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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당나라' 연승 바둑 최강전 바둑을 일컫는 말은 여러가지다. ‘난가(爛柯)의 전설’(“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지 모른다”)에 등장하는 ‘신선놀음’이 바로 바둑을 지칭힌다. 또 ‘손으로 나누는 대화’라 해서 ‘수담(手談)’, ‘앉아서 은둔한다’는 뜻의 ‘좌은(坐隱)’, 흑돌과 백돌을 의미하는 ‘오로(烏鷺·까마귀와 해오라기)’ 등…. 땅은 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지방천원(地方天圓)에서 유래된 ‘방원(方圓)’, 근심을 잊게 한다는 것에서 ‘망우(忘憂)’ 등의 이름도 있다. 경주 분황사 출토 통일신라시대 바둑판 모양 전돌. 가로 세로 각각 15줄을 넣었다. 길이 42cm, 너비 43cm. ■바둑의 기원 그런 바둑의 기원은 4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요임금의 고사이다. 요 임금에게는 단주(丹朱)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변이 없..
조선 외교관 피살사건의 전모 일본을 방문한 조선사절단 가운데 ‘계미사행단’이 있다. 계미년인 1763년(영조 39년)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절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 계미사행단은 사절단장(정사)인 조엄(1719~1777)이 대마도에 들러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것으로 유명하다. 고구마는 대표적인 구황작물이다. 좋지않은 기상조건에서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울 신기한 작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엄이 이끈 계미사행의 으뜸인 공이 고구마 최초도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계미사행단의 일본방문은 우여곡절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여정이었으니…. 무엇보다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조선외교관이 일본인에게 피살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외교관 살인사건의 내막을 한번 풀어보자. 1763년 에..
역대 최강의 '복지왕'은 세종 혹은 숙종?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 보는 사람들이다.(民惟邦本 食爲民天)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굷주림을 면치 못한다니…. 너무도 가련하고 민망했다.” 1419년(세종 1년), 세종 임금이 ‘억장이 무너진다’면서 “부덕한 과인 때문에 한많은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이라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추상같은 명령을 내린다. “만일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어죽는 자가 있다면 감사나 수령에게 그 죄를 물을 것이다. 과인이 장차 관원을 파견, 감사에 나설 것인즉….”) 과연 최고의 성군(聖君)다운 조치라고 여길 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종 뿐이 아니었다. 조선을 46년 간이나 다스린 숙종은 어땠을까. 1698년(숙종 24년) 1월, 굶주림에 얼어죽은 시신이 40~50구가 쌓였다는 소식을 들은 임..
평강공주 '통곡의 바위' 아시나요. “이것 좀 보십시요.” 아차산 구리 둘레길과 온달샘으로 가던 길, 김민수 문화유산 해설사가 이상스럽게 생긴 바위를 가리켰다. 두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의 두터운 바위…. 그리고 바로 그 앞에 나신(裸身)의 여성이 엎드린채 뭔가를 부여잡고 있는 또 다른 바위…. “저 바위는 화살을 맞고 죽은 온달 장군의 ‘주먹바위’라 합니다. 이 바위는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평강공주가 급한 나머지 옷도 입지 않은채 달려와 온달장군의 투구를 부여잡고 엎드린채 울부짖는 ‘통곡바위’라 합니다.”(김민수씨) 나신의 평강공주가 온달장군의 투구를 잡고 울었다는 통곡바위.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어우러진 곳이다.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온달장군의 시신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박민규 기자 두 사람의 혼인..
운석의 경고, "운석은 하늘의 재앙" 1492년(성종 23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돈이 “운석이 떨어졌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극돈은 매우 신기한듯 운석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빛깔은 뇌설(겉이 검고 속이 흰 버섯의 일종) 같고, 모양은 복령(주름이 많은 공모양의 흑갈색 버섯) 같은데…. 손톱으로 긁으니 가루가 떨어졌습니다.” 요즘 같은 첨단의 세상에서도 운석이 떨어지니 한바탕 난리굿을 떠는데 하물며 예전에는 어땠으랴. 2013년 2월 러이사 우랄산맥 인근 첼랴빈스크주 체바르쿨 호숫가에 떨어진 운석. 운석은 세 조각으로 부서졌으며, 전체 무게가 600㎏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운석이 비처럼 쏟아졌다.’ “104년(신라 파사왕 25년) 운석이 비처럼 쏟아졌다.”() “1057년(문종 11년) 황주에 운석이 우레 같은 소..
고려 조선을 뒤흔든 사교육 열풍 “학교의 흥폐가 스승의 도(道)에 있는데…. 심지어 ‘해(亥)와 시(豕)’, ‘노(魯)와 어(魚)’의 글자를 구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선생이라 합니다.” 1429년(세종 11년) 사간 유맹문의 상소를 보면 성균관과 향교 선생들의 질이 형편없음을 고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갈 곳 없는 늙고 병든 사람들을 성균관 교관(선생)으로 발령내는 일이 다반사이며, 그마저 자주 바뀌는 형국”(중종의 언급)이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1527년(중종 22년) 지사 김극핍의 상소가 사태의 심각성을 전한다. “유생들이 선생 한사람의 기르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학부형들은 ‘관학(성균관) 공부가 안된다’며 유명 과외선생에게 수업을 받는다고 합니다.”() 공교육의 선생들은 믿을 수 없으니 실력있는 과외선생을 찾는 것이 ..
단군신화와 닮은 일본 축제 “백제마을의 시와스마츠리는 단군신화와도 흡사하다.” 난고손(南鄕村) 백제마을에 조성된 ‘니시쇼소인(서정창원)’ 전시실을 보면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전시장 패널마다 ‘시와스마츠리와 한국의 각종 의식에 흡사한 점이 많다’는 것을 일본어와 한국어로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시와스마츠리를 부여의 은산별신굿과 비교한다. 시와스마츠리가 정가·복지왕을 위한 제사라면, 은산별신굿은 백제부흥군을 이끌었던 복신과 도침 장군을 모신 제사로 알려져 있다. 둘 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찬물에 목욕재계하는 계율이 있고, 무녀들의 굿(은산별신굿)과 요카구라(夜神樂·시와스마츠리)가 신명나게 펼쳐진다는 점도 비슷하다. 정가왕과 복지왕의 신주를 모시는 시와스마츠리 행렬과, 승마전장을 한 대장군 등 6명과 깃발 30여기가 동원되는 은산별신..
백제왕의 수수께끼, 일본열도에서 숨쉬다 골프 여행으로는 가벼운 발걸음이리라. 비행기로 불과 1시간30분 거리인 ‘따뜻한 남쪽나라’여서 그럴까. 친구끼리, 부부끼리…. 1월24일, 한 겨울 금요일 낮 인천발 미야자키행 비행기는 골프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만원사례였다. 미야자키 공항 한편에 산더미처럼 쌓인 수 십 개의 골프가방은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북새통을 뚫고 백제왕의 전설이 숨쉬는 난고손(南鄕村)의 ‘구다라노사토(百濟の里)’, 즉 백제마을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렸지만, 체감거리는 만만치 않았다. 규슈 산맥 끝자락의 심산유곡을 휘감는 산길을 돌고 돌아가는 여정…. 굽이굽이 흐르는 고마루(小丸) 강을 따라 한 1시간30분 정도 갔을까. 저만치에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걷고 있는 마츠리(お祭り) 행렬이 보였다. ‘미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