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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기원의 열쇠 ‘DNA’- 마틴 존스 <고고학자 DNA 사냥을 떠나다> ▲고고학자 DNA 사냥을 떠나다…마틴 존스|바다출판사 유적에서 토기가 출토됐다고 치자. 그러면 고고학자들은 부드러운 솔로 항아리에 묻어있는 먼지와 쾨쾨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유기체를 조심스레 털어낼 것이다. 신주 모시듯 하면서…. 그러면서 기왕의 토기편년에 막 나온 유물을 대입시켜 연대가 어떻고, 성격이 어떻고를 설왕설래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고학은 한물 간 시대가 되었으니 세상, 참…. 이젠 막 출토된 토기는 거들떠보지 않고 토기에 묻은 생체분자들을 모아 최첨단 실험실로 가져간다. DNA 분석을 위해서다. 이 괴상한 사람들은 생체분자 고고학자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고고학자 노릇하기도 힘들어졌다. 고고학자는 고생물학, 분자생물학, 지구화학, 법의학 등 골치아픈 자연과학 공부까지 섭렵해야 행세할 수 ..
18세기 천재들 ‘벽과 치’- <안대회 조선의 프로페셔널> ▲조선의 프로페셔널…안대회|휴머니스트 일찍이 박제가 선생은 벽(癖)이 없는 인간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쳤다. 여기에 치(痴)를 하나 더 붙이자. ‘벽과 치’. 이덕무 선생이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읽는 바보라는 호를 지은 이유다. 요즘 말로 한다면 ‘마니아’ 혹은 ‘폐인’이라 할까. 뭐 그런 뜻으로 한다면 10년 이상 고전에 빠져 불과 한달 반 만에 책을 두 권 내는 등 내공을 뿜어내는 저자야말로 ‘벽과 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각설하고 저자는 ‘벽과 치’, ‘마니아와 폐인’을 ‘프로페셔널’이라 칭했다. 저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카스트적인 신분사회질서가 횡행했던 조선에서 독보적인 ‘벽과 치’로 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나 이들의 삶을 발굴하는 일 또한 지난한 작업이었을 터. 그런 의미..
(5) 파주 진동 허준의 묘 1982년 어느 날. 서지학자 이양재씨는 어떤 골동품 거간꾼으로부터 한 통의 간찰(편지)을 입수했다. 눈이 번쩍 띄었다. “7월17일 허준 배(許浚拜). 비가 와서 길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내용이야 그렇다 치고 글쓴이가 허준이라고? 서지학자는 그만 흥분했다. “사실확인에 들어갔죠. 허씨 대종회를 찾아가 종친회 족보에서 준(浚)자를 썼던 분을 몇몇 발견했는데요.” 그러나 준(浚)자 이름을 지닌 분들 가운데 이런 초서의 글을 멋들어지게 쓸 만한 학식과 지위에 있었던 이는 단 한분이었다. 바로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선생이었다. 더구나 글자체도 16~17세기쯤으로 추정됐다. ‘양천허씨족보’를 검토한 결과 한국전쟁 이후 실전(失傳)된 허준의 묘가 ‘장단 하포 광암동 선좌 쌍분(雙墳)’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4)파주 백학산 석불 “여기에는 지뢰 같은 것 없죠?” '> 기자가 농처럼 묻는다. ‘미확인 지뢰지대’라는 빨간 딱지의 표지를 스치듯 지나가노라니 왠지 꺼림칙하다. 수풀을 헤치며 다가가는 발걸음이 섬뜩하다. 그래서 묻노라면 동행한 이재 국방문화재연구원장과 이우형 연구원이 씩 웃는다. 그러면서 되받아치는 농담. “음, 신문도 아무리 철저하게 교정을 보아도 오·탈자가 생기잖아요. 여기도 마찬가지죠.” 오·탈자의 악몽에 시달려온 기자들에게는 참으로 절묘한 비유다. 지뢰탐사반이 철저하게 훑고 지나가도 간혹 발견하지 못한 지뢰가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니까. “야! 정말 끝내주는 비유네!”하고 박장대소하지만 등짝에 맺히는 식은 땀방울을 어찌할꼬. 6·25 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백학산 고지(229m·파주시 군내면 읍내리)...
(3) 파주 서곡리 벽화묘 -한씨자손이 권준선생을 600년 모신 사연- “민통선 안에서 누가(도굴범) 물건을 꺼내왔다는데…. 무덤에 뭔가 그림 같은 게 있다고 하네요.” 1989년 어느 날, 당시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에게 한 통의 제보가 들어왔다. 도굴된 벽화묘? 우리나라에서, 특히 한반도 남부에 벽화묘는 극히 드문 것이어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제보자는 무덤의 위치를 파악한 뒤 정실장에게 전했다. “파주 서곡리 야산이랍니다. 비석도 있다네요. 청주한씨, 문열공 한상질의 묘라고 하네요.” 한상질(1350?~1400년)이라. 여말선초의 문신이자, 세조 때의 권신인 한명회의 할아버지. “벽화묘라니까 발굴조사가 필요했어.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한병삼씨(작고)도 청주한씨거든. 내 대..
서라벌 인구가 100만…삼국유사는 사실일까- 이기봉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대도시 경주의 탄생…이기봉|푸른역사 “신라의 전성기엔 경중(京中)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삼국유사 진한조) 가구당 5~6명이 살았다치면 전성기 신라의 왕경엔 90만~120만명에 이르는 인구가 살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렇게 믿는 연구자는 거의 없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망정이지 우리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엄연한 기록을 ‘그럴 리 없다’고 폄훼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조선의 한양도 기껏해야 4만~5만명이 살고 있었는데, 신라에 무슨 90만명이냐는 것이었다. 연구자들은 암묵적으로 신라전체의 인구를 250만명(50만~60만호)으로 추산해왔다. 그렇다면 전체인구의 30~36%가 왕경에 살았다는데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2) 파주시 탄현면 ‘오두산성’ -고구려·백제 치열한 106년 전투 ‘관미성’- “저기가 북한입니다. 한 3㎞ 떨어졌을까요. 저기 보이는 곳은 북한의 선전촌이고요. 김일성 사적관도 보이고….” 경기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엔 오두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요즘은 통일전망대로 더 유명한 야트막한 산(해발 112m)이다. 뿌연 안개 사이로 갈 수 없는 땅 북한 관산반도가 어렴풋이 보인다. 손에 잡힐 듯 지척이다. “썰물 때는 도섭(걸어서 건널 수 있는)할 수 있는 지점도 조금 더 가면 있어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난다 해서 교하(交河)라 했던가. 윤일영 예비역 장군의 말이 새삼스럽다. 팽팽한 남북 분단의 상징…. 1600년 전에도 그랬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쟁탈의 요소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문헌상 기록으로도 우리는 4~5세기 이곳을 무대로 ..
왕들이 사랑했던 조선의 ‘참 궁궐’- 최종덕 <창덕궁> ▲창덕궁…최종덕|눌와 창덕궁은 또하나의 세상이다. 한 나라를 다스렸던 임금과 왕실이 평생동안 백성을 생각하면서 살았던 공간이다. 임금이 의식을 행했던 인정전에서 의상실(상의원), 종합청사격(궐내각사), 집무실(선정전), 임금과 왕비의 생활공간(희정당·대조전) 등등. 어디 그뿐인가. 내일의 조선을 이끌 왕세자에게 자연관찰기록과 각종 볼거리를 제공했던 ‘디즈니랜드(연영합·중희당)’가 있고, 헌종이 마침내 사랑을 쟁취한 낙선재·석복헌·수강재, 그리고 무미건조한 궁궐의 따분한 삶을 씻어줄 후원까지…. 그러나 후원에서조차 그저 놀지 않았다. 군사훈련을 친견하기도 했고, 국가산업의 기틀인 양잠과 농사 권장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렇듯 창덕궁은 골육상쟁의 피로 얼룩진 경복궁을 기피한 태종때부터 역대 임금들의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