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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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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멀쩡한 남녀를 경주 월성의 성벽 바닥에 죽여 묻었을까 경주 월성은 신라 1000년 사직을 지킨 궁성인데요. 2016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장기조사를 벌이고 있는데요. 해마다 굵직굵직한 발굴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월성 해자(침입을 막으려고 만든 연못이나 도랑)가 두차례에 걸쳐 조성됐다는 올해 발굴성과가 발표되었습니다. 뭐 그렇게 대중적으로 관심을 끌만한 내용은 아니어서 심드렁하게 보도자료를 살폈는데요. 그러다 자료 중에 3년 전(2017년)의 발굴내용이 첨가되어 있어서 다시금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서성벽 기단부에서 확인된 인골 두 구. 성벽의 기저부 밑에 정연한 모습으로 누워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성벽 맨 밑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 그것은 바로 월성의 서벽 기단부에서 발견된 2구의 인골이었답니다. 이 인골은 다름아닌 사람을 제사에 ..
600년 도읍지 한양, 동전던지기로 낙점된 사실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새로운 도읍지가 된 한양(서울)이 어떻게 낙점되었는지 아십니까. 원래의 유력후보지가 계룡산이었다가 한양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죠.또 한양으로 새로운 도읍지를 정할 때 궁성의 방향을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하죠. “인왕산을 진산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산을 좌청룡우백호로 삼아야 한다”는 무학의 주장에, 정도전이 “그리되면 임금이 동쪽을 향해 앉게 되는 것”이라면서 “자고로 군주는 남면(南面), 즉 남쪽을 향해 앉아야 한다”고 응수한거죠. 지금의 청와대·경복궁처럼 북악산을 진산으로 해야한다는 거죠. 여기서 더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자기 주장이 ‘킬’되자 무학대사가 “200년 뒤 내 말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말…. 200년 뒤라면..
고려 역사 최대의 미스터리…태조 왕건은 왜 만부교 사건을 일으켰나 “제발 고려 좀 배워라!” 조선의 광해군은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섬기려고 애쓰는 조정의 공론을 한심스러워하면서 “고려의 외교 좀 배우라”고 가슴을 쳤답니다. 왜일까요. 고려의 ‘줄타기 외교’하면 정평이 나있기 때문입니다. 즉 고려는 거란(요)-금-몽골(원)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얼음판 외교를 펼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물론 세계제국 몽골(원)의 애간장을 녹일만큼 능수능란한 곡예외교를 펼쳤답니다. 개성의 태조 왕건릉에 봉안된 ‘태조 왕건’ 영정(왼쪽 사진). 태조가 왜 만부교 사건을 일으켰는지는 1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속시원히 풀 수 없다. 오른쪽 사진은 이인문의 낙타도(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곡예외교의 달인인데…뭐 다른 예를 들 필요도 없죠.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고종은 '전깃불 얼리어댑터'...에디슨의 전구 발명 7년만에 경복궁을 밝힌 이유 어떤 이들은 조선을 두고 시대착오적인 쇄국정책으로 근대화가 늦어진 나머지 망국을 초래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유독 한 분야에 관한 한 중국 및 일본보다 앞서 서구문물을 받아들인 예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바로 전깃불입니다. 그 유명한 토마스 에디슨(1847~1931)이 인류 역사상 위대한 백열전구를 발명한 것은 1879년 10월이었습니다. 1887년 1~3월 사이 조선의 정궁 경복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건청궁에 전등을 설치하고 불을 밝혔다. 전등 설치에 관한한 중국과 일본보다 2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한국전력 전기박물관 홈페이지 ■1887년 1~3월 경복궁을 환하게 밝힌 전등불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7년 여가 지난 1887년(고종 24년) 1~3월 사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가장 깊숙한 건청..
일본 장관의 경천사 탑 강탈사건을 폭로한 두 외국인은 누구? 1900년대 초까지 개성에서 약 20㎞ 떨어진 풍덕군 부소산 기슭에 있는 절터에는 특이한 탑 한 기가 서있었습니다. 아(亞)자형 3단 기단을 빼면 10층이어서 경천사 10층 석탑이란 이름이 붙었고, 높이가 13m나 되는 대형탑이었습니다. 옥개석 밑에 새겨진 명문(발원문) 등에 이 탑의 조성자는 1348년(충목왕 4년) 원나라에 빌붙어 권세를 누린 강융(?~1349)과 고용보(?~1362) 그리고 원나라 승상 탈탈(1314~1355) 등입니다. 이들은 고려왕실이 아니라 순전히 원나라 황제(혜종·재위 1330~1370)와 황후(당시 고려 출신인 기씨), 황태자 등의 만수무강을 빌기위해 이 탑을 조성했습니다.오른쪽 사진은 1902년 무렵의 경천사탑 10층석탑. 왼쪽 사진은 겅천사탑 강탈사건을 특종보도한 190..
15살 소녀를 묻은 잔인한 순장제도…신라와 가야의 운명 갈랐다 얼마전 경남 창녕 교동 및 송현동 고분군의 교동 2지역에서 도굴 없이 노출된 63호분을 발굴한 결과 금동관을 비롯하여 각종 장신구를 온몸에 치장한 무덤 주인공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요. 발굴단에서는 무덤 주인공의 몸쪽에 놓인 장신구의 출토상황과, 은장도 및 굵은 귀고리 등 주로 여성 무덤에서 보이는 유물 등으로 신장과 성별을 추정한 결과 1500년 전에 죽은 신장 155㎝ 가량의 여성이라고 조심스레 추정했습니다. 2006년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 확인된 인골(왼쪽 사진)을 과학적으로 복원한 얼굴(오른쪽 사진). 첨단과학으로 복원한 결과 이 인골의 주인공이 16세, 키 152.3㎝, 허리 21.5인치의 여성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 소녀에게 ‘송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16살 소녀 ..
이토 히로부미의 16번째 죄악…고려청자 '싹 다!'로 조선을 도굴천지로 만든 죄 며칠 전 입맛이 개운치 않은 소식이 하나 떴더라구요. 한국은행 본점 화폐박물관(옛 조선은행 본점)에 머릿돌(정초석)이 있는데요. 눈썰미가 있는 분들이라면 본 기억이 나시죠. 그런데 이 머릿돌 글씨가 초대 한국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의 친필로 확인되었습니다. 지난 10월 26일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지 111주년이 되던 날이었는데요. 이토 히로부미가 일왕에게 상납한 고려자기 중 97점이 1965년 한·일 협정 체결에 따라 반환됐다. 그중 ‘청자 구룡형 주전자’는 보물(제425호)로 지정됐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알려지지 않은 이토의 죄악그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의 흔적이 서울 한복판에 남아있었던 것도, 그 머릿돌 글씨가 다름아닌 이토였다는 사실을 몰..
평양의 미인기생 차릉파는 왜 신라금관을 썼을까…1935년 '금관 기생 사건'의 전모 역사는 History, 히스토리는 이야기죠.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가는 ‘이기환의 Hi-story’입니다. 이번 주는 ‘신라 금관을 쓴 평양기생’입니다. 참 기막힌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주부터 경주 서봉총을 재발굴(2016~2017)한 성과를 담은 테마전시회(2021년 2월28일까지)를 열고 있는데요. 제목이 ‘영원불멸의 성찬’입니다.‘무엄하고 무례한 이 난거-기녀의 머리에 국보 금관을 씌우다니’라는 제목으로 고이즈미의 폭거를 고발한 조선일보 1936년 6월23일자서봉총은 남분과 북분이 맞닿은 표주박 형태의 쌍분이고, 1500년 전에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되는데요. 일제강점기인 1926년(북분)과 29년(남분) 발굴했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발굴해놓고 출토품들을 정리하지도, 발굴보고서도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