 생생하다. “압록강을 건너려는데 장대비가 쏟아졌다. 돌이켜보니 김응하 장군 및 2만의 관군이 전사한 날(3월4일)이니 그 분들의 넋이 비바람이 되어 돌아온 것이겠지. 가슴이 울컥하여 노래 세 수를 지었다.”(월사집 권7) ▲김응하 신격화 프로젝트 1619년 심하전역에 파병되어 후금군에 장렬하게 전사한 김응하 장군은 전쟁영웅으로서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요동파병군의 총사령관.. (25) 요동백 김응하(上) -광해군의 희생 카드 ‘요동파병 장군’- '> 대외리 5초소를 지났다. 이른바 민북지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늘 느끼지만 철원 쪽에서는 민통선을 과연 지나기나 한 것인지 실감할 수 없다. 비무장지대답지 않은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논길을 따라 2㎞쯤 달리자 제법 그럴듯한 산소가 마주 보고 있다. 철원 동송읍 하갈리다. “저기는 김응해 장군 산소고요. 저기 보이는 곳이 김응하 장군 묘소입니다.” # ‘충무공 김응하’ ‘요동백 김응하’ 형제는 용감했다는 말이 딱 맞다. 형(김응하 장군·1580~1619년)은 요동파병군을 이끌고 후금군과 접전을 벌인 뒤 전사했고, 동생(김응해 장군·1588~1666년)은 병자호란 때 청군과 결사항전을 펼쳤으니 말이다. 김응하 장군의 후손 김규장씨(77·안동.. (24) 고려말 출신 이양소선생 -不事二君 절개 ‘위대한 은둔- '>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민통선 이북(연천 중면 적거리 신포동). 해발 100m쯤 돼보이는 야산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고려말 충신이자 두문동 72현의 한 명인 이양소 묘를 찾는 여정은 험난했다. 키만큼이나 자란 수풀과 나무를 헤치고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안내한 후손(이희풍씨)의 낯엔 찾아온 손님들에게 송구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겨우 찾아낸 이양소(1367~?)의 묘.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풀이 점령한 탓인지 무덤의 형태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자세히 보니 무덤은 15m 둘레의 봉분에 화강암 재질의 묘비와 상석. 그리고 문관석(157㎝) 2기가 마주 대하고 있다. 문인석은 얼굴이 길쭉한 돌하루방을 연상케 한.. (23) 성산성(下) -김화대첩 이끈 ‘유림·홍명구’ 의 전장- '> 1636년 12월8일. 청나라군이 파죽지세로 내려오자 조정은 사색이 되었다. 수도권 방위를 위해 각 도의 감사, 병사, 수사에게 긴급명령을 하달한다. “급히 근왕병을 이끌고 수도권에 집결하라.” 당시 평안도 감사(도지사)는 홍명구였다. 그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에게 격문을 보내 평양에 집결하도록 했다. 근왕군 대열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평양에는 홍명구군 2000명과 유림군 3000명 등 5000명의 근왕군이 집결했다. # 엇갈린 운명 12월18일 평양을 떠난 홍명구·유림의 근왕군은 도중에 노략질을 일삼던 적군 수백명을 죽인 뒤 이듬해 1월26일 김화 읍내에 도착한다. 김화는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쪽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인후(목구멍)와 같은 곳이다.. (22) 성산성(上) -지뢰밭 넘자 숨어있던 성벽 ‘우뚝’- ‘어!’'> 비무장지대 일원 조사에 잔뼈가 굵은 이우형씨(현강문화연구소장)가 성큼성큼 내딛는다. 이번에는 정말이다. 내색은 정말 하기 싫지만 이번만큼은 그를 따라가는 게 내키지 않는다. 녹슨 철책에 걸린 ‘지뢰’라는 빨간색 삼각표지판을 휙 걷어내고 들어가는 것이니…. 사진기자를 쳐다보니 그 역시 뜨악한 표정이다. 취재단 일행을 안내한 ○○사단 정훈장교도 한몫 거든다. “저도 여기(지뢰 지대)는 처음 들어와요.” 이곳에 근무 중인 장교도 ‘처음’이라는데…. 모골이 송연해 질 수밖에. 그러나 벌써 저만치 걸음을 내딛은 이우형씨가 “괜찮다”며 “내 뒤만 따라오라”고 한다. # 착잡한 답사 순간 별의별 상념이 다 떠오른다. 이곳은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성재산(해발 471m.. (21) 석대암(下) ‘덩굴쥐고 절벽잡아 바람부는 천제 향해 오르니(攀羅문壁上風梯)/암자 오랜 뜰 소나무엔 학 한 마리 깃들었네(庵古庭松一鶴棲)/숲 아래 경쇠소리 바람 밖에서 간절하네(林下磬聲風外切)/서쪽 봉우리 남은 해는 찬 시내로 떨어지네(西峰殘照落寒溪)’ 김시습의 ‘매월당집’에 묘사된 석대암의 풍경이다. 시에서 ‘바람부는 천제에 오르니’라는 대목은 풍수지리를 염두에 둔 구절이다. 석대암 뒤편 환희봉 정상에서 뻗은 능선의 솟은 많은 봉우리가 풍수지리학상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天梯)’ 형세라는 것이다. 또한 석대암은 예부터 바람이 심하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 사냥꾼과 금돼지 '> 과연 석대암에 서면 김시습의 표현이 얼마나 절묘한지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자! 이제 고려 말 학자 민지(1248~1326)가 지은 ‘보개.. (20) 석대암(上) -‘지장신앙’ 성지 중 성지… 절터의 속살이 펼쳐졌다- '> 단숨에 올라가려 했다.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헛된 오만함이란…. 만만찮았다. 지장신앙의 성지를 찾는 길은 쉽지 않았다. 경기 연천 최고봉인 환희봉(877m) 정상 밑 해발 630m에 자리잡은 석대암 가는 길. 비무장지대가 아닌데도 ○사단 공보 장교가 따라나선 이유가 있었다. 지름길로 가려면 군부대를 관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병장을 가로지르면 심원사지 부도군이 보이고, 바로 그 위에 옛 심원사(647년 창건) 터가 펼쳐진다. 부도군은 2기의 비석과 12기의 승려 사리탑으로 이뤄졌다. 휴정스님(1520~1604)의 법맥을 이은 스님들의 탑과 부도란다. 우리나라 제일의 지장신앙 성지인 심원사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철원 동송 .. (19) 오리산 (下) -댐 추진… 이 ‘수직단애 풍광·무릉도원’ 을 어쩔것인가- '> '> 오리산에서 흘러내린 용암(마그마). 철원·평강 등 무려 2억평에 걸쳐 용암대지를 만들었고, 그것은 훗날 철원평야가 되었다. 그리고 그 마그마가 흘러 내려간 곳에 임진강·한탄강이 생겼고, 그 유역의 용암대지는 인류가 살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 물이 없으면 생명도 없는 법.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연천 전곡리에서 30만년 전의 세계가 펼쳐진 것은 당연하다. 1978년 전곡리 유적이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된 이후, 임진강·한탄강 유역에선 20곳이 넘는 구석기 유적이 확인됐다. 지금도 강의 유역을 지나다보면 제법 넓은 용암대지들이 눈에 띄는데, 이런 곳에는 예외없이 구석기 유물들이 널려 있다. # 널려 있는 고인류의 흔적 고인류(이들은 현생인.. 이전 1 ··· 164 165 166 167 168 169 1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