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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구석기 비너스와 전곡리 축제 1864년 프랑스 고고학자 폴 우랄은 로즈리 바스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희한한 조각물 1점을 발굴했다. 머리도, 발도, 팔도 없는데 유독 음부만은 예리한 칼로 표현한 구석기 말기의 유물이었다. 금방 이 조각상에 ‘야한 비너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벌거벗은 자신의 음부를 오른손으로 살짝 가린 그리스 로마 시대의 비너스상을 흔히 ‘정숙한 비너스’라 일컫지 않은가. 2008년 발견된 홀레펠스 비너스. 3만5000년전의 작품이다. |전곡선사박물관 제공 꽁꽁 가려도 시원치않을 음부를 부끄럼없이 턱하니 내놓고 있으니, ‘야한 비너스’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아무런 상관 관계없는 비너스를 끌여들여 현대 서양인의 잣대로 구석기인의 문화를 함부로 규정할 수 없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그러나 선사시대의 여신상을 ‘○○비너스’로..
'피노키오' 트럼프와 중구삭금 성어 증삼은 스승인 공자가 효행의 본좌로 꼽을만큼 효자였던 인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서 베를 짜고 있던 증삼의 어머니에게 누군가 달려와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외쳤다. 그러나 아들을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는 태연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다시 어떤 이가 “증삼이 살인했다”고 고했지만 역시 눈하나 꿈쩍 안했다. 그런데 다시 다른 이가 달려와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외치자 겁이 덜컥 난 어머니는 담을 넘어 도망쳤다. 천하의 효자아들을 둔 어머니조차도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는 얼토당토 않은 ‘거짓말’ 3방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동양에서는 이를 두고 중구삭금(衆口삭金·여러 사람의 입은 쇠조차 녹인다)라 한다. 장삼이사의 거짓말조차 쇠까지 녹인다는데 말 한마디가 중천금인 정치지도자라면 어떨까. 웃지못할 ..
'멍때리기'와 무위는 일맥상통이다? 너덜겅(돌숲)과 용출갯돌밭, 구실잣밤나무숲…. 전남 완도군이 지난 3월 ‘멍때리기 좋은 곳’으로 선정한 섬마을(생일도) 명소 3곳이다. 하늘나라 궁궐을 지으려 가져가던 바위가 떨어져 산산조각 나 생겼다는 자연돌숲과, 출렁이는 파도와 몽돌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갯돌밭,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밤나무숲 등이 멍때리는 장소로 제격이라는 것이다. 멍때리기는 아무 생각없이 넋을 놓고 있는 상태의 속어이다. 예전에는 ‘참 한심한 사람’이라는 비아냥을 듣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멍때리기에 적합한 장소가 선정되고, 심지어는 멍때리기 대회까지 성황리에 열리는 판국이다. 아닌게 아니라 뇌가 쌩쌩해지려면 ‘멍을 잘 때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대세로 등장했다. 아르키메데스와 아이작 뉴턴은 ‘멍때리기의..
간송 전형필과 야마나카의 문화재 전쟁 최근 일제강점기 고미술 무역상인 '야마나카 상회'를 다룬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이 야마나카 상회를 거쳐 판매된 석조 및 도자 문화재의 도록 사진과 관련 기록을 정리한 논문입니다. 야마나카 상회? 관련 서적을 들춰보니 간송 전형필 선생과 몇차례 맞대결을 벌인 기록이 있었습니다. 논문이 나온 김에 간송과 야마나카 상회가 펼친 문화재 전쟁을 한번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간송도 조선에서 알아주는 부자였지만 당대 글로벌 거대자본이던 야마나카 상회와는 견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간송은 당당히 맞섰습니다. 첫번째 야마나카 상회가 개최한 경매에서 석조물 4점을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첫번째 만남에서는 판정패였습니다. 어떤 이유때문일까요. 하지만 두번째 대면에서는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감상할 수 있는 혜원..
조선시대 미사일 '불랑기'의 발굴 조선조 숙종 때 강화도에 실전배치된 서양식 화포 불랑기 1문이 발굴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1679년(숙종 5년) 강화도에 쌓은 건평돈대에서 확인됐는데, 실제 을 입증해주는 실물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당시 숙종은 강화도 해안 요충지에 방어 및 관측시설인 돈대 54곳을 쌓았다. 이번에 발굴된 불랑기에는 무기의 제작기관과 감독관리 및 장인의 이름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강희 19년(1680년 숙종 6년) 삼도수군통제사 전동흘 등이 강화도 돈대에서 사용할 불랑기 115문을 만들어 진상하니 무게는 100근이다. 감주군관 절충장군 신청, 전추관 최이후, 전만호 강준, 장인 천수인." 강화도 건평돈대에서 발굴된 서양식 화포 불랑기. 포 뒤에서 장전하는 후장식 화포다. 거치된 상태에서 포탄을 장전할..
한반도 최대의 국제전쟁터는 어디? 삼국시대 사람들은 이 중성산을 칠중성(七重城)이라 했다. 그 후 1300년 가까이 흐른 1951년 4월, 한국전에 참전한 영국군은 캐슬고지(일명 148고지)라 했다. 경기 파주 적성 구읍리에 자리 잡고 있는 해발 148미터의 야트막한 고지. 벌목으로 시야를 확보한 고지엔 군부대의 참호 및 군사시설이 설치돼 있다. 당연히 옛 성벽은 군 시설물이 들어서면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옛 성벽의 돌들은 참호를 만들 때 재활용된 것이 분명하다. 무너진 성벽의 높이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대략 15미터 쯤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성은 여러 번 중수한 것 같다. 성의 뒤편으로 올라가는 길, 즉 적성향교에서 오르는 길을 따라가 보면 성 입구에 성벽의 단면이 나타나 있는데, 암반을 깎은 뒤 석축한 곳이 보인다. 이곳이..
2300년전 '반도체' 세형동검 거푸집 “아무 것도 없는데…. 왠지 찜찜해. 파보면 뭔가 있을 것 같은 감이 드는데….” 2002년 4월 어느 날, 전북 완주 이서면 반교리 야트막한 구릉(해발 26∼42m)으로 이뤄진 갈동 현장. 전주시 관내 국도(이서~용정) 우회도로(17.5㎞) 건설을 위해 지표조사를 벌이던 호남문화재연구원 조사팀의 고민은 컸다. 지표조사 결과 아무런 고고학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유적 없음’의 결론을 내리고 일사천리로 도로공사를 진행시켜도 무방했다. 그러나 ‘뭔가 감을 잡았던’ 조사단은 고심 끝에 ‘선(先)발굴’의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조사단의 그 ‘감(感)’이 엄청난 고고학적인 성과를 잉태할 줄이야. 2003년 7월부터 본격발굴에 돌입한 당시 호남문화재연구원 학예실장 김건수와 책임조사원 한수영..
뒤바뀐 보물의 원통한 사연…노서리 215번지의 수수께끼 우리나라 보물과 관련된 기막힌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1933년 마을주민이 밭을 갈다가 발견한 경주 노서리 215번지 유물입니다. 그러나 주민이 수습한 것은 반쪽이었습니다. 신고를 받고 현장을 찾은 일본인 학자 아리미쓰가 나머지 반쪽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마을주민이 찾은 반쪽은 서울(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나머지 반쪽은 도쿄(국립제실박물관)으로 갔습니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거죠. 왜 그렇게 흩어진 것일까요.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고 이듬해인 1966년 문제의 노서리 유물 반쪽이 반환됩니다. 두 유물이 합체됐겠죠. 이듬해인 1967년 문화재위원회는 그렇게 합쳐진 유물 중 팔찌(454호), 귀고리(455호), 목걸이(456호) 등을 보물로 지정합니다. 그렇다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까요. 아닙니다. 귀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