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372) 썸네일형 리스트형 조선시대 미사일 '불랑기'의 발굴 조선조 숙종 때 강화도에 실전배치된 서양식 화포 불랑기 1문이 발굴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1679년(숙종 5년) 강화도에 쌓은 건평돈대에서 확인됐는데, 실제 을 입증해주는 실물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당시 숙종은 강화도 해안 요충지에 방어 및 관측시설인 돈대 54곳을 쌓았다. 이번에 발굴된 불랑기에는 무기의 제작기관과 감독관리 및 장인의 이름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강희 19년(1680년 숙종 6년) 삼도수군통제사 전동흘 등이 강화도 돈대에서 사용할 불랑기 115문을 만들어 진상하니 무게는 100근이다. 감주군관 절충장군 신청, 전추관 최이후, 전만호 강준, 장인 천수인." 강화도 건평돈대에서 발굴된 서양식 화포 불랑기. 포 뒤에서 장전하는 후장식 화포다. 거치된 상태에서 포탄을 장전할.. 한반도 최대의 국제전쟁터는 어디? 삼국시대 사람들은 이 중성산을 칠중성(七重城)이라 했다. 그 후 1300년 가까이 흐른 1951년 4월, 한국전에 참전한 영국군은 캐슬고지(일명 148고지)라 했다. 경기 파주 적성 구읍리에 자리 잡고 있는 해발 148미터의 야트막한 고지. 벌목으로 시야를 확보한 고지엔 군부대의 참호 및 군사시설이 설치돼 있다. 당연히 옛 성벽은 군 시설물이 들어서면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옛 성벽의 돌들은 참호를 만들 때 재활용된 것이 분명하다. 무너진 성벽의 높이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대략 15미터 쯤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성은 여러 번 중수한 것 같다. 성의 뒤편으로 올라가는 길, 즉 적성향교에서 오르는 길을 따라가 보면 성 입구에 성벽의 단면이 나타나 있는데, 암반을 깎은 뒤 석축한 곳이 보인다. 이곳이.. 2300년전 '반도체' 세형동검 거푸집 “아무 것도 없는데…. 왠지 찜찜해. 파보면 뭔가 있을 것 같은 감이 드는데….” 2002년 4월 어느 날, 전북 완주 이서면 반교리 야트막한 구릉(해발 26∼42m)으로 이뤄진 갈동 현장. 전주시 관내 국도(이서~용정) 우회도로(17.5㎞) 건설을 위해 지표조사를 벌이던 호남문화재연구원 조사팀의 고민은 컸다. 지표조사 결과 아무런 고고학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유적 없음’의 결론을 내리고 일사천리로 도로공사를 진행시켜도 무방했다. 그러나 ‘뭔가 감을 잡았던’ 조사단은 고심 끝에 ‘선(先)발굴’의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조사단의 그 ‘감(感)’이 엄청난 고고학적인 성과를 잉태할 줄이야. 2003년 7월부터 본격발굴에 돌입한 당시 호남문화재연구원 학예실장 김건수와 책임조사원 한수영.. 뒤바뀐 보물의 원통한 사연…노서리 215번지의 수수께끼 우리나라 보물과 관련된 기막힌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1933년 마을주민이 밭을 갈다가 발견한 경주 노서리 215번지 유물입니다. 그러나 주민이 수습한 것은 반쪽이었습니다. 신고를 받고 현장을 찾은 일본인 학자 아리미쓰가 나머지 반쪽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마을주민이 찾은 반쪽은 서울(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나머지 반쪽은 도쿄(국립제실박물관)으로 갔습니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거죠. 왜 그렇게 흩어진 것일까요.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고 이듬해인 1966년 문제의 노서리 유물 반쪽이 반환됩니다. 두 유물이 합체됐겠죠. 이듬해인 1967년 문화재위원회는 그렇게 합쳐진 유물 중 팔찌(454호), 귀고리(455호), 목걸이(456호) 등을 보물로 지정합니다. 그렇다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까요. 아닙니다. 귀고리.. 간송도 통곡할 '그을린 훈민정음' “세종이 화장실 창살을 보고 우연히 한글을 창제했대.” 일제 강점기의 어용학자들이 퍼뜨린 한글폄훼론이다. 세종이 한글창제의 원리를 설명한 해례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갖가지 억측이 무성했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은 훈민정음의 원본인 해례본을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을 찾았다. 그러나 일제는 18세기 위작이라며 깔아뭉갰다. 해례본을 찾지 못한다면 한글은 그저 ‘세종이 화장실에서 볼일 보다가 우연히 만든 글자’로 전락할 수 있었다. 1940년 간송 전형필은 국문학자인 김태준으로부터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다. “세종이 여진 토벌에 공을 세운 제자(이용준)의 조상에게 훈민정음 해례본을 하사했다”는 소식이었다. 배씨가 공개한 상주본 훈민정음 해례본. 밑부분이 화재로 그을려 있다. 간송은 물건값 1만원에 별도의 .. 전곡리 구석기와 후지무라 조작사건 이번 주는 27만년 전의 세계로 되돌아가겠습니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한탄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선사시대의 이야기입니다. 해마다 5월이면 이곳에서 구석기축제가 열립니다. 올해는 5월3일부터 7일까지 열린답니다. 27만년전 구석기 시대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이고, 선사박물관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되어 있으니 한번 참여해보시기 바랍니다. 궁금증이 생기실 겁니다. 왜 하필 27만 년 전 세계냐. 그걸 어떻게 아느냐. 뭐 이런 질문들을 하실 겁니다. 사실 한탄강 임진강은 화산활동이 빚어낸 강들입니다. 용암이 흘러 두 강을 만들었고, 고인류는 문명의 젖줄인 강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았습니다. 1977년 이곳에서 수상쩍은 돌멩이 하나가 확인되면서 이곳이 구석기 시대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이 돌멩이.. 목이 서늘해지는 아베의 총검술 ‘찔러-때려-비켜우로찔러-비켜우로베고때려-돌려쳐-막고차고돌려차….’ 총검술 하면 군대훈련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1960~70년대 고등학교를 다녔던 올드보이들에게는 학창시절 지겹도록 배워야 했던 총검술 동작을 먼저 떠올린다. 1969년부터 총검술은 고교의 공통필수로 채택된 교련교육의 과목 중 하나였다. 교련교사의 명에 따라 우렁찬 구호와 함께 목제 M1 소총을 일사분란하게 휘둘러야 했다. 제식, 분열, 사격, 심지어는 수류탄 투척 훈련까지 했으니 학교운동장을 ‘연병장’으로 일컬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총검술은 적병과 1-1로 맞서는 백병전에서 필요한 전투기술이다. 사람을 죽여야 하는 싸움의 기술을 학교 안에서 배웠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기억이다. 만약 무장한 적병이 아니라 비무장 민간인에게 실제 총.. 박근혜의 수인번호와 이육사의 수인번호 “감방은 비좁기 그지 없었다.…다다미 3장 반 크기에 20여 명이…수인번호대로 열지어 앉아있었다.…왜놈말로 ‘기오츠케’(차렷)하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가 자기 수인번호를 부르면 ‘하이(예)’ 하고 머리를 든다.” 1911년 안명근 군자금 모금사건으로 투옥된 백범 김구 선생의 서대문형무소 시절의 이야기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빼앗기고 그저 일련번호로 호명되는 죄수의 대우를 받게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몇 안되는 저항시인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이육사 시인과 ’수인번호’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다.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손인 이육사(李陸史) 시인의 본명은 이원록이었다. 1926년부터는 ‘이활’이라는 이름도 사용했다. 그러던 1927년 장진홍 의사의 대구조선은행 폭탄 투척 사건에 연.. 이전 1 ··· 87 88 89 90 91 92 93 ··· 17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