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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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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합(野合), 그 은밀한 사랑의 역사 "달빛이 침침한 야삼경에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유명한 혜원 신윤복의 그림 에 쓴 시이다. 이 그림은 교교한 초생달이 비치는 자정(삼경)에 남녀가 만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분명 부부는 아니다. 쓰개치마를 쓴 여염의 여인과 중치막을 입은 젊은 유생이 은밀히 만나는 장면이 분명하다. 유교적인 사회질서가 어지간히 박힌 조선 후기의 사회…. 하지만 아무리 억누른다 해도 남녀간 피어나는 사랑을 어찌할 것인가. 사진1>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 교교한 초승달빛 아래 밀회를 즐기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야합으로 태어난 공자와 김유신 '야합(野合)'이란 말이 있다. '정치적 야합'처럼 좋지 않은 목적으로 어울리는 관계라는 의미로 흔히 쓴다. 하지만 본..
거세당한 사마천, 죽지않은 까닭은 “朕탁羌人, 不死” 은(상) 말기(기원전 1300~1046) 갑골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왕이 점을 치면서 하늘신에게 묻고 있다. “짐(왕)이 강족 노예의 성기를 자르는 형벌을 내리려 합니다. 죽지 않겠습니까.” 상형문을 보듯이 남성의 생식기를 생으로 자르는 참혹한 형벌의 기록이다. 궁형 뿐이 아니다. 은(상)시대는 노예제가 극성을 이룬 시기. 갑골문에는 80명의 노예에게 발뒤꿈치나 다리를 자르는 월형(월刑)을 가하는 기록도 남아 있다. 더 참혹한 갑골문도 있다. 사진1>생식기를 칼로 자르는 모양의 상형문자. 3300년전 갑골문에 새겨진 기록이다 ■“생식기를 잘라도 죽지않겠습니까” = “묻습니다. 목을 자르는 벌형(伐刑)을 시행하려는데 괜찮겠습니까.(貞伐若)” ‘伐’이라는 상형문자는 사람의 목을 도끼로 치..
평양기생 '차릉파' 신라57대왕으로 등극하다 16번째 흔적의 역사 팟 캐스트는 편입니다. 일제시대 때 일어난 황당한 사건입니다. 이 금관이 바로 서봉총 금관이었습니다. 서봉총 금관은 사연 많은 금관입니다. 스웨덴의 구스트파 아돌프 황태자가 직접 발굴한 금관이지요. 과연 서봉총 금관에 무슨 일들이 생겻을까요. 팟캐스트가 소개합니다. ‘금관의 파문(波紋), 박물관의 실태(失態)? 국보를 기생의 완롱물(玩弄物)로.’ 1936년 6월29일 부산일보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소식을 평양발로 타전했다. 기막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때는 바야흐로 기사가 나간지 약 9개월 전인 35년 9월. 평양박물관은 제1회 고적애호일을 기념하는 특별전을 열었다. 특별전에는 경성박물관로부터 대여받은 서봉총 출토 금제유물들을 전시했다. 평양기생 차릉파가 특별전 폐막기념 축하연회에..
허리 21.5인치, 8등신 소녀가 죽은 까닭 ‘나이 16살, 키 152.3㎝, 허리 21.5인치.’ 지난 2006년 11월 29일 경남 창녕 송현동 고분. 이곳에서 여성의 인골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됐다. 무덤의 주인을 따라 순장(殉葬)된 비운의 여성이었다. 고고학·법의학·인류학·생물학·해부학 등 각계 전문가가 모였다. ■ 21.5인치 개미허리 소녀 이들은 온갖 첨단과학을 동원, 여성의 몸을 복원했다. 겨우 16살의 소녀였다. 키도 현대의 16살 소녀(159.6㎝·2004년 기준)에 비해 6㎝ 이상 작았다. 하지만 복원된 소녀의 몸매는 요즘 여성들을 경악시켰다. 먼저 소녀의 허리둘레. 요즘 그 나이 또래의 허리(26.2인치)보다 무려 5인치나 가는 21.5인치였다. 가히 ‘개미허리’, ‘모래시계’였다. 소녀는 8등신 미녀였다. 신장을 머리길이(19...
후견인 장성택의 선택은? “조상님들! 형(무왕)의 병을 대신해서 나를 죽여주십시요.” 기원전 1046년. 무왕이 은(상)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불과 2년 뒤, 무왕은 깊은 병에 걸렸다. 신하들은 크게 두려워했다. 멸망했다지만 은(상) 유민들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었다. 이 때였다.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 단(旦)이 목욕재계하고 제단에 올랐다. ■금등지사(金등之祠)에 얽힌 사연 그리곤 “형님 대신 저를 데려가 달라”고 조상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주공은 이 ‘축문’을 금으로 밀봉해서 금색 실로 묶은 나무궤짝에 감춰두었다. 축문을 지키는 자에게 “절대 발설하지 마라”는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것을 ‘금등지사(金등之祠)’, 혹은 ‘금등서(金등書)’라고 한다. 어쨌든 이 기도로 형(무왕)의 병세가 호전됐다. 하지만 무왕은 ‘..
대권주자들. 구정(九鼎)의 무게를 묻다. “이게 뭐야.” 한나라 무제(재위 기원전 141~87) 때의 일이다. 분음(汾陰·산서성 완잉셴)의 무사(巫士)가 사당 옆에서 제사를 지내다 땅을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무언가 갈고리 같은 것이 삐져 나온 것이 아닌가. 서둘러 땅을 파보았다. ■최초의 고고학 발굴 그것은 명문은 없고 꽃무늬를 새긴 정(鼎), 즉 청동솥이었다. 문헌으로 확인된 최초의 고고학 발굴이었던 셈이다. 조정에 “국보급 유물이 출토됐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길조입니다. 이 보정(寶鼎)만큼은 반드시 조상의 묘당에 바쳐야 합니다.” 한 무제는 백관과 함께 한껏 예를 갖춰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렸다. 왜일까. 한나라 조정은 이렇게 정(鼎)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을까. 까마득한 옛날, 동방의 신이었던 복희(伏羲)가 ‘신정(神鼎)’을 만들었다.이 ..
통일신라시대 '복불복 게임' ‘벌주로 원샷 3잔’, ‘무반주 댄스’, ‘신청곡 부르기’, ‘개인기 발사’…. 경주 안압지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인공연못이다. ‘본기·문무왕’조는 “674년 궁궐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기록했다. 이곳은 외국사절이나 신하들을 위한 궁중연회장이었다. 지난 1974년. 안압지 준설공사를 벌이던 조사단은 바닥 뻘층에서 유물 하나를 건져낸다. 6개의 사각형과 8개의 육각형으로 된 ‘14면체 주사위’였다. 그런데 각 면에 4~5자의 글씨가 어렴풋 보였다. ■벌주 석 잔을 ‘원샷!’으로… 새겨진 글을 읽어가던 조사단은 무릎을 쳤다. 주흥(酒興)이 고조될 무렵, 주사위를 던져 14면에 새겨진 글 대로 벌칙을 받았던 놀이기구(주령구·酒令具)가 분명했다. 통일신라시대판 ‘..
신라와 당나라의 바둑전쟁 “온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쓸 데가 없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박혁(바둑과 장기)이라는 게 있지 않으냐. 그걸 하는 게 그래도 현명한 일이다(不有博혁者乎 爲之猶賢乎已).”( ‘양화’) 공자님 ‘말씀’이다. 무위도식 하느니 바둑·장기로 마음을 다잡으라는 말이다. 기원전 5세기대의 말이다. 바둑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 한·중 간 바둑 대결의 뿌리도 깊다. 738년 봄, 신라 효성왕 때의 일이었다. 당나라 현종이 사신을 파견하면서 신신당부했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란다. 중국과 견줄 만하다는구나. 그들에게 대국의 유교가 융성함을 자랑하라.” 또 하나 당부를 곁들였다. “당나라 바둑실력을 뽐내고 오라”는 것이었다. “(현종은) 신라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고 하여(以國人善碁) (바둑을 잘 두는) 양계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