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381) 썸네일형 리스트형 원본은 아니지만 짝퉁도 아닌 '이항복 공신 증명서'…후손들이 모신 까닭 ‘공신교서는 틀림없는데…’. 지난해 11월 경주이씨 백사공파 종가가 기증한 백사 이항복 관련 유물을 검토하던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자들은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에 특히 시선이 머물렀다.‘이항복 호성공신상 후모본’. 백사 이항복이 호성공신 작위를 받은다음 하사받은 초상화다. 후대에 옮겨그린 것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호성공신 교서가 무엇인가. 선조(재위 1567~1608)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 86명, 선무공신 18명, 정난공신 5명에게 작위를 내렸다. ‘호성공신교서’는 임진왜란 중 임금(聖)을 의주까지 호종(扈)하는데 공을 세운 86명에게 작위를 내리면서 발부한 증명서다. 이항복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로서 선조를 의주까지 모.. 고려 금속활자, 구텐베르크에 뒤처진 5가지 이유…발명 했지만 혁명 없었다 ‘구텐베르크보다 빠르다고 하지만…’. 필자는 얼마전 (1377년 간행)보다 138년 빠른(1239년) 금속활자본(보물 제758-2호 공인박물관 소장 )이 국내에 존재하고 있다는 연구성과를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고려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구텐베르크가 이룬 것 같은 혁명은 없었다’는 독자반응이 만만치 않았다. ‘발명은 있었지만 혁명은 없었다’는 뼈아픈 지적이 아닌가. 그렇다면 고려·조선은 왜 애써 금속활자를 만들어놓고 서양처럼 역사를 뒤바꾼 혁신을 이루지 못했을까. ‘갑인자’를 개발한지(1434년) 2년만에 간행한 . 구텐베르크는 그보다도 18년 늦은 1454년 구텐베르크 성서 180부를 발행했다. ■억지로 우겨 설립한 주자소굳이 이나 까지 들춰볼 필요도 없다. 구텐베르크(1400년 전후~1468년).. '조선의 표준시' 자격루…484년만에 때빼고 광냈더니 중국 주나라에는 아주 특별한 벼슬아치가 있었다. 닭을 관장하면서 새벽을 알리는 ‘계인(鷄人)’이라는 관리였다( 춘관). ‘계인’의 임무는 매우 중요했다. 왜냐면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들에게 신중하게 때를 알려주는(欽若昊天 敬授人時)’( ‘요전편’)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때(時)’는 농사철의 시기를 가리킨다. 예부터 “군주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 ‘열전·역이기전’)고 했다.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국보 제229호 자격루 오른쪽 수수호 표면에 새겨진 용문양을 펼쳐보인 모습.|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제공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삼고 사는 백성들에게 절기를 가르쳐주지 못하면 군주의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 세종-문종을 닮으려 했던 고종-순종 …왕세자 집무실 계조당 복원 이야기 “내가 세종의 업적을 계승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동궁(순종)은 훗날 나(고종)의 가르침을 준수해주기를 바란다.” 1891년(고종 28년) 2월8일 고종은 경복궁 안에 계조당을 고쳐 지은 뜻을 밝혔다. “세종 계해년(1443년) 문종이 동궁에 있을 때 계조당을 세웠고, 문종이 곧 대리청정했다. 세종 시대에 모든 제도와 문물, 법식을 다 갖췄고 가장 융성했다.”한마디로 고종은 세자인 순종과 더불어 조선의 성군인 세종과 그 아들 문종을 본보기로 삼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계조당을 고쳐 지은 것이다. ‘계조(繼照)’는 ‘사방에 비치는 광명을 계승하여 비춰준다(以繼明照于四方)’는 ‘이괘·삼전’의 구절에서 따왔다. 따라서 ‘계조’은 왕위계승을 뜻한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바로 ‘슬기로운 왕위계승’을 위해 .. 자격루 434년만에 때빼고 광냈더니…용문양에 제작자 이름까지 중국 주나라에는 아주 특별한 벼슬아치가 있었다. 닭을 관장하면서 새벽을 알리는 ‘계인(鷄人)’이라는 관리였다( 춘관). ‘계인’의 임무는 매우 중요했다. 왜냐면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들에게 신중하게 때를 알려주는(欽若昊天 敬授人時)’( ‘요전편’)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때(時)’는 농사철의 시기를 가리킨다. 예부터 “군주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 ‘열전·역이기전’)고 했다.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삼고 사는 백성들에게 절기를 가르쳐주지 못하면 군주의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시간을 사람이 일일이 알리다보니 번번이 착오가 생겼다. 농사철에 ‘때’를 잘못 일러주면 백성들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 아닌가. 만고의 성군인 세.. '직지'보다 138년 오래된 금속활자본…'국내 존재 사실 까맣게 몰랐다"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 1377년(우왕 3년) 찍어낸 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그렇다면 문헌상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무엇일까. 혹은 등 2건으로 알려졌다. 의 경우 “(1234~1241년 사이) 강화도에서 28부를 금속활자본으로 찍었다”는 이규보(1168~1241)의 언급()만 남아있다. ‘에 붙어있는 무신정권 실력자 최이(?~1249)의 발문. “기술자들을 모집해서 기해년(1239년) 주자본(금속활자본)을 거듭 인쇄한다”는 내용이다. 지금까지는 ‘목판본으로 다시 새겼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최근 “속활자본으로 거듭 인쇄했다’고 해석하는게 옳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깨달음의 뜻을 밝힌다(證道)’는 (이하 남명증도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원전은 선가의 수행지침서인.. 고구려 사신 그려진 아프로시압 벽화의 속살, 국내연구진이 밝혀낸다 1965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시의 아프로시압 도성지에서 도로공사 중 매우 흥미로운 동서남북 4면 벽화가 발견됐다. 정면(서벽)의 벽화는 7세기 중반 사마르칸트 왕 바르후만을 알현하는 외국 사절단 행렬을 그렸다. 좌측면(남벽)에는 남부지역인 수르한다리야에서 시집오는 결혼 행렬이 그려져 있다. 하얀 코끼리 등 위에 올라탄 신부를 말을 탄 시녀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1965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도성지에서 발견된 궁전벽화. 7세기 중반 사마르칸트 바르후만 왕을 알현하는 외국 사절 가운데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되는 두 인물이 보인다.|문화재청 제공그 뒤를 낙타와 말을 탄 행렬이 따르고 있다. 우측면(북벽)에는 여인이 배를 타고 악기를 연주하고, 사람과 동물이 싸우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 .. 덕수궁 '대안문'이 '대한문' 된 이유…"갓 쓴 여자 재수없어서"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안(安)자가 계집 녀(女) 자에 갓쓴 글자이고 양장하고 모자 쓴 여자인 배정자의 대궐 출입이 빈번해서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쟁이의 말로 인해 대한문으로 고쳤다.”일제강점기 대중잡지인 제33집(1933년 7월 1일자)에 실린 덕수궁의 정문 ‘대한문’ 관련 일화이다. ‘문외한’이란 가명의 필자는 ‘팔자 고친 경성시내 육대문 신세타령’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한문이야말로 여러 대궐문 중에서 제일 나이 어리고 팔자 사나온 문”이라고 지칭하면서 이름을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바꾼 이력을 소개했다.1906년 이전에는 덕수궁의 정문 이름이 ‘대안문’이었다. 그러다 그해 이름이 대한으로 바뀌었다. 1906년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바꾸고 수리한 뒤 그 내역을 기록한 중 ‘대한문상량.. 이전 1 ··· 42 43 44 45 46 47 48 ··· 17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