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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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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앞에서 술잔 엎은 예조판서의 운명…"가문의 씨를 말려라!" “지난날의 성현들은 모두 사라지고 술 잘 하던 사람만이 이름을 남겼네…그대와 함께 마시면서 만고의 시름을 녹여 버리리라.”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의 ‘장진주(將進酒)’ 중 한 대목이다. ‘인생이란 뜻을 얻었을 때 즐겨야 하므로…마셨다 하면 300잔은 마셔야 한다’면서 풍류남아의 호방한 기백을 토해냈다. 그러나 한자 ‘술잔 치(치)’는 ‘위태로울 위(危)’와 비슷하고, ‘취할 취(醉)’에는 ‘술 유(酉)’ 변에 ‘죽을 졸(卒)’자가 붙어있다. 술잔에 위태로움이 있고, 술에 죽음이 따른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임금과 신하들의 술자리라면 어떨까. 심심찮게 죽음의 향연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술자리에서 ‘역린’을 건드려 군주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분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변해서 평소에..
"오장을 칼로 쪼개는 아픔"…전염병의 참상에 맞선 조선의 분투 “아, 슬프다. 너는 지금 나를 버려두고 돌아갔는가. 오장(五臟)을 칼로 쪼개는 것만 같구나…”. 1625년(인조 3년) 3월 조선의 예학자 정경세(1563~1633)가 두창(천연두)으로 죽은 맏아들 정심(1597~1625)을 기리며 쓴 제문의 첫머리다. 정심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정경세의 기대를 한몸에 모은 아들이었다. 26살인 1623년 가을부터 1년간 향시와 소과, 대과 등 모두 10차례 시험에서 연속으로 급제한 인재였다. 1774년(영조 50년) 현직관리를 대상으로 실시한 특별시험(등준시·登俊試)의 무과 합격자 18인을 기념하여 제작한 초상화첩(). 이중 김상옥 등 세 사람의 초상화에서 두창(천연두) 흉터가 확인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대과급제후 1년도 안된 1625년(인조 3년) 사람됨이 단아하..
고려 금속활자, 구텐베르크에 뒤처진 5가지 이유…발명 했지만 혁명 없었다 ‘구텐베르크보다 빠르다고 하지만…’. 필자는 얼마전 (1377년 간행)보다 138년 빠른(1239년) 금속활자본(보물 제758-2호 공인박물관 소장 )이 국내에 존재하고 있다는 연구성과를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고려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구텐베르크가 이룬 것 같은 혁명은 없었다’는 독자반응이 만만치 않았다. ‘발명은 있었지만 혁명은 없었다’는 뼈아픈 지적이 아닌가. 그렇다면 고려·조선은 왜 애써 금속활자를 만들어놓고 서양처럼 역사를 뒤바꾼 혁신을 이루지 못했을까. ‘갑인자’를 개발한지(1434년) 2년만에 간행한 . 구텐베르크는 그보다도 18년 늦은 1454년 구텐베르크 성서 180부를 발행했다. ■억지로 우겨 설립한 주자소굳이 이나 까지 들춰볼 필요도 없다. 구텐베르크(1400년 전후~1468년)..
세종-문종을 닮으려 했던 고종-순종 …왕세자 집무실 계조당 복원 이야기 “내가 세종의 업적을 계승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동궁(순종)은 훗날 나(고종)의 가르침을 준수해주기를 바란다.” 1891년(고종 28년) 2월8일 고종은 경복궁 안에 계조당을 고쳐 지은 뜻을 밝혔다. “세종 계해년(1443년) 문종이 동궁에 있을 때 계조당을 세웠고, 문종이 곧 대리청정했다. 세종 시대에 모든 제도와 문물, 법식을 다 갖췄고 가장 융성했다.”한마디로 고종은 세자인 순종과 더불어 조선의 성군인 세종과 그 아들 문종을 본보기로 삼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계조당을 고쳐 지은 것이다. ‘계조(繼照)’는 ‘사방에 비치는 광명을 계승하여 비춰준다(以繼明照于四方)’는 ‘이괘·삼전’의 구절에서 따왔다. 따라서 ‘계조’은 왕위계승을 뜻한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바로 ‘슬기로운 왕위계승’을 위해 ..
'직지'보다 138년 오래된 금속활자본…'국내 존재 사실 까맣게 몰랐다"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 1377년(우왕 3년) 찍어낸 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그렇다면 문헌상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무엇일까. 혹은 등 2건으로 알려졌다. 의 경우 “(1234~1241년 사이) 강화도에서 28부를 금속활자본으로 찍었다”는 이규보(1168~1241)의 언급()만 남아있다. ‘에 붙어있는 무신정권 실력자 최이(?~1249)의 발문. “기술자들을 모집해서 기해년(1239년) 주자본(금속활자본)을 거듭 인쇄한다”는 내용이다. 지금까지는 ‘목판본으로 다시 새겼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최근 “속활자본으로 거듭 인쇄했다’고 해석하는게 옳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깨달음의 뜻을 밝힌다(證道)’는 (이하 남명증도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원전은 선가의 수행지침서인..
덕수궁 '대안문'이 '대한문' 된 이유…"갓 쓴 여자 재수없어서"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안(安)자가 계집 녀(女) 자에 갓쓴 글자이고 양장하고 모자 쓴 여자인 배정자의 대궐 출입이 빈번해서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쟁이의 말로 인해 대한문으로 고쳤다.”일제강점기 대중잡지인 제33집(1933년 7월 1일자)에 실린 덕수궁의 정문 ‘대한문’ 관련 일화이다. ‘문외한’이란 가명의 필자는 ‘팔자 고친 경성시내 육대문 신세타령’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한문이야말로 여러 대궐문 중에서 제일 나이 어리고 팔자 사나온 문”이라고 지칭하면서 이름을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바꾼 이력을 소개했다.1906년 이전에는 덕수궁의 정문 이름이 ‘대안문’이었다. 그러다 그해 이름이 대한으로 바뀌었다. 1906년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바꾸고 수리한 뒤 그 내역을 기록한 중 ‘대한문상량..
아주까리 오동나무 씨앗…25t트럭 100대분 흙더미에서 찾아낸 초미세 유물 1㎝도 안되는 아주까리 씨앗은 물론 1㎜ 안팎에 불과한 오동나무 씨앗까지…. 이것이 25t덤프트럭 100대 분량의 흙을 일일이 물체질로 걸러내 핀셋과 현미경으로 찾아낸 1600년 전 신라시대 씨앗들이다. 이 중 아주까리는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나 ‘…바람에 깜빡이는 아주까리 등잔불…’(가수 최병호의 1941년작 ‘아주까리 등불’)에서 등장할 정도로 친숙한 식물이다. 시와 노래에서 나오듯 등잔불이나 머릿기름으로 쓰였고, 혹은 들기름이나 참기름 대용으로도 사용됐다. 경주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아주까리 씨앗. 25t덤프트럭 100대 분량의 흙을 일일이 물체질로 걸러내 찾아낸 유기물이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그런데 1600년 전 신라인들도..
1600년전 아기반달가슴곰은 왜 경주 월성해자에 묻혔을까 “아기곰을 포함한 반달가슴곰의 가죽으로 군대의 깃발장식을 꾸몄다.' 신라의 1000년 도성인 경주 월성의 해자(외부 침입을 막으려고 성 주변을 파서 못으로 만든 곳)에서 1600년 전 신라인의 ‘삶의 흔적’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2016년부터 19년까지 월성 해자의 내부를 조사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금까지 얻어낸 유기질 유물과 관련된 학제간 연구를 통해 몇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고 최근 전했다. 1600년전 반달가슴곰의 뼈로 추정되는 곰뼈가 신라의 1000년 도성인 경주 월성 해자에서 출토됐다. 이 중에는 아기곰의 뼈도 있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월성은 기원후 101년 축성 이후 멸망(935년)까지 843년 동안 천년왕국 신라의 왕성이었다. 성이 초승달 모양이어서 ‘월성(月城·둘레 2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