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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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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최효종과 ‘풍자개그’ 전국시대 초나라에 우맹(優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초나라 재상 손숙오(孫叔敖)가 죽고, 손숙오의 집안은 곧 곤궁에 빠졌다. 우맹이 나섰다. 손숙오의 의관을 걸치고 행동과 말투를 흉내냈다. 가히 ‘인간복사기’였다. 초 장왕도 “손숙오가 다시 살아온 것이냐”며 당장 재상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우맹은 ‘아내의 말’이라면서 재상직을 거절한다. “제 아내가 신신당부했습니다. 제발 초나라 재상은 되지 말라고…. 손숙오라는 분을 보라고…. 재상이 죽으니 그 자손들은 송곳 하나 세울만한 땅도 없어지지 않냐고…. 손숙오처럼 될 바에는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 낫다고….” 그제서야 우맹의 뜻을 알아차린 장왕은 손숙오의 자식들에게 400호의 봉지를 내려줬다. 제나라에는 순우곤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어느 날 초나라..
세워라!(立)세워라!(立)세워라!立 “망측스럽게….” 2000년 4월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주변 웅덩이에서 야릇한 유물이 출토됐다. ‘남근(男根)’목간이었다. 길이가 22.6㎝(두께 2.5㎝)나 됐다. 목간의 밑부분은 약간 뾰족하게 다듬었고, 그것도 모자라 구멍까지 뚫었다. 한쪽 면에는 ‘천(天)’자와 ‘무봉(无奉)’자가 서로 방향을 거꾸로 해서 새겨져 있었다. 다른 한면에는 ‘道立立立’이라는 글자가 확연했다. 땅을 향해 새겨진 ‘天’은 무엇인고? 또 남근 목간에 ‘立’을 세 번이나 반복한 뜻은? 이것은 ‘세워라(立·서라)!세워라(立·서라)!세워라(立·서라)!’라는 뜻이 아닌가. 대관절 이 무슨 망측한 소리인가. 목간이 발견된 곳은 백제 각 지방에서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나성의 대문 및 중심도로와 아주 가까웠다. 그야말로 백주대로에서 이상..
궁정동 안가와 파가저택 조선시대 때 ‘파가저택(破家저澤)’이라는 형벌이 있었다. 죄인을 극형에 처한 뒤 그 집을 헐고, 집터에 연못을 팠던…. 대역죄나 존속살인 등 삼강오륜을 위배한 강상죄인(綱常罪人)에게 부과된 형벌이었다. 풍운아 허균(許筠·1569~1618)과 천주교인 유항검(柳恒儉·1756~1801) 등이 바로 능지처참과 함께 파가저택의 형을 받았다. 형벌의 뿌리는 춘추시대 주루국(婁國)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루국의 정공(定公) 때 아비를 시해한 자가 있었다. 정공은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아들이 아비를 죽이면 용서없이 죽인 뒤 그 집을 허물고 집터를 파서 연못으로 만든다’고 했다.”( ‘단궁 하’) ‘주루국’은 동이계의 터전이었던 산둥성(山東省)에 존재했다. 주루국이 있었던 추(鄒)와 노(魯) 땅은 공자와 맹자가..
지하만리장성과 유엔데이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해오면(若是那豺狼來了),엽총으로 맞이할 것이네(迎接的有獵槍).’ 지난 1월19일 백악관. 미국을 방문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 주석을 위한 국빈 만찬이 열렸다. 중국의 천재 피아니스트 랑랑(郞朗·28)의 손끝에서 웅장한 서사시가 연주됐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하지만 이 곡의 정체를 알았다면…. 만찬장 분위기는 싸늘했을 것이다. 1956년 중국에서 개봉된 영화 의 주제가(‘나의 조국·我的祖國’)였으니 말이다. 상감령은 강원 철원의 오성산(해발 1062m) 동북방에 이어진 고지군(群)을 일컫는 지명이다. 영화 은 59년 전 이맘때인 1952년 10월14일부터 42일간의 싸움에서 중국군이 거둔 승리를 그린 영화이다. ‘나의 조국’ 가사의 ‘승냥이와 이리(豺狼)’는 ‘미군’을..
역사를 왜곡한 공자 “너를 봉하노라.” 성왕(成王·재위 기원전 1042~1021)은 코흘리개 나이로 주나라 2대 천자가 됐다. 철부지는 동생(우·虞)과 매일같이 장난을 쳤다. 어느 날 오동나무 잎으로 규(珪·천자를 알현할 때 쥐는 예기)를 만들었다. 그걸 동생에게 주면서 ‘제후로 봉’한 것이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관(史官)이 득달같이 나섰다. “빨리 책봉 날짜를 잡으십시오.”(사관) “응? 장난이었는데(吾與之戱耳)?”(성왕) “천자는 농담하면 안됩니다. 사관은 천자의 말씀을 기록하고….”(사관) “알았다. 알았어.”(성왕) 성왕은 동생을 제후로 봉했다. 그렇게 ‘장난’으로 건립된 나라가 춘추시대의 강국 진(晋)이었다. 제나라 장공(기원전 554~548) 때의 일이다. 난봉꾼이었던 장공은 대부 최저의 부인과도 사통했다. 화..
20전8승5패 고구려와 백제는 동족(부여계)이면서도 피비린내 나는 상잔(相殘)을 벌였다. 369년부터 시작된 전쟁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 같다. 배신과 복수, 간계와 반간계가 난무한…. 전적은 고구려 기준으로 20전8승5패(7전은 승패불명). 초반 승자는 백제였다. 승리의 주역은 ‘배신의 아이콘’ 사기(斯紀)였다. 사기는 백제 시절, 왕의 말발굽을 다치게 한 뒤 고구려로 망명했다. 371년 고구려의 남침 소식에 백제는 불안에 떨었다. 그때 사기가 백제 진영으로 잠입한다. “고구려 군사의 수가 많다지만 새빨간 거짓입니다.”( ‘근구수왕조’) 사기의 말을 듣고 백제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마침내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인다. 하지만 눈에는 눈. 396년 이번에는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쳐 58성 700촌을 빼앗..
동족상잔의 뿌리 “신과 고구려는 모두 부여 출신입니다(臣與高句麗 源出扶餘). 그런데 시랑(豺狼·승냥이와 이리), 장사(長蛇·큰 뱀)가 길을 막아…. 추류(醜類·추악한 무리)가 성해져서…. 소수(小竪·더벅머리 어린애)가….”( ‘개로왕조’) 472년. 백제 개로왕이 중국 북위 황제에게 장문의 표(表·외교문서)를 올린다. 요컨대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是滅亡之期)이니 백제와 북위가 손을 잡자”는 것이었다. ‘삼국시대판 위키리크스’의 폭로였을까. 문서에는 백제와 북위 간 외교의 전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리와 승냥이’ ‘추악한 무리’ ‘큰 뱀’은 모두 고구려를 욕하는 표현이다. ‘더벅머리 어린애’는 장수왕을 지칭한 것이다. 하기야 어디 백제뿐이랴. 고구려도 백제를 ‘백잔(百殘)’, 즉 백제의 잔당으로 비하..
고구려군의 짬밥 “좋은 밭이 없다. 힘들여 밭을 갈아봐야 수확이 충분치 못하다. 배가 고프다. 고로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 故其人節食飮).”( ‘위서·동이전’, ‘열전’ 등) 중국 역사서는 죄다 고구려를 ‘배고픈 나라’로 표현하고 있다.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기(多大山深谷)’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품이 흉악하고 급해서 노략질을 즐기며, 전투를 익힌다”(, )고 부연설명까지 했다. 더 꼬집었다. “농사를 짓지 않은 채 앉아서 밥을 먹는 자(坐食者)가 1만호나 됐다”()는 것이다. 비참한 일이다. 백성들이 배를 곯고, 고관대작들은 무위도식하고 있었다니…. 그러나 후세의 연구자들은 ‘고구려의 헝그리 정신’으로 미화했다. 배고픔을 ‘헝그리 정신’으로 이겨내며 끊임없이 정복전쟁을 벌였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