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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바리 짐싼다'는 말은 6세기 신라시대부터 시작됐다 ‘바리’는 곡식 한바리 처럼 소나 말 따위의 등에 잔뜩 실은 짐을 세는 말이다. 최근 이 ‘바리’라는 단어가 1500년전부터 신라에서 짐을 세는 단위였던 ‘발(發)’이 나중에 발달한 형태라는 주장이 잇달아 제기되고 있다.권인한 성균관대 교수(국문학과)는 25~26일 경남 함안 문화원에서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의 국제적 위상’을 주제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에서 “바리는 6세기 중 후반 신라에서 ‘발(發)’로 추정되는 어형을 음사(音寫)한 글자로 추정되며 현대의 ‘바리’는 ‘발(發)’의 후대발달형일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 ‘피 한 바리’를 의미하는 피발(稗發) 글자가 보인다.|권인한 교수 제공 성산산성 목간에는 차발(此發), 차부(此負), 패발(稗發·파 한 발)과 패석(..
광해군의 논술문제, '섣달그믐밤, 그 쓸쓸함에 대해 논하라' 1800년(정조 24년) 음 3월21일과 22일 서울은 수능시험과 대기업 입사시험일을 방불케하는 시험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21일에는 왕세자(순조)의 책봉을 기념하는 특별시험인 경과(慶試·경사스러운 일을 맞아 치르는 과거) 초시가, 22일에는 춘당대에서 인일제(人日製·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치른 특별과거)가 잇달아 열렸다. ■21만1000명 중 단 10~12명만 뽑혔다. “21일의 경과(초시)는 3곳으로 나누어 치렀는데 총 응시자는 11만1838명에 달했고, 시권(답안지)를 바친 자는 모두 3만8614명이었다. 과거 역사상 관광인(觀光人)이 이렇게 많은 적이 없었다. ~인일제는 바로 경과의 다음날에 실시했는데, 과거응시자는 모두 10만 3579명이었고, 시권을 바친 자는 3만 2884명이었다…”( )..
살아남은 ‘피의 군주’ 세조의 얼굴…다른 임금의 초상화는? 조카와 친동생(안평대군)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즉 세조(재위 1455~1468)의 얼굴은 어땠을까.국립고궁박물관은 22일부터 내년 1월13일까지 지하층 궁중서화실에서 ‘세조’ 테마전시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박물관 측이 2016년에 구입한 ‘세조 어진 초본’을 최초로 공개하면서 세조의 생애, 정치·문화적 업적과 관련된 유물 30여점을 함께 선보인다.세조의 어진, 일제감점기 화가 김은호가 1735년 그린 세조 어진 모사본을 토대로 다시 옮겨 그린 초본이다.|국립고궁박물관 ■세조의 초상화 맞나이번 전시의 핵심유물인 ‘세조 어진 초본’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이왕직(李王職)의 의뢰로 화가 김은호(1892~1979)가 1735년의 세조 어진 모사본을 다시 옮겨 그린 초본이다. 표암 강세..
‘데라우치에 상납된’ 청와대 미남석불의 사연…출생지가 밝혀졌다 이른바 청와대 미남석불의 원위치가 경주시 이거사터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다. 1930년대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1916년 출판한 에 “이거사에 있던 불상을 총독관저로 옮겼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도지리 이거사터=과거에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엄존했는데, 지난 다이쇼 2년(1913년) 중에 총독관저로 옮겼다. 그 외에 목 부분에 손상이 있는 석불 1구와 광배(후광)가 있는 석불입상 1구, 석탑 1기(도괴됨) 등이 절터 부근 땅속에 묻혀 있었다.”이 자료는 2011년 작고한 이근직 경주대 교수가 일본 덴리대(天理大)에 소장된 책을 복사해서 보관했던 것이다. 이 내용을 고 이근직 교수의 부인인 주진옥 신라문화유산연구원 보존관리팀장이 16일 공개했다. 모로가는 총독부 촉탁이던 19..
감쪽같이 사라져 돌아오지 않는 '국보 보물' 열전 1990년대말~2000년대초 전국의 사당·향교·서원·사찰에 걸려있거나 모셔놓았던 영정, 초상화, 탱화 등이 수난을 당한 적이 있었다. “1990년대 말 시작된 TV 프로그램(‘진품명품’)에서 어느 사대부의 영정이 1억원이 훨씬 넘는 감정가로 추산되었어요. 이때부터 전국의 사당에 비상이 걸릴 정도로 영정을 노리는 문화재사범이 늘어났어요.”(강신태 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 ‘TV쇼 진품명품’은 문화재의 가치를 쉽게 알려주기 위해 감정가를 재미삼아 붙인 이름 그대로 ‘문화재 쇼’ 프로그램이었다. 대중을 위한 문화재 프로그램이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신선한 접근이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역기능도 나타났다. 불법 반출된 지 19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이선제 묘지 앞면. 이선제 묘지는 옆면에도 글자를 새겨..
인간 욕망의 상징, '엘 도라도'는 분명 존재했다 ‘엘 도라도(El Dorado)’는 요즘에 와서는 ‘황금의 나라’ 혹은 ‘이상향’, ‘낙원’을 의미한다. 하지만 원래는 ‘황금빛이 나는 사람(족장)’을 일컬었으며, 후에 그 족장이 사는 지역 혹은 황금이 넘치는 도시로 각색됐다. 이 ‘엘 도라도’의 원뜻인 ‘황금빛이 나는 족장’은 과연 누구일까.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이 28일까지 콜롬비아 황금박물관과 함께 열고 있는 ‘황금문명 엘도라도-신비의 보물을 찾아서’ 특별전은 바로 ‘황금을 찾아 헤매고, 황금을 위해 싸우고, 황금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특별전은 16세기 이후 ‘엘 도라도’로 알려진 콜롬비아의 황금박물관이 소장한 황금유물 322점을 소개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엘 도라도’를 찾아 아마존과 안데스산맥을 넘었던 정복자들..
'일본 짝퉁' 판결에 퇴출된 '한때 국보'의 재심을 요구한다 상원사 동종이라고 하면 강원 평창 오대산의 상원사에 있는 국보(제 36호)를 쉽게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경기 양평 용문산에도 또다른 상원사가 있으며, 그 용문산 상원사에도 한 때는 ‘국보(제367호)였던’ 동종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무엇보다 1929년 1월1일 경성방송국이 개최한 최초의 제야행사에서 타종한 유서깊은 동종이었다. 이 행사는 당시 라디오로 생중계됐다. 그랬던 ‘국보 종’에게 ‘국보였던’이라고 과거형을 쓴 이유가 있다. 지금은 국보는커녕 가짜 취급을 받고 56년 동안 방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양평 용문산 상원사에 있는 동종. 일제 강점기에 보물로 지정된 후 해방 이후 국보 367호로 명명됐다가 1962년 '일본 짝퉁'이라는 낙인이 직혀 국보의 지위를 상실했다. 종은 지금 ..
‘암행어사 출도야!’ 19세기 암행어사의 좌충우돌 체험기 “황명조는 관서의 토호이다. 사촌형인 (황)겸조의 밀고로 암행어사의 내사를 받고 있다고 지레 짐작했다. 황명조는 한밤중에 사촌형을 찔러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1822년(순조 22년) 7월8일, 암행어사 박래겸(1780~1842)이 평안남도 지방을 휘젓고 다닐 때였다. 평남의 토호 황명조가 암행어사 출현 소식에 제발이 저렸는지 그만 끔찍한 살인-자살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정작 암행어사는 자살한 황명조를 내사할 생각이 없었다. 그만큼 ‘암행어사 출몰소식’은 못된 짓을 일삼던 현지의 수령과 아전, 토호세력에게 ‘충격과 공포’였던 것이다. 1822년 4월21일 평안도 지방을 돌던 박래겸이 어느 마을을 지날 때였다. 길가 집에서 “젖 달라”고 우는 갓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박래겸은 ..