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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만에 현현한 허준 선생의 체취 “‘陽平○ ○聖功臣 ○浚.” 1991년 7월 어느 날, 민통선 이북에서 의성(醫聖) 허준 선생의 흔적을 찾아다니던 서지학자 이양재씨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양천 허씨’의 족보에서 시선을 잡아끈 허준 선생의 무덤 위치, 즉 ‘파주 장단 하포 광암동 동남’이라는 구절에 ‘꽂혀’ 10년 가까이 찾아 헤매던 때였다.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허준 선생’의 묘임을 입증하는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라는 두동간 난 비석이었다.(지금의 소재지는 경기 파주시 진돔면 하포리) 왜 호성공신(扈聖功臣)이란 수식이 붙었을까.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허준은 선조를 따라 의주 피란길에 오른다. 그런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신하들이 줄줄이 임금을 팽개치고 뿔뿔이 흩어진다. 민통선 이북에서 발견된 허준 선생의 묘..
시진핑이 언급한 '인물탐구' “한국의 고대시인 허균의 시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속마음을 매번 밝게 비추고(肝膽每相照), 티없이 깨끗한 마음을 시린 달이 내려 비추네.(氷壺映寒月)’.” 7월 초, 한국을 국빈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 친선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허균(1569~1618년)의 시를 인용했다. 시 주석은 그러면서 “이 시구는 바로 중국과 한국의 친선과 우의를 상징하는 것”이라 했다. 이 시는 허균이 정유재란 때 명나라 지원군의 일원으로 파견됐다가(1597년) 귀국하던 오명제에게 보낸 ‘송별시’이다. 허균의 송별시, 즉 ‘참군 오자어(오명제의 호) 대형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吳參軍子魚大兄還天朝)’를 더 보자. 중국의 3대 음악가로 꼽히는 정율성. 전라도 광주..
경순왕, 지뢰와 비무장지대의 호위를 받다. 경순왕릉 가는 길은 언제나 서늘한 느낌을 준다. 한여름 찌는 듯한 무더위 속인데도 그렇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 닿아있는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왕릉과 왕릉 가는 길을 잘 닦아놓고는 ‘민간인 통제선’에서 제외시켜 놓았으니…. 입구에서 왕릉까지의 길 양옆에는 ‘지뢰’ 표지를 단 울타리가 길게 펼쳐져 있다. 갈 때마다 섬뜩하다. 그 길을 100m가량 가면 시야가 확 트인다. 제법 새뜻한 모습의 왕릉이다. 왕릉을 빙 둘러싼 울타리가 예사롭지 않다. 그렇다. 저 울타리를 넘어가면 큰일 난다. 울타리 너머 손에 닿을 듯한 거리, 야트막한 성거산 능선이 바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이니 말이다. 그뿐인가. ‘신라경순왕릉(新羅敬順王陵)’이라고 새겨진 명문비..
끔찍했던 1592년 4월 15일 1731년(영조 7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은 경악할만한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동래성 수축을 위해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으로 보이는 백골들을 다수 발견한 것이다. 숫자는 최소 12명이었다. 포환(砲丸)과 화살촉들이 백골의 사이에 띠를 이뤘다. 당시 정언섭이 건립한 ‘임진망전유해지총(壬辰亡戰遺骸之塚)’의 비문을 보라. “전후에 발굴된 유골 수는 대개 열둘이지만 이는 특별히 그 형체와 해골이 완연한 것이고,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에 숙연해진 정언섭은 백골들을 수습한 뒤 비문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제전(祭田)을 설치했다. 정언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향교에 넘겨 해마다 유생들에게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동래성에서 확인된 20대 ..
'정몽주으리', 포은은 '의리!'의 조상이다. “간신 정몽주가…정권을 잡고서 전하(태조 이성계)를 도모하려 하다가 (1392년) 4월 4일 참형을 당했는데….”( 1392년 12월 16일조)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이 올린 상소문이다. 조준은 포은 정몽주를 ‘간신’이라 일컫고 있다. 당연했으리라. 정몽주야말로 역성혁명의 최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정몽주는 조준의 언급대로 태조 이성계를 죽이려고까지 했으니까…. 개성 선죽동 정몽주의 집터에 있는 숭양서원, 1573년(선조 6) 개성유수 남응운이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서경덕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개성 선죽교 위쪽 정몽주의 집터에 서원을 세우고 문충당(文忠堂)이라 했다. ■이성계에겐 '양정(兩鄭)'이 있었다 원래 정몽주와 이성계의 관계는 도타웠다. 1364년 2월 정몽주는 이성계를 처음 만..
판다 외교와 코끼리 외교 ‘판다외교가 재개됐다?’ 최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국빈 방문하면서 판다 한 쌍을 도입하기로 햇다. 지난해 6월 중국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 때 체결한 양해각서에 따라 기증된 따오기에 이어 두번째 동물외교이다. 중국이 이른바 ‘판다외교’를 펼친 예는 많다. 1941년 12월 중국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이 미국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에 한쌍을 기증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반일전선 구축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보낸 미국 정부를 향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후 국민당 정부가 무너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을 석구너한 이후에도 판다는 외교사절의 역할을 톡톡해 해냈다. 예컨대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방문 때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는 연회장 ..
자책골 선수 피살, '광란의 범죄' “자살골에 감사한다.” 1994년 7월 2일(현지 시간) 새벽 3시, 콜롬비아 제2의 도시 메데인의 한 클럽 주차장에서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괴한들이 축구대표 수비수 안드레아스 에스코바르를 에워싸고는 ‘자살골, 고맙다’고 비아냥대면서 6발의 총탄세례를 퍼부었다, 괴한들은 한발씩 쏠 때마다 ‘골, 골, 골, 골, 골, 골’이라고 외치며 저주를 퍼부었다. 비극은 94미국 월드컵 무대에서 잉태됐다. 발데라마와 이기타 등 걸출한 스타들이 축을 이룬 콜롬비아는 남미 예선에서 전통의 강호 아르헨티나를 5-0으로 대파하는 등 역대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축구황제 펠레는 “브라질보다 더 브라질다운 축구를 하는 팀”이라면서 콜롬비아를 유력한 우승후보로 꼽았다. 이 예언이 바로 ‘펠레의 저주’를 연 서막이었음..
고지쟁탈전에 흘린 젊은 넋들의 피 “정말 저기가 비무장지대가 맞나.” 강원 철원 홍원리 평화전망대에 오를 때마다 색다른 느낌을 갖는다. 비무장지대란 높고 깊은 산악지대, 즉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게 일반상식인데…. 그러나 철원은 해발 220~330미터 위 용암대지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이다. 당장이라도 논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평야를 품에 안고 있는 저편 고지와 능선의 이름, 그리고 사연을 알게 되면 나른한 평온이 깨진다. 전망대에서 맨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백마고지다. 이곳에서는 1952년 10월6일부터 백마고지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 만 명의 인명피해를 주고받은 뒤 마침내 한국군 9사단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백마고지는 지금 민간인들은 갈 수 없는 남방한계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