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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부엔 휴화산이 잠들고 있다. 해발 360m인 강원 철원 평야에 서있는 동주산성에서 북쪽을 바라보라. 물론 북한 땅 평강이다. 지평선을 마치 담벼락처럼 가로막고 있는 것과 같은 평강고원이 어렴풋 시야에 들어온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야트막한 봉우리가 보인다. 그곳이 낙타고지(432m)다. 이름에서 보듯 한국전쟁 때 피아간 피를 흘린 곳이며, 낙타처럼 생겼다 해서 이름 붙었다. 그 뒤, 더 멀리 한탄강의 발원지라는 장암산(1052m)가 보인다. 그런데 낙타고지의 바로 곁에 아주 얕은 구릉 같은 산을 지나치면 안된다 그것이 바로 오리산(鴨山)이라 한다. 오리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었다. 해발 453m이니, 서울의 북악산(342m)보다 더 높은 산이다. 하지만 군사분계선 너머 저 멀리 보이니만큼 그저 봉긋한 구릉처럼 보일 뿐이다. ..
백제인의 발자국…그가 남긴 메시지 1999년 8월 풍납토성 성벽을 발굴 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은 뜻밖의 흔적을 발견했다.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누군가 뻘층에 남긴 발자국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양생 중인 콘크리트에 실수로 찍힌 발자국이었다. 이 발자국의 연대는 기원후 200년 쯤으로 추정됐다. 백제는 최소한 2차례 이상에 걸쳐 풍납토성을 완성했는데, 발자국이 찍힌 곳의 연대측정 결과 기원후 200년 쯤으로 측정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발자국은 최소한 1800년 전 백제인의 발자국인 셈이다. 발자국의 크기는 폭 12㎝, 길이 36㎝ 정도됐다. 주인공의 발자국은 뻘을 밟으면서 약간 밀려 실제의 발 크기보다 크게 나온 것이리라. 한성백제의 도성으로 지목된 풍납토성의 성벽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백제인의 발자국. 1800년 전 쯤 성을 쌓..
전모…베이징 원인 실종사건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이다.’ 1650년 무렵, 영국 국교회의 제임스 어셔 대주교는 아주 흥미로운 계산을 해낸다. 성경의 인물들을 토대로 천지창조일을 역산한 결과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날짜를 지목한 것이다. 유럽인들은 이후 이 날짜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날’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로부터 꼭 206년이 지난 1856년, 독일 뒤셀도르프 인근의 네안더 골짜기 석회암 동굴에서 이상한 화석이 발견됐다. 채석공들의 삽에서 골반뼈와 눈 위 부분이 뚜렷하게 튀어나온 머리뼈를 비롯, 상당량의 뼈들이 걸려나온 것이다. 사람 같지만, 오늘날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돌출이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상상할 수 없었다.(네안더 골짜기에서 확인된 고인류라는 뜻에서 네안데르탈인..
3000년 전 청동기 마을의 비밀 춘천 중도에서 확인된 고인돌 군. 이런 고인돌들은 흔히 알려진 거대한 탁자식이나 바둑판식 고인돌이 아닌 개석식 고인돌이다. 소박한 형식의 고인돌이다. |서성일 기자 100년 전에도 심상치 않은 곳이었나 보다. 일본의 고고·인류학자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역시 그 냄새를 맡았다. 하기야 강(江)은 선사시대의 고속도로(강)이자, 문명의 젖줄이니까…. 게다가 땅이 가라앉으며 이뤄진 침강분지인 춘천 일대는 북한강과 소양강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가 쌓여 이뤄진 비옥한 충적대지였다. 그러니 농사를 짓게 된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1915년 식민지 경영을 위해 조선의 구석구석을 답사하던 도리이는 소양강변 춘천 천전리(泉田里·샘밭)에서 10기에 가까운 고인돌과 돌무지 무덤(적석총)을 확인했..
중국어에 능통했던 이순신 가문 “중국말을 10년 배워도 중국현지에 두어 달 다녀온 사람만도 못합니다. 사역원에서는 마지못해 한어(중국말)을 한다해도 평상시에는 늘 우리 말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1442년(세종 24년) 사역원 제조 신개가 답답하다는 듯 아뢴다. 요컨대 중국어 교육이 잘못 되었으니 교육방식을 파격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역원 내에서는 공사를 의논하거나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할 때 무조건 중국어를 쓰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이를 어기는 생도는 그 때마다 매질을 가하도록 하소서.” 신개는 그러면서 “만약 이를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무거운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간언한다. 명나라 사신인 예겸(倪謙)과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1418~1456), 신숙주(1417~1475), 정인지(1396~1478) ..
어느 임금의 절규, '정신병이다. 나 좀 살려주라!' “마음의 병이 있습니다. 재앙이 오겠습니까.(有疾心 唯有害)” 은(상)나라 반경~무정 시대(기원전 1300~1192년)의 갑골문에 나오는 흥미로운 내용이다. 갑골문은 은(상)의 임금이 정사를 펼칠 때 미리 점을 친 뒤 그 내용을 거북껍질이나 소 어깨뼈에 새겨넣은 것이다. 이 갑골문에 표현된 ‘심질(心疾)’은 ‘지나치게 마음을 쓰거나 괴로움을 당해 생긴 질환(思慮煩多 心勞生疾)’( ‘소공’ 조)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이 갑골문은 이미 3000년 전 표현된 ‘마음의 병’ 혹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호소한 기록인 것이다. 다른 갑골문에는 “대왕의 마음이 화평할까요?(王心若)”라고 묻는 내용도 있다. 대체 군주의 자리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점까지 쳐서 ‘마음의 병’ 혹은 ‘스트레스’를 다스리려고 했을까, 뭐 그..
옛 기록에 나타난 명량해전의 진실 영화 이 요즘 히트를 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명량대첩을 옛 문헌들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영화 명량을 보기 전에, 혹은 본 후에 , , , , , , , 등에 나타난 명량해전의 기록들을 읽어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명량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10여 척의 전선으로 적함대 133척을 맞아 거둔 대첩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일본인 간첩 요시라의 이간질에 녹아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경질하고 원균을 기용한다. 그러나 원균은 왜적의 전술에 말려 대패하고 만다, 조선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 강토는 또한번 왜적의 침략에 분탕질되고 만다. 1597년 8월 조선 조정은 권율 도원수 밑에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킨다. 영화..
400년 만에 현현한 허준 선생의 체취 “‘陽平○ ○聖功臣 ○浚.” 1991년 7월 어느 날, 민통선 이북에서 의성(醫聖) 허준 선생의 흔적을 찾아다니던 서지학자 이양재씨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양천 허씨’의 족보에서 시선을 잡아끈 허준 선생의 무덤 위치, 즉 ‘파주 장단 하포 광암동 동남’이라는 구절에 ‘꽂혀’ 10년 가까이 찾아 헤매던 때였다.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허준 선생’의 묘임을 입증하는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라는 두동간 난 비석이었다.(지금의 소재지는 경기 파주시 진돔면 하포리) 왜 호성공신(扈聖功臣)이란 수식이 붙었을까.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허준은 선조를 따라 의주 피란길에 오른다. 그런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신하들이 줄줄이 임금을 팽개치고 뿔뿔이 흩어진다. 민통선 이북에서 발견된 허준 선생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