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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논개작전' 철원 동주산성(해발 360m)에 서면 철책너머 저 까마득한 북쪽에 지평선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둑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군사분계선 너머 갈 수 없는 땅, 그곳이 바로 평강고원이다. 야트막한 봉우리 두 개가 여렴풋 하고, 그 너머엔 제법 거대한 산 하나(장암산·해발 1052m)가 버티고 있다. 산인지, 혹은 고지인지 모를 두 봉우리 중 하나는 낙타고지(432.3m)요, 또 하나는 오리산(453m)이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낙타고지는 그렇다치고, 여기서는 오리산(鴨山)을 주목하자. ■아! 평강고원 왜냐? 이 야트막한 오리산과 그 너머 검불랑(680m)은 지금도 내부에서는 끓고 있는 휴화산이다. 인류가 처음 등장했던 4기 홍적세(200만년~1만 년 전) 때 이 오리산과 검불랑에서 최소한..
18세기 한류, 조선통신사의 영욕 “임금(영조)께서 통신사로 떠나는 세 사신을 불러 친히 ‘이릉송백(二陵松柏)’의 글귀를 외웠다. 임금은 목이 메고 눈물을 머금은 듯 했다. 그러면서 친히 ‘호왕호래(好往好來)’, 즉 ‘잘 다녀오라’는 네 글자를 직접 써서 사신들에게 나눠주었다.”(조엄의 ) “임금이 사신들을 불렀다. ‘그대들에게 시 짓는 능력이 있는지 먼저 시험해보고자 하니 글을 짓고 차례로 제출토록 하여라.’”(원중거의 ) 계미년인 1763년 7~8월, 영조는 일본으로 떠나는 사신단에게 두가지 사항을 신신당부했다. 첫번째는 ‘이릉송백’의 치욕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릉’이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도굴되어 시신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던 선릉(성종)과 정릉(중종)을 뜻한다. 왜란 이후 조선의 사절로 일본을 방문한 윤안성은..
신라를 울린 '효녀지은' 이야기 “얘, 지은아. 예전엔 밥은 거칠었지만 맛은 좋았는데, 요즘에 먹는 밥은 좋기는 하지만 밥맛은 예전같지 않구나. 마치 칼날로 간장을 찌르는 것 같고….” 신라 진성왕(재위 887~897년)대의 일이다. 경주 분황사 동쪽 마을 살던 효녀 지은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눈이 먼 홀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32살이 되도록 시집도 가지 못했다. 지은의 삶은 고단했다. 날품팔이와 구걸로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부잣집에 몸을 팔아 종이 되었다. 지은은 몸을 판 조건으로 쌀 10여 섬을 마련했다. 하루종일 주인집에서 일한 뒤 저녁에 밥을 지어 어머니를 주었다. 하지만 3~4일 후 어머니는 밥맛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허구헌날 거친 밥만 먹다보니 윤기가 흐르는 쌀밥을 뱃속이 ..
'한마디 농담'으로 세워진 나라 “얘들야, 앞의 말은 농담이었느니라.(前言戱之耳)” 공자님이 순간 진땀을 흘리면서 “내 말이 농담이었다”고 서둘러 변명한다. 제자 자유(子游)가 정색을 하며 대들었는데, 그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공자 ‘농담사건’의 사연을 들어보자. 공자가 어느날 제자 자유가 다스리고 있던 고을인 무성(武城)에 갔다. 마침 고을 곳곳에서 비파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요순시대의 고복격양가(鼓腹擊壤歌)와 같은 태평성대의 노래소리였다. 공자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농을 던졌다. “어째 닭 잡는데 소잡는 칼을 쓰는 것 같구나.(割鷄 焉用牛刀)” 춘추시대 진나라의 봉지. 춘추 5패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했던 진나라는 주나라 천자의 농담 한마디 덕분에 건국됐다. (출처:인성핑의 , 시공사, 2003년) ■공자의 ‘..
공자의 역사왜곡과 '춘추필법' 1508년, 치세 3년째를 맞이한 중종 임금이 승정원과 예문관에 뜻깊은 선물을 하사했다. 붓 40자루와 먹 20홀을 나눠준 것이다. 중종은 그러면서…. “임금의 허물을 간하는 신하를 직신이라 했고, 잘못을 알면서도 아첨을 선(善)이라 고하는 자는 유신(諛臣)이라 한단다. 그 옛날 당나라 태종이 겉으로는 넓은 도량을 갖고 있었지만 ‘부끄러운 덕(慙德)’도 아울러 있었으니 과인은 그를 본받지 않으련다. 그대들은 숨김없이 말아라. 비록 지나친 말이 있다해도 죄를 가하지 않으련다.” 이른바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끈 성군의 상징인 당 태종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으니 본받지 않겠다? 중종은 두 형제를 무참히 죽이고 황제에 등극한 당 태종을 ‘부끄러운 덕’이라 폄훼한 것이다. 사관들은 ‘사관의 직필’을 상징하..
'쥐와 참새' 창궐로 붕괴된 복지서비스 “고구려 고국천왕 16년(194년), 임금이 사냥 나갔다가 길가에 주저앉아 우는 자를 보고 연유를 물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날품팔이로 어머니를 공양해왔는데, 올해 흉년이 들니 먹고 살 길이 막막합니다.’ 임금이 한탄했다. “이것은 나의 죄가 아닌가. 백성들을 이렇게 굶기다니….”( ‘고국천왕조’) 고국천왕은 그 사람에게 옷과 음식을 주었다. 그런데 만약 그것으로 끝났다면…. 어느 사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군주의 측은지심에서 비롯된 임시방편의 빈민구제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담당관청에 일러 홀아비와 과부, 고아, 독거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구휼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해마다 3월부터 7월에 이르기 까지 관의 곡식을 내어 백성의 가구수에 따라 ‘차등있게 ..
그렇다면 세종도 '종북파'다 “하늘이 하늘이 된 까닭을 아는 사람은 왕업을 이룰 수 있지만 하늘이 하늘이 된 까닭을 모르는 사람은 왕업을 이룰 수 없습니다.(知天之天者 王事可成 不知天之天者 王事不可成)” 기원전 204년. 한나라 고조 유방의 유세객이었던 역이기가 주군인 유방을 설득한다. 초나라 항우의 기세가 대단했을 때였다. 역이기는 항우의 총공격을 받고 고전하던 유방이 진나라 시절부터 엄청난 식량창고가 있던 오창(敖倉·지금의 허난성 룽양현 동북쪽)을 포기하려 하자 긴급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 “옛말에 ‘천하에 왕노릇 하는 사람은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백성은 양식을 하늘처럼 떠받는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고 했습니다.” 선조임금은 스스로 ‘이민위천’을 실천하지 않아 전쟁까지 불렀다고 한탄했..
금관총은 '소지왕릉'이다? ‘저 아이들, 무슨 일이지?’ 1921년 9월24일 아침 9시, 경주 노서리 마을을 순시 중이던 미야케 요산(三宅與三) 순사(경주경찰서)의 눈에 심상찮은 장면이 포착됐다. 매립된 흙 속에서 3~4명의 아이들이 뭔가 열심히 찾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보니 아이들 모두 청색 유리옥을 들고 있었다. ‘청색구슬? 혹시 고분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신라가 천년고도임을 알고있던 미야케의 머리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얘들아. 이 흙은 어느 집에서 파서 옮겨온 거야?” “저기 저 술집이요.” 아들이 가리킨 곳은 봉황대 바로 아래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문환의 집이었다. 미야케가 주막집 증축을 위한 터파기 작업을 벌이던 박문환의 집 뒷마당으로 출동했다. 금관총 발굴 당시의 모습을 그린 그림. 박문환의 술집을 확장하는 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