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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김치사발이 오사카성 한채값 '일본의 국보'가 되기까지 ‘에비!’ 예전에 부모님이 말 듣지않은 아이를 달래고 어르기 위해 쓴 말이다. \‘무서운 괴물이 나타난다’는 경고성 메시지인데, 이 말의 유래를 아는 이는 드물다. 이 말은 ‘이비야(耳鼻野)’의 줄임말인데, 임진왜란 때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간 야만적인 일본인이라는 소리다. 말 듣지않은 아이를 어르려고 ‘코와 귀를 베어가는 일본 야만인이 온다’고 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가 전국시대의 오랜 전쟁에 지친 다이묘(大名)를 무마하려고 베어온 코의 숫자에 따라 조선땅을 분배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의 막사발 기자에몬 이도(喜左衛門 井戶). 이런 막사발들은 경남 진주지방에서 제삿날 김치를 담는 그릇이었다고 한다, 소장자였던 기자에몬(喜左衛門)의 이름을 땄다...
기마, 무용, 수렵…고구려 벽화를 빼닮은 '신라행렬도' 1500년만에 현현 말을 탄 인물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춤추는 듯한 모습이다. 활쏘는 사람들이 암수 사슴과 멧돼지, 호랑이, 개 등을 사냥하고 있고, 주인공인 듯한 인물이 개(犬)와 함께 행렬하고 있다. 안악 3호분이나 무용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의 행렬도와 흡사하다. 그러나 신라 특유의 선각문 기하학 문양들도 보인다.5세기대 신라 귀족 무덤으로 알려진 경주 쪽샘 44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빼닮았지만 신라 특유의 문화도 빼놓지않은 ‘신라 행렬도’를 새긴 토기가 발견됐다. 행렬이라는 큰 주제 아래 기마·무용·수렵의 내용을 파노라마처럼 펼친 복합 문양은 신라 회화에서 처음 확인된 사례이다. 무덤제사와 관련된 유물로 추정된다.쪽샘 44호분 에서 확인한 ‘신라행렬도’ 토기. 굵은 선으로 된 부분이 찾아낸..
사명대사는 왜 "조선의 보배는 가토 기요마사의 목"이라 했을까 “승장 유정의 정예병이 왜적을 참획(斬獲)하는 공을 여러번 세웠다. 그렇지만 속세를 떠난 유정이 군직(軍職)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파격적인 상을 내려 훗날의 공효를 거두지 않을 수 없다. 유정에게는 당상관(堂上官·정 3품 이상)의 직을 제수하여….” 1593년(선조 26년) 4월 12일 선조가 승병장인 사명대사 유정(1544~1610)에게 “당상관(정 3품 이상)의 상급을 내리라”는 특명을 내렸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그런데 이 기사를 쓴 사관이 붙인 평가가 폐부를 찌른다.“전란을 당해 날래고 건장한 장수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는데 엄청난 전공이 도리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늙은 승려에게서 나왔다. 이것이 어찌 무사들만의 수치이겠는가.” 의 사가는 쉰살이 된 사명대사의 분전을 인용하면서 임진왜란 때 ..
40대 여성, 그녀가 1500년전 영산강 유역을 다스린 지도자였다 ‘영산강 유역 다시벌(평야)을 다스리던 마한 출신 토착세력의 지도자는 40대 여성이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착용하고 있었다.“ 영산강 유역 전남 나주의 넓은 평야에 복암리 고분군이라는 대형 무덤떼가 자리잡고 있다. 그중 복암리 3호분에서는 3m에 가까운 대형옹관묘가 26기 출토되고 금동신발과 장식대도 등 최상급 유구와 유물이 쏟아졌다. 3세기~7세기까지의 무덤이 모인 고분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 복암리 3호분을 마한 출신 토착세력 지도자들의 고분이라 평가한다.영산강 유역 드넓은 평야를 다스린 5세기 말 6세기 초 마한 토착세력의 지도자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정촌고분의 피장자는 40대 여성이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사진은 발굴된 인골을 분석해 복원한 얼굴..
최초의 '전 백성' 여론조사 실시…세종의 숨겨진 업적 “전국의 전·현직 관리는 물론이고 세민(細民·가난하고 비천한 백성)들에게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 그 결과를 아뢰도록 하라.” 1430년(세종 12년) 3월 5일 세종대왕은 가히 혁명적인 명을 내린다. 호조가 ‘전답 1결 당 조 10두 징수’를 골자로 한 공법(세금) 방안을 제출하자 세종이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지시한 것이다. 이 최초의 여론조사에는 무려 5개월여가 걸렸다. 꼭 4개월이 지난 7월5일에는 ‘여론조사 중간점검 회의’까지 열었다. 이때 호조판서 안순(1371~1440)은 “지금까지의 조사를 보면 경상도에서는 찬성이 많고 함길·평안·황해·강원 등은 반대가 많다”고 중간보고했다. 세종은 “각 도의 (여론 조사) 결과가 도착하면 중앙 및 지방의 관리들은 공법의 장단점과 해결방안을 마련해서 보고하라”..
'대자보' '투서' … 한글창제 후 생긴 일 “내가 늘그막에 할 일이 없어 글자를 만들었겠냐.”1443년(세종 25년) 12월30일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은 이듬해 2월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1445) 등과 논쟁을 벌인다. 최만리는 “언문(한글)은 사대주의에 어긋나는 부끄러운 문자”라며 “설총(655~?)의 이두는 비속하지만 중국 글자를 빌려 어조(語助)에 사용해서 학문을 일으키는 데는 일조했다”고 나름 평가했다. 그러면서 “언문으로 입신출세한다면 무엇 때문에 어려운 성리학을 공부하겠느냐”며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일 뿐”이라고 깎아내렸다.(보물 제951호).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와중에 평안도 의주로 줄행랑친 선조는 포로가 되어 왜적에 협조하는 백성들에게 한글교서를 내려 “백성들이여! 돌아오라!”고 권했다. 당시..
'제5의 진흥왕 순수비'가 선 감악산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요즘 사대부의 아내들이 귀신에게 아첨하고 혹(惑)하여, 산야의 음혼(淫昏)한 귀신을 제사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특히 송악산과 감악산이 심합니다.” 1431년(세종 13년) 6월25일 대사헌 신개(1374~1446)는 “부녀자들까지 귀신에게 올리는 제사에 빠져있다”고 한탄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부녀자들이 송악산과 감악산에서 제사를 지낸 뒤 술판을 벌이고, ‘귀신을 즐겁게 한다’며 풍악을 치고 즐기고, 밤을 세운 뒤 돌아오면서…광대와 무당이 난잡하게 말 위에서 방자하게 놀아도….”이 상소를 받은 세종대왕은 “만약 사대부 아내가 감악산·송악산 같은 산천 제사에 참여해서 기도를 올리면 그 남편까지 처벌하도록 해라”는 명을 내렸다.()황해~임진강~서울 축선에 자리잡고 있는 감악산 정상에 우뚝 선 감악산비. ..
'메롱' 혀내민 압도적 크기의 신라 금령총 말모양 토기 ‘혀를 낼름 표현한 말모양 토기의 정체는 무엇인가.’ 경주 금령총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것 중 압도적인 크기(56㎝)의 말모양 토기가 발굴됐다. 그런데 이 말모양 토기의 모습은 혀를 쑥 내밀고 있었다.지난해부터 금령총(5세기말~6세기초)을 발굴해온 국립경주박물관은 올해 4월부터 진행된 2차발굴에서 무덤 둘레에 쌓는 돌(호석)의 바깥쪽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것 중 가장 큰 56㎝ 크기의 말모양 토기 1점 등 30여개체의 제사용 토기들을 수습했다고 30일 밝혔다. 제사용 토기 안팎에는 말과 소, 기타 포유류 등의 동물뼈와 굴, 고동, 조개류 등 각종 패각류, 뚜껑접시, 토제방울, 유리구슬, 쇠스랑 등이 확인됐다.발굴된 말모양토기.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민 모습이 이채롭다. 왜 혀를 내민 모습으로 표현했는지는 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