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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의 수수께끼, 일본열도에서 숨쉬다 골프 여행으로는 가벼운 발걸음이리라. 비행기로 불과 1시간30분 거리인 ‘따뜻한 남쪽나라’여서 그럴까. 친구끼리, 부부끼리…. 1월24일, 한 겨울 금요일 낮 인천발 미야자키행 비행기는 골프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만원사례였다. 미야자키 공항 한편에 산더미처럼 쌓인 수 십 개의 골프가방은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북새통을 뚫고 백제왕의 전설이 숨쉬는 난고손(南鄕村)의 ‘구다라노사토(百濟の里)’, 즉 백제마을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렸지만, 체감거리는 만만치 않았다. 규슈 산맥 끝자락의 심산유곡을 휘감는 산길을 돌고 돌아가는 여정…. 굽이굽이 흐르는 고마루(小丸) 강을 따라 한 1시간30분 정도 갔을까. 저만치에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걷고 있는 마츠리(お祭り) 행렬이 보였다. ‘미카..
백정놈의 '춘추필법' 1)“의 법은 ‘무군(無君)’, 즉 임금을 업신여기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도전·남은의 관을 베고, 저택(저澤·대역죄인의 집을 헐어 연못을 조성하는 일)하소서.” 1411년(태종 11년), 대사헌 박경 등은 이미 처단된 정도전 일파를 부관참시하고, 그들의 집을 파헤쳐 연못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태종 이방원이 ‘백성의 나라’를 꿈꿨던 삼봉 정도전을 주살한 지(1398년) 13년이나 흘렀는 데도 ‘정도전을 한번 더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 친 것이다. 공자가 제자를 시켜 길을 묻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 공자는 일생의 역작이라는 를 지은 뒤 "훗날 나를 칭찬하는 것도, 나를 비난하는 것도 모두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역심을 품은 죄 2)“의 법은 ‘난신을 죽이고 역적을 칠..
장애인 외교특사까지…. 조선의 선진적 장애정책 “이덕수는 적임이 아닐 듯 하옵니다. (귀가 어두워) 돌발발언이 튀어나오면 어쩝니까.” 1738년(영조 14년), 영조 임금은 청나라로 파견할 외교사절(동지정사)로 도승지 이덕수를 임명했다. 그러자 사헌부는 반대의 뜻을 전했다. 이덕수의 문학과 지조는 견줄 자가 없지만, 외교사절로서는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덕수는 귀가 들리지 않은 증세, 즉 ‘중청(重聽)’을 앓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직상소를 여러번 올렸지만 번번이 반려됐다. 대신 영조는 옆사람을 시켜 큰소리로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눈웃음(目笑)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 이덕수를 청나라 외교사절 단장으로 보낸다니…. 아닌게 아니라 걱정스러울 법도 했다. 하지만 영조 임금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중국어에..
끔찍했던 1968년 1968년 10월말 울진 삼척에 북한 124군 부대 소속 유겨대원 120여 명이 침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68년은 끔찍했다. 미증유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이틀 후(1월23일)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납치됐다. 미국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원산만 근처에 급파하고 핵폭탄 사용까지 불사하겠다고 압박했다. 구정인 1월30일에는 북베트남 게릴라들의 이른바 ‘구정공세(Tet Offensive)’가 펼쳐졌다. 그해 10월30일부터는 울진·삼척에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120여명이 연속침투했다. 이들은 15명씩 모두 8개조로 산간농촌마을에 나타나 위조지폐를 나눠주고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가 전쟁의 공포에서 떨었던 한 해였다. 이 세 사건은..
'침묵의 절규', 1.12사태 무장공비 무덤 경기 파주 적성면 답곡리 37번 국도변에 조성돼 있는 ‘북한군/중공군 묘지’. 이곳에는 1·21사태 때 청와대 습격을 목표로 남파됐던 124군 특수부대원들이 묻혀 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무명인 유해 8구와 ‘북한군 중위 나정길’ ‘상위 김시웅’ ‘소위 김수윤’ ‘상위 김춘식’ ‘중위 김길수’ ‘중위 임용택’ ‘소위 조명환’ ‘소위 현수제’ ‘소위 박양조’ ‘소위 방양진’ ‘소위 최준일’ ‘소위 김달신’ ‘소위 김창국’ ‘소위 박기철’ ‘소위 김순국’ ‘소위 권호신’ ‘소위 김일태’ ‘소위 김을식’ ‘소위 한수군’ ‘소위 유형호’ 등 사살자와 자폭자 이름이 보인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따따따따~” 1968년 1월10일 새벽, 황해남도 사리원의 인민위원회 건물에 정체불명의..
'분서갱유'는 진시황의 죄상이 아니다. “진나라는 분서를 자행했다. 그러나 육경(六經)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나라는 갱유를 저질렀다. 그러나 유생들이 끊어지지 않았다.” 청말 민국 초의 사상가인 캉유웨이(康有爲·1858~1927)는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이렇게 평했다. 캉유웨이는 과연 유교 경전(육경)을 포함, 천하의 모든 서적들을 깡그리 불태우고, 모든 유생들을 산채로 묻어버린 진시황의 폭군 이미지를 ‘세탁’하려 했던 것일까. 중국 CCTV 프로그램에서 를 강의한 왕리췬(王立群) 교수(허난대)의 (김영사)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를 펼쳐 들었다. 진시황이 죽은 때가 기원전 210년이고, 사마천이 를 쓴 중심연대를 대략 기원전 110년 언저리로 본다면…. 약 100년의 차이라면, 사실상 동시대의 역사인 셈이 아닐까. 바로 그 시대의..
"남자 의사가 여인의 살을 주무르니…" “산증(疝症·생식기와 고환이 붓고 아픈 병증)과 복통이 있었는데…. 어제부터 대소변이 보통 때와 같지 않구나. 의녀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써야 할 약을 의논하여라.”(1544년) 에 나오는 임금의 지시사항들이다. 중종임금이 의녀, 즉 여자의사를 무한신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의녀들이 임금의 비뇨기 질환도 돌봤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에 등장하는 여의는 아마도 ‘의녀 장금’일 가능성이 크다. 중종이 얼마나 장금을 신뢰했는지는 곳곳에 등장하는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장금이 에 처음 등장하는 때는 1515년(중종 10년)이다. “의녀 장금은 왕후 출산에 공이 커서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했는데, 대고(大故·왕후의 죽음)가 이어지는 바람에 받지 못했다. 그에게 상을 베풀지는 못할만정 형..
'소나무 양병설'의 현장 연미정(燕尾亭).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서 한 줄기는 서해로, 다른 한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 모습이 ‘제비꼬리’ 같다 해서 ‘연미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삼포왜란 때 전공을 세운 황형 장군(1459~1520년)에게 하사한 정자이다. 황형 장군의 전설은 신비롭기만 하다. 낙향 후 연미정에서 바둑으로 소일하던 장군은 동네 아이들에게 볶은 콩을 나눠 주면서 소나무 묘목을 옮겨오라고 시켰다. 아이들이 싫증을 느끼면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하면서 소나무를 계속 심었다. 동네사람들이 물으면 ‘그저 나랏일에 쓰일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강화 3경인 연미정의 절경. 제비꼬리 처럼 닮은 지형에 놓인 정자라 해서 이름붙었다. 황형 장군의 ‘소나무 양병설’과 ‘정묘조약 체결’, ‘유도 송아지 구출작전’ 등 갖가지 사연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